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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65화 (65/161)

65화.

정엽은 연주의 어조를 그대로 따라 하며 비아냥거렸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난을 묵묵히 견디던 연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연주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꼭 움켜쥐었다.

“…….”

헌왕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한때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정엽의 태도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 뭘 잘했다고 뻣뻣하게 굴어?”

연주가 정엽에게 사랑을 표현한 방식은 비단 서신뿐만이 아니었다. 연주는 혼인 생활 내내 정엽의 안녕과 기쁨을 위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바쳤다.

정엽이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그가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한발 앞서 챙기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순종했다.

“설마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거야?”

한데 그랬던 내게 다른 사내와 정을 통했냐니. 부끄러움조차 모르냐니!

황제에게 미움받는 처지라도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하면 알아내지 못할 것이 없는 정엽이었다.

그러니 자신과 헌왕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저를 몰아세우는 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눈에 거슬리기만 하는 전 부인의 존재를 이참에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모욕하고 망가뜨리려는 의도인지도 몰랐다.

‘내 마음을 짓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했던 세월까지 매도하다니.’

내가 저 사람을 사랑했던 세월만큼은 부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헛되이 정성을 쏟았다는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그로 인해 연주는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지난날의 괴로움과 다시금 직면해야만 했다.

“하아…….”

소정엽을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홀로 연회장을 나서던 그날까지. 주마등처럼 스치는 기억의 무게에 연주는 온몸이 저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연주가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정엽의 힐난은 멈출 줄 몰랐다.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정말 헌왕에게 정부 대접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로군.”

사금파리 같은 정엽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연주의 마음이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깎이고 쓸려 나갔다. 이제 정엽은 비난하기도 지친 듯 연주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더는 몸도 마음도 가눌 수 없어진 연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로 헌왕의 정부가 되고 싶은 거라면요?”

“……뭐?”

모든 감정이 빠져나간 가슴에 용암 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정엽에게 상처를 주고 말겠다는 열망이 연주를 지배했다.

“당신 말대로 헌왕의 품에 안기는 게 내 소원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당신이 나만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나만큼 치욕스러웠으면 좋겠어!

연주는 주먹을 꼭 말아 쥐고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정엽을 노려보았다.

쾅-!

이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험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정엽이 연주의 어깨를 움켜잡고 맞은편 벽 쪽으로 그녀를 밀쳤다. 졸지에 벽과 정엽 사이에 갇히게 된 연주가 부서질 것 같은 어깨의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정엽의 서늘한 음성에서 살의가 뚝뚝 떨어졌다. 복수심에 이성이 마비된 연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연주의 저항을 힘으로 손쉽게 제압한 정엽은 곧장 연주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 하나를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태산 같은 몸을 숙여 연주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거리를 좁혔다.

처음 느껴 보는 정엽의 흉포함에 기가 질린 연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결심을 굳힌 연주는 정엽의 눈을 곧게 응시하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헌왕의 품에 안기는 게 소원이라면…….”

“그럼 내가 널 죽여 버릴 거야.”

“…….”

“이혼하고 나서 죽겠다고 설치는 게 습관이 된 거 같은데, 그렇게 사는 게 재미없으면 지금 당장 죽여 주지. 하지만 편하게 눈감을 생각은 하지 마.”

건조하지만, 그래서 더 살벌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담담히 살인을 말하는 정엽의 얼굴은 피를 뒤집어쓰길 즐기는 야차와 다름없어 보였다.

두려움이 극에 달한 탓일까. 정엽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미친 듯 팔딱거렸다. 그러나 마주 선 정엽은 언제든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포식자처럼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으며 연주를 굽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이미 영항에서 한 번 스스로 죽겠다고 날뛰던 연주를 곱게 죽여 줄 생각까지 했던 정엽이었다. 그때는 옛정에 잠시 발목이 잡혔지만, 연주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지금은 아니었다.

“말해. 정말 내 손에 죽고 싶어?”

겁에 질린 연주는 이쯤에서 이성을 잃고 정엽을 자극한 걸 후회했다. 평생 전쟁터를 전전해 온 정엽에게 삶과 죽음은 얇은 종이 한 장 차이. 자신이 정말로 죽음을 원한다면 정엽은 당장 이 자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제 목숨을 거둘 게 분명했다.

“나, 나는…….”

“군주마마, 헌왕 전하께서 오셨사옵니다.”

연주가 적당한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할 무렵, 별당 밖에서 날아온 집사 표 씨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랐다. 정엽은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연주를 찾아왔다는 소식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문간을 노려보았다.

