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연주는 헌왕의 뒤를 따라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듯 위패조차 없는 제단과, 뽀얗게 먼지가 앉은 두꺼운 방석이 놓여 있었다.
“어디에 촛대가 있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던 헌왕은 급한 대로 등롱 속 촛불을 제단 위 촛대로 옮겼다. 그러고는 방석 위 먼지를 털고 연주를 그 위에 앉혔다.
“밤이 깊어지면 더 추워질 테니 일단 불부터 피워야겠습니다. 마부를 산 위로든 아래로든 보내 상황도 수습해야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친 헌왕은 제 어깨에 두르고 있던 외투를 끌러 연주에게 둘러 주었다.
“아닙니다. 외투는 전하께서 두르고 계셔야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본 왕과 함께 외유를 나왔다가 군주가 풍한이라도 들면 왕세자와 해우왕자가 나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연주가 극구 사양하는데도 외투의 매듭을 더 단단히 조인 헌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헌왕은 괜찮다지만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연주가 말끝을 흐리자 헌왕이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본 왕은 형님과 달라서 왕자의 검술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좀 봐주십시오.”
설마 그럴 리가.
연주는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헌왕의 재치에 피식 웃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헌왕은 연주를 낡은 건물 안에 남겨 둔 채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일각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땔감을 주워 돌아온 헌왕의 시종이 방 한쪽에 놓여 있던 화로를 끌고 와 솔방울과 마른 가지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타닥타닥, 고즈넉한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헌왕이 연주의 곁에 방석을 가져와 바짝 붙어 앉았다.
“어찌 되었사옵니까?”
“일단 마부에게 말을 내주고 산 아래로 내려가 가 새 마차와 말을 가지고 오라 했습니다.”
연주는 세심한 헌왕의 결정에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늘 두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다준 말은 온종일 산을 오르내리느라 지쳐서 다시 산길을 오르기는 힘들 터였다.
‘그런데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보다는 향산 남쪽 봉우리 중턱에 있는 향산 별궁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문득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고개를 저었다. 향산에 황실 별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으로 자주 사냥을 나오는 듯해 보이는 헌왕에 비해 자신은 향산의 지리를 잘 알지 못했다. 여기서 별궁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는 전혀 모른다는 뜻이었다.
“여명이 밝기 전에 돌아오라 당부하였으니 묘정이면 세자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묘정에 세자부에 닿을 수만 있다면 공주의 수업에 늦지 않게 입궁할 수 있으리라.
헌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연주가 밝게 타오르는 화롯불을 바라보았다.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니 뒤늦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예기치 못한 일이긴 하지만 이만하면 크게 나쁘지도 않네.’
먼지가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걸린 사당 안을 가만히 둘러보던 연주는 헌왕이 둘러 준 외투를 여미며 몸을 웅크렸다. 평소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긴 하지만, 화롯불이 주는 따뜻한 온기와 푹신한 방석 덕분인지 크게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항에서처럼 무방비 상태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언제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크게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리 합리화해도 결국 비단신 안에 굴러들어 온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하게 마음에 부대끼는 점은 있었다.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이 하필 헌왕뿐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
연주는 생각 많은 표정으로 물끄러미 헌왕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멋지다는 표현보다 예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였다.
‘참 곱기도 하지.’
과연 자미성의 궁녀들이 넋을 잃고 훔쳐볼 만큼 미남이기는 했다. 하지만 헌왕에 대한 감상은 그뿐, 연주의 사고는 본능처럼 다시 정엽에게로 흘렀다.
‘궁녀들이 숨어서 헌왕을 훔쳐보던 것처럼 정엽도 훔쳐보았을까? 그렇담 그 궁녀들을 보고 정엽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실없이 소성궁 앞에서 궁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정엽의 모습을 상상한 연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 냉혈한이 생각이란 걸 하기는 할까? 어쩌면 궁녀들이 저를 훔쳐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갈지도.’
정엽은 그게 누구든 자신에게 유의미한 사람이 아니면 극도로 무신경했다. 어쩌면 매일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수줍게 애정을 고백하는 아내조차, 그의 눈에는 정원석이나 나무 뒤에 숨어 저를 훔쳐보는 궁녀와 다를 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항에 갇힌 자신을 구해 주었던 이유조차, 실은 그의 명성에 불이익이 미칠까 하는 염려에서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찮고도 하찮았구나.’
