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장명이 말을 이었다.
“예. 그래서 오석산을 복용한 후에는 반드시 온몸에 찬물을 뿌리고 차가운 음식을 먹으며 계속 밖을 걸어 다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오석산의 독성을 몸 밖으로 내보내고 약효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독성을 이기지 못해 즉사한다고 합니다.”
“그렇군.”
이로써 오석산이 군영 안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물질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 오석산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냐? 아니, 그보다는 조양에서 오석산을 가장 많이 다루는 곳이 어딘지를 물어야겠군.”
“오석산의 값이 천금과 같다 보니 귀족 중에서도 막대한 재력을 가진 소수만이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 내던 장명이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완연했다.
“질질 끌지 말고 말해라.”
“오석산은 조양에서 가장 유명한 청루인 패홍루에서 구할 수 있답니다.”
“패홍루?”
익숙한 이름에 정엽이 미간을 좁히자 장명이 냉큼 대답했다.
“예, 귀비 곽 씨가 입궁하기 전 몸담았던 곳입니다. 지금처럼 오석산이 유행하기 전에는 남녀의 교합을 돕는 특효약으로 쓰였다고 하더군요.”
또 헌왕인가.
정엽은 단박에 눈살을 찌푸렸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헌왕의 존재감이 꽤 거슬렸다. 물론 오석산을 소지하고 있던 문제의 5인방 뒤에 헌왕이 있으리란 것쯤은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군영 안에 오석산 같은 위험 물질을 유행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신의군에 몸담은 군사 중에 더러 됨됨이와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 있긴 해도 대다수는 이 대화국을 책임질 미래의 인재들이 아닌가?
게다가 헌왕은 황제의 뒤를 이어 옥새를 차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저를 찍어 내리기 위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일단 알았다. 앞으로 신의군 안에서 오석산이 발견되는 일이 없도록 방비해라.”
“예, 알겠습니다. 흠, 흠…….”
어름어름 대답한 장명이 관사를 나서지 않고 헛기침하며 몸을 배배 틀었다. 정엽은 이번엔 또 뭐냐는 듯 그를 재촉했다.
“할 말이 남았느냐?”
“저……. 헌왕이 오석산을 이용해 전하의 전정에 해를 끼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석산보다 군주마마 쪽을 신경 쓰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무슨 뜻이냐?”
“그게…….”
딱히 근심이라곤 없어 보이는 주군의 얼굴을 바라보던 장명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궁 안팎에 군주마마와 헌왕을 둘러싼 염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뭐?”
자고로 염문이라고 하면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남녀가 얽힌 일을 뜻했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정엽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바짝 긴장한 장명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보고드렸던 군주마마의 외출이 발단이 된 모양입니다. 그 일이 와전되어 실은 군주께서 헌왕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는 오해를 받고 계신 듯…….”
“하!”
장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헛웃음을 터뜨린 정엽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헌왕이 연주에게 관심을 보이며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채신과 장명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엽은 그 사실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아무리 헌왕이 연주의 환심을 사려 애쓴다 해도, 재혼을 거부하며 죽음까지 불사하던 연주가 별 볼 일 없는 그에게 매료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이 향산으로 떠났다가 다음 날 새벽에 돌아왔다는 소식만은 의외였지만, 그 일이 단시간에 사교계를 넘어 궁중 안팎을 시끄럽게 한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이는 연주의 결백과 상관없이, 이번에도 그녀가 누군가 쳐 놓은 덫에 빠졌다는 뜻. 그리고 정엽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덫을 놓은 건 헌왕일 터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연왕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다고 그리 신신당부했건만.’
대체 언제까지 내가 번거롭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거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정엽이 성큼성큼 관사 밖으로 향했다. 험악한 분위기를 감지한 장명이 헐레벌떡 정엽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는 연주 대신 해명 아닌 해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군주마마께서도 억울해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화만 내지 마시고…….”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우뚝 걸음을 멈춘 정엽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내가 왜 화를 내지?”
아니,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눈빛은 왜 그 모양이신데요?
“…….”
태연한 물음과 어울리지 않는 살기 어린 눈초리에 기가 죽은 장명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장명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정엽은 곧장 아끼는 흑마 위에 올라 벼락처럼 군영 문을 박차고 나갔다.