“……!”

연주는 정엽의 주의가 흐트러진 순간, 있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 마수에서 벗어났다. 얼떨결에 밀려난 정엽은 어느새 날다람쥐처럼 문간으로 도망쳐 버린 연주를 보고 조소했다.

“어차피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 이만 나가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연주는 직접 방문 한쪽을 밀어젖히며 정엽을 재촉했다.

“어서요.”

더 이상 연주를 다그칠 수 없게 된 정엽은 신경질적으로 남은 방문 한쪽을 걷어차며 밖으로 나갔다. 쫑알쫑알 떠드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든 저를 이겨 보겠다고 대드는 꼴이 거슬려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정엽은 바깥을 향해 활짝 열린 별당의 문을 살벌하게 쏘아보다 수화문을 나섰다. 성큼성큼 세자부의 대문으로 향하고 있노라니, 때마침 이쪽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는 헌왕이 보였다.

단룡 무늬가 번쩍이는 용포를 차려입은 헌왕의 뒤에는 붉은 비단으로 포장된 커다란 선물을 든 궁인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었다.

“형님께서도 세자부에 계셨군요.”

“그래.”

헌왕의 인사에 건성으로 대답한 정엽은 손마다 들린 선물 꾸러미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일일이 홍단으로 포장한 꼴이 꼭 선물이 아니라 혼인 예물 같았다.

“얼마 전에는 부황께 공작선(孔雀扇)을 선물로 바치더니, 이번엔 누구에게 무얼 바치려는 게냐?”

“형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본래 소중한 사람에겐 만금이 아깝지 않은 법입니다.”

헌왕은 마치 연주가 제 정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한 사람’이라는 대목을 힘주어 말했다. 정엽은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헌왕 소기를 적수로 여겨 본 적 없다 보니 화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담 이토록 모자란 아우와 염문에 휩싸인 채연주는 또 얼마나 모자란다는 뜻인지. 자연히 좀 전에 별당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기한 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낱 미물인 새조차 나뭇가지를 가려 앉는다고 하였다. 호의는 좋지만 상대는 봐 가며 행동해야지. 물건으로 얻은 마음이 얼마나 간다고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

“누가 물건으로만 마음을 산다고 하였습니까? 저는 마음으로 마음을 얻을 생각입니다.”

“조양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은 네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더냐? 욕심이 과하구나.”

정엽은 헌왕을 향해 차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럼에도 헌왕은 일찌감치 수도의 귀족을 홀린 언변의 소유자답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응수했다.

“형님께선 평생 전장에서 검만 휘두르셨으니 마음으로 마음을 얻는 일보다 강제로 굴복시키는 것에 더 익숙하시겠지요. 하지만 여인의 마음이 어디 굴복시킨다고 얻어지는 것이던가요?”

“…….”

“소제가 다른 건 몰라도 여인의 마음은 무척 잘 아옵니다. 하니 염려 마십시오.”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슬며시 고개를 숙여 보인 헌왕은 다시 별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정엽을 스쳐 지나간 헌왕은 채 다섯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연주의 지시를 받고 나온 표 집사가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은 탓이었다.

“헌왕 전하.”

“자네가 군주 대신 마중을 나온 모양이군. 앞장서게.”

표 집사의 행동을 환대의 의미로 받아들인 헌왕은 표 집사의 무례에도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하지만 표 집사는 길을 여는 대신 주인의 말을 전했다.

“오늘은 군주마마께서 몸이 좋지 않아 더는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군주마마께서 전하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니? 당황한 헌왕이 되물었으나, 표 씨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본 왕이 뜻하지 않은 염문으로 입장이 곤란해졌을 군주에게 사죄의 의미로 선물을 가지고 왔느니라. 군주에게 이 소식을 제대로 전한 게 맞느냐?”

“예. 하나 군주마마께선 전하를 만날 수도, 가져오신 선물을 받을 수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 달라고 하셨사옵니다.”

헌왕은 단호한 집사의 태도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멀리 보이는 별당을 주시하다가, 뒤따르던 궁인들을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이보게, 본 왕이 어렵게 세자부까지 직접 걸음을 했는데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네.”

“소인은 주인의 뜻을 다 전했사오니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표 집사는 헌왕의 사정에도 더 대응할 가치가 없다는 듯 매몰차게 돌아섰다. 표 씨가 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먼발치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엽이 비웃음을 깨물며 헌왕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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