나는 소정엽에 대한 내 사랑이 바다처럼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는 고작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티끌에 불과했다니.
“…….”
그러고 보면 정엽은 첫 만남부터 무신경했다. 연왕비 물망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홀로 수도에 올라와 오라비의 여종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만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연주는 정엽을 본 순간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만, 정엽은 우리가 혼인 전에 잠시 마주친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뿐인가. 혼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곁에 있는 자신이 아내라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처럼 한 번도 정다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연주가 정엽을 찾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먼저 그녀를 찾을 때는 오직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쌓인 욕구를 해소하고 싶은 순간뿐.
그런데도 연주는 정엽이 저를 갈망하는 그 순간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지독히 이기적이고 거친 행위가 버거워도 그의 뜨거운 품에 안길 때만큼은 온전히 사랑받는 아내가 된 듯한 희열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바보 같았네.’
연주는 아무리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는 허탈감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만의 세계로 도망쳐 버리는 연주를 날카롭게 주시하던 헌왕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앞날은 한 치도 알 수가 없군요.”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하지만 이처럼 어두운 날이 있으니 어쩌다 찾아오는 밝은 날이 더 반갑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헌왕은 강물에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처럼 초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뒤늦게 상념에서 빠져나온 연주는 그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설핏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다 밝은 날이라…….’
헌왕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곽 귀비의 첫아들로 태어나, 지금까지 명실상부한 황제의 총아로 살아왔다. 모친인 곽 귀비의 출신이 한미한 게 흠이라고는 하나, 중앙의 귀족들이 적장자인 정엽을 제치고 헌왕을 지지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천감이 예언을 올린 그 순간부터 철저하게 황제로부터 배척당한 정엽에 비하면 헌왕의 삶은 매일 화창했을 텐데.’
마치 인생의 명과 암을 모두 아는 사람처럼 구는 헌왕을 보고 있자니, 연주는 궁금함보다 의아한 마음이 앞섰다.
“헌왕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의외로군요.”
“왜요. 본 왕이 폐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라서요?”
“…….”
직설적인 질문에 연주가 침묵으로 답하자, 그녀를 바라보던 헌왕이 피식 웃었다.
“세상은 본 왕을 황제의 총아, 동궁의 주인, 나아가 장차 부황의 자리를 이어 옥좌를 차지할 승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군주는 본 왕의 이름이 무엇인지 압니까?”
“예, 그릇 기 자를 쓰시지요.”
“하면 본 왕의 이름이 다른 형제들이 가진 이름과 무엇이 다른지도 알겠군요.”
“그건…….”
이 모두가 황실의 일이라. 황실과 인연이 끊어진 지 오래인 연주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헌왕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본 왕의 이름에는 황실의 돌림자인 밝을 정(晶) 자가 없습니다. 태양이 없지요. 어전의 이름조차 상양궁(上陽宮)인 것을 생각하면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연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헌왕이 말하는 황제의 의도는 그간 연주가 한 번도 깊게 파고들어 본 적 없는 지점이었다. 사실 호사가 사이에서는 헌왕의 외자 이름을 두고 황제가 셋째 아들을 특별히 아껴 그에게 친히 이름을 지어 내린 거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굳어져 있었다.
한데 이를 구오지존(九五之尊, 황제)의 거처인 상양궁과 연관 지으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도 있다니…….
‘그렇다면 황제의 뜻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황제는 지금까지 지독하게 정엽을 미워했고, 동시에 그만큼 헌왕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헌왕의 말대로 아들들의 이름에 황제의 본심이 숨어 있었다면, 황제는 왜 그토록 정엽을 잔인하게 몰아세웠단 말인가?
예고 없이 찾아온 혼란에 연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찰나의 순간, 너무나도 쉽게 연주의 감정을 읽어 낸 헌왕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흔들기 위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황께서 본 왕에게 주신 외자 이름은 무희에게서 얻은 아들이라는 낙인입니다. 그러니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지요. 본 왕도 이를 잘 알아 철이 들 무렵부터는 황위를 꿈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황제 자리는 형님 전하 같은 분이 어울리시지요.”
“하지만 곽 귀비마마께서는…….”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꿈을 이루고자 애쓰실 뿐입니다. 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염원이지, 본 왕의 염원이 아닙니다. 본 왕은 그 자리를 감당할 만한 그릇도 아니고요.”
“…….”
“다만,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때로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본 왕은 그저 어머니의 꿈을 허망하게 깨뜨리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것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