* * *
그날 오후, 평소보다 늦게 궁을 나선 연주는 세자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저를 헌왕과 사통하는 사이라고 모함했던 궁인이 황후궁에서 끌려 나가며 울부짖던 모습이 좀처럼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부 다 알고 있었는데.’
헌왕과의 나들이로 인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쯤은 얼마든지.
하지만 헌왕의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된 후, 연주는 잠시 헛된 기대를 품었다. 헌왕이 정말로 탐욕과는 거리가 멀고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향산에서의 일을 떠벌릴 리 없다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힐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자신을 모함한 궁인이 곽 귀비의 심복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연주는 완벽히 함정에 빠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곽 귀비가 눈독 들인 과부가 바로 나였다니.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황후마마께서 믿어 주셔서 다행이지만…….’
일을 겪을 당시엔 몰랐지만, 황후에게 헌왕과 얽히게 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니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헌왕은 해홍화가 필요하다며 자신을 향산으로 데려갔지만, 정작 그가 고른 해홍화 나무는 보기에만 좋을 뿐 해홍 향이라 부르기 무색할 만큼 향기가 미미했다.
‘그때라도 알아챘어야 했는데. 나는 또 바보같이…….’
자신을 노리는 헌왕 앞에서 정엽이 생각나 심란하다며 술까지 마셨다. 그 탓에 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이 지체되고,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마차 사고까지 겪었다.
“후우…….”
천천히 지난 일을 곱씹던 연주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안일함 때문에 여러 사람이 마음고생을 할 걸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웠다.
황후 앞에서도, 공주 앞에서도, 심지어는 함께 사는 형제들 앞에서도 민망한 일이라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속절없이 내달린 마차는 오늘따라 금세 세자부에 도착했다.
“군주마마, 내리시지요.”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연주는 맥 빠진 얼굴로 노을에 잠긴 별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검붉은 어둠에 휩싸인 내실 한가운데엔 정엽이 거만하고 삐딱한 자세로 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늦었군.”
연주는 새삼 무미건조한 정엽의 음성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뿐이면 좋으련만.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은 채찍처럼 매섭고 따가웠다.
‘올 게 왔구나.’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기던 연주가 말을 아꼈다. 하지만 정엽은 이미 연주의 속을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정엽의 태도는 모진 비난보다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각쯤 지났을까.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웅크리던 연주의 마음 한편에 의문이 생겨났다. 내가 왜 저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지?
‘내가 소문대로 헌왕과 정말 사통을 한 것도 아니고, 뭇 궁인들처럼 헌왕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 더더욱 아닌데.’
순진하게 헌왕의 나들이 제의에 응한 건 뼈아픈 실책이지만, 맹세코 남부끄러울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정성 들여 쓴 편지 한 장 제대로 읽지 않을 만큼 제게 지독하게 무관심했던 소정엽이 이제 와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낸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새삼 억울한 마음이 든 연주가 자세를 곧게 가다듬고 도도하게 말했다.
“주인도 없는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는 건 무슨 경우죠?”
“그러는 너는 왜 이제야 돌아오지? 또 어디 나들이라도 다녀온 건가?”
정엽은 연주에게 화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가 저지른 잘못에 관해 얘기할 생각으로 세자부를 찾은 참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는 연주를 마주하고 나니, 도저히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
반면, 당장 무슨 말이든 하려던 연주는 정엽의 비아냥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정엽이 추궁하듯 말을 이었다.
“헌왕과 향산에 다녀왔다면서. 무슨 생각으로 거길 따라갔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그게 뭔데.”
“당신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 소문대로 정을 통하기라도 했어?”
……뭐라고?
연주는 할 말을 잃고 석상처럼 굳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황망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걸까? 한때 아내였던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모욕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의문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정엽은 송곳 같은 비난으로 연주를 찌르기 시작했다.
“내가 경고했지. 미련하게 굴지 말라고. 곽 귀비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
“너 하나 때문에 황후께서 곽 귀비의 심복을 죽이는 무리수를 뒀어. 너뿐만 아니라 왕세자와 왕자 역시 비웃음을 살 거고. 이게 다 순진하게 헌왕에게 속아 넘어간 너 때문이야. 그런데도 뭐? 말하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