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잠자코 헌왕의 이야기를 듣던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헌왕은 정말로 곽 귀비와 달리 욕심이 없고 선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기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된 황제의 이기심으로 인해 인생이 진흙탕에 빠져 버린 불쌍한 사람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소정엽처럼.
“바다 건너에 하늘과 땅이 만나는 소금 사막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날 밤, 연주는 밤새 헌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헌왕은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중하게 분위기를 바꿔 가며 연주를 매료시켰다.
“세상에는 붉은 바다도 있고, 너무 짠 나머지 산호나 물고기가 전혀 살지 못하는 죽은 바다도 있답니다. 또 북쪽으로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곳도 있다더군요.”
“정말이십니까?”
“예. 심지어는 해가 염소의 뿔 모양으로 솟아나는 곳까지 있답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고 나자 새 말과 마차를 구한 마부가 돌아왔다. 하룻밤 사이에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를 챙기며 다정하게 마차에 올랐다.
다행히 지난밤과 달리 매끄럽게 산 아래로 내려온 마차는 빠르게 길을 달려 동이 트기 직전 세자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자, 이제 내리십시오.”
마차에서 먼저 내린 헌왕이 연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헌왕의 도움으로 무사히 땅을 딛고 선 연주가 경계심 없이 예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헌왕 전하 덕분에 오랜만에 즐거운 나들이를 했습니다.”
“본 왕도 군주 덕분에 무척 즐거웠습니다. 공주의 수업을 위해 입궁을 서둘러야 할 테니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예,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친 연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그녀는 대문을 닫기 직전에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헌왕을 발견하곤 묘한 기분으로 별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주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헌왕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주인을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온 시종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이렇게 되면 일이 모두 틀어진 것 아닙니까. 그냥 간단하게 사당에서 군주를 취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평생을 애지중지하게 될 보옥인데 그리 험하게 다뤄서야 쓰겠느냐?”
“예, 그야 그렇습니다만…….”
시종은 헌왕의 날카로운 반응에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늘따라 깊은 주인의 한숨 소리에 시종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사이 마차는 헌왕부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차디찬 새벽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깨운 헌왕이 산만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날이 밝거든 어제 일을 궁 안팎에 샅샅이 옮기도록 해라.”
“어제 일이라 하심은?”
“승설군주가 헌왕과 산중에서 밤을 보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어쨌든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지 않으냐.”
그럼 그렇지. 기민하게 주인의 속내를 헤아린 시종이 음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 * *
연주와 헌왕에 대한 이야기는 봄바람을 타고 궁 안팎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급격히 몸집을 불려 연주가 영항에 갇혀 가면서까지 황명에 저항한 이유가 헌왕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억측으로까지 번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동안, 정엽은 평소와 다름없이 신의군을 살폈다. 이날도 새벽부터 훈련을 참관하며 군사 개개인의 역량을 점검하던 정엽은 군영 내 관사로 돌아와 곧 있을 내부 경합의 대진표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전 훈련을 마쳤습니다.”
“…….”
“전하?”
일과 보고도 듣지 못한 채 상념에 빠져 있는 정엽을 바라보던 재하가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발견하고 빙그레 웃었다.
“벌써 대진표를 다 짜 두신 겁니까? 용무군에서는 시합마다 추첨으로 상대를 정한다고 하기에 이번에도 꼼짝없이 그렇게 진행하실 줄 알았습니다.”
“아, 자네로군.”
“한데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밤새 고민해 완성한 대진표를 눈으로 훑던 정엽이 말을 이었다.
“신의군으로 포용할 실력의 기준을 어디까지 낮춰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신의군의 역량은 황제의 친위 부대라는 명성에 한참 못 미치니까.”
“아, 그렇군요…….”
객관적으로 신의군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설적인 정엽의 평가에 머쓱해진 재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먼저 한번 보겠나?”
“아, 그래도 됩니까?”
“그래. 어차피 오늘 중으로 공개할 거니까.”
재하는 정엽이 건네준 대진표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곤 거기에 담긴 정엽의 의도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진표는 가문의 위세와 개인의 실력을 모두 고려하여 수준이 엇비슷한 자들끼리 경쟁하도록 묶여 있었다.
“전하의 고심이 느껴집니다. 이만하면 대진표는 더 손볼 데가 없겠군요.”
신의군은 귀족 자제로만 구성된 친위 부대였다. 그러다 보니 군영 내에서조차 군에서의 지위보다는 부친의 직분이나 가문의 위세가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강했다.
상대의 가문과 부친의 명망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단되면, 상급자라 하더라도 그의 명령을 무시하기 일쑤. 이처럼 하극상이 밥 먹듯이 벌어지니 실력은 있으나 배경이 좋지 못한 자들은 제대로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군을 떠나거나 몸을 사리기 바빴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제대로 된 경쟁이 이뤄질 수 있을 겁니다.”
정엽은 경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경합에서 패한 자들을 강등 또는 방출시키거나 녹봉을 삭감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황이었다.
명문가 자제들에게 녹봉 삭감 정도야 대수롭지 않지만, 강등이나 방출은 의미가 달랐다. 그런 조치는 집안의 배경과 황제의 친위 부대에 속해 있다는 명예 말고 자랑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침을 뱉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나태하기 그지없던 군사들에게 위기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경합이 거듭될수록 군사들은 군영에 남기 위해 실력을 갈고닦게 될 것이고, 군사 개개인의 실력 향상은 신의군의 전체 역량 향상으로 이어지게 되리라.
“경합이 끝나면 신의군 내부 분위기도 많이 달라질 겁니다. 그간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군사들도 전하께 감사해할 거고요.”
“이제 보니 아부에도 실력이 있었군?”
“아부라니요. 전하, 소신은 진심입니다.”
“알았다. 하지만 신의군은 어디까지나 황제 폐하를 위한 친위 부대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말을 가려 해라.”
“아, 예!”
정엽의 지적에 뒤늦게 실수를 인지한 재하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정엽을 향한 존경심과 충정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정엽이 통령으로 부임한 뒤 날로 분위기가 새로워지는 신의군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를 따르는 일이 보람차고 영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엽은 이런 재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복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 봐라.”
“예.”
공손히 예를 갖춘 재하가 관사의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재하가 용무를 마치고 나올 때만 기다리고 있던 장명이 서 있었다. 장명은 제게 묵례하는 재하에게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짓하고는 굳은 얼굴로 관사에 들어섰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인 게냐. 아직도 그 가루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느냐?”
“아닙니다. 가루의 정체는 알아냈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두루마리를 갈무리한 정엽의 시선이 온전히 장명에게 향했다. 장명은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보고를 시작했다.
“그 가루는 다섯 가지 광물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오석산(五石散)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 광물?”
“예. 보통 웅황, 적석지, 자수정, 백수정, 종유석으로 만든다는데, 더러는 이 다섯 가지에 다른 광물을 추가하기도 한다더군요. 요즘은 적석지 대신 주사(朱砂)를 넣은 오석산이 귀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합니다.”
귀족들의 유행이라니.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정엽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한데 웅황과 주사에는 독성이 있지 않으냐? 그런 걸 대체 왜 가루로 만들어 먹는 거지?”
“독성을 제거하고 소량만 사용하면 약이 되기도 한답니다. 한데 알아보니 이 오석산에는 독성을 제거하지 않고 사용하기도 한다더군요.”
“마시고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믿기 어렵지만, 오석산을 뜨거운 술에 타 마시면 정신이 또렷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피로가 싹 가신다고 합니다. 또 피부는 소녀처럼 변하고 병이 씻은 듯 낫는다고 하니, 뭇 사람들은 오석산을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떠받들기까지 한답니다.”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대화에 집중하던 정엽이 허황된 이야기에 코웃음 쳤다. 오석산이 아니라도 지금껏 불로장생을 꿈꾸다 명을 재촉한 제왕의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정말로 그런 영약이 존재한다면 지금껏 불로장생의 비법을 찾다 떠난 제왕들은 다 무엇이란 말이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오석산이 만드는 과정도 까다롭고, 재료도 하나같이 귀한 것이다 보니 귀족들이 재력을 과시하고자 즐기는 경향도 있는 듯합니다.”
“그럼 오석산으로 인한 해악은 없는 것이냐?”
이런 이야기가 우스우면서도 조금은 호기심이 동한 정엽이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석산을 잘못 복용하면 피부가 짓무르고 지독한 가려움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또 몸에 항상 열이 나서 한겨울에도 눈밭에 드러누워야 겨우 잠을 잘 수 있다고 하더군요.”
“눈밭이라…….”
“그래도 그만하면 다행이지요. 오석산에 중독된 자들은 극심한 오한과 열병에 시달리다 눈이 멀고 미치광이가 되어 절명한다고 합니다.”
“절명?”
천하에 둘도 없는 영약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간다니. 어떤 약이건 과하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라지만 이 대목은 조금 오싹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