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헌왕은 모래바람에 휩쓸린 꽃가지처럼 흐느적거리는 연주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폈다. 이미 술에 취해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연주가 괜찮다며 헌왕의 호의를 거절했지만, 그의 고집 역시 연주 못지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취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쉬었다가 정자를 내려가는 게 좋겠어요.”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술이 약하다고, 정자에서 내려가는 길이 걱정된다고 했던 건 본 왕이 아니라 군주입니다.”
어느새 맞은편으로 건너와 연주와 나란히 앉은 헌왕이 연주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놀리듯 웃었다. 할 말이 없어진 연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헌왕은 그 모습이 꼭 신나게 집 안을 어지르고 뒤늦게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군주도 참…….”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꾹꾹 눌러 삼킨 헌왕이 연주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잠시만 눈을 붙이세요. 그럼 훨씬 나아질 겁니다.”
헌왕은 갓난쟁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연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헌왕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하고 끈적해서, 몽롱한 정신을 아주 깊은 심연으로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을 다잡기 위해 고개까지 흔들어 가며 버티던 연주가 어느 순간 저항 없이 헌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단잠에 빠졌다.
*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없이 단잠에 빠졌던 연주가 뺨을 긋는 찬바람에 놀라 화들짝 눈을 떴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당황한 연주는 고개를 들고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연주가 깨어난 것을 눈치챈 헌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눈을 떴습니까?”
“예,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너무 깊이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어찌 깨우지 않으셨습니까?”
“군주가 너무 곤히 잠들어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이렇게 오래 자 버리다니.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 연주가 한숨지었다.
‘이제 와 헌왕 전하를 탓하는 것도 우습지.’
하지만 민망함과는 별개로,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연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면 해가 더 지기 전에 어서 일어나시지요. 오늘 안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오늘…… 안에 말입니까?”
“예. 왜 그러십니까?”
연주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헌왕을 곧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알쏭달쏭한 얼굴의 헌왕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군주의 당혹스러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지금 산을 내려가 농장을 떠날 즈음이면 완전히 어둠이 내린 뒤일 겁니다. 산중이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빨리 어두워진다는 사실 정도는 군주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게다가 이곳은 산꼭대기라 내려가는 길 자체가 무척 험해요. 밤중에 걸음을 지체하다간 무슨 사고가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여 본 왕의 생각에, 차라리 오늘 밤은 농장에서 묵고 날이 밝은 뒤 산길을 내려가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결국 일정을 미뤄야 한다는 뜻이라. 연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이 어그러지고 나니 이게 다 소정엽 때문이라고. 그 사람 때문에 술을 마시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뒤늦게 말도 안 되는 원망마저 샘솟았다.
하지만 정엽이 제게 술을 마시라 강요한 것도 아니고, 복잡한 심사를 술로 다스려 보겠다고 나선 건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갈 곳을 잃은 원망은 모두 연주의 몫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헌왕과 하룻밤을 농장에서 묵는 순간, 앞으로 어떤 소문에 휘말리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연주는 당장 내일 아침 입궁해 시양의 서화 수업을 해야 할 처지였다.
‘공주와 손가락까지 걸고 약조한 이상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해.’
헤어지는 순간, 연주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보고 싶을 거라고 속삭이던 시양의 목소리가 머리에 맴돌았다.
세자부에서 농장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총 두 시진. 동이 튼 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하면 절대로 시양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뜻을 굳힌 연주가 결연한 표정으로 헌왕을 향해 돌아섰다. 헌왕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군주의 뜻이 정 그렇다면 이제라도 서두르지요.”
“감사하옵니다, 전하.”
연주는 이 모든 상황이 전부 자신의 불찰로 인해 벌어진 일인데도 순순히 제 뜻을 따라 주는 헌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 정도로 감사라니. 별말을 다 하는군요.”
하지만 연주의 본심과 별개로 도리어 깍듯이 예를 갖추는 연주의 태도가 서운했는지, 받아치는 헌왕의 목소리엔 기운이 없었다.
“본 왕의 손을 잡으세요.”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혼자 산길을 걷기에는 부담스러운 시간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주는 헌왕이 내민 손을 잡고 가파른 오솔길을 거슬러 내려갔다.
그렇게 처음 농장 주인을 만났던 산채 앞에 다다르자, 헌왕은 함께 온 시종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지금 당장 떠날 준비를 해라.”
“예? ……예, 전하. 알겠사옵니다.”
시종은 때아닌 명령에 난색을 표할 겨를도 없이 마부와 함께 서둘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소란을 발견한 농장 주인이 산채 밖으로 나와 헌왕과 연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룻밤 묵고 가신다더니 밤길을 내려가시렵니까.”
“그렇게 됐네.”
“하면 모쪼록 살펴 가시옵소서. 고르신 나무는 며칠 안으로 정리해 보내 드리겠사옵니다.”
“부탁하네.”
이내 마차에 오른 두 사람은 위험천만하게 산길을 내려갔다. 마차는 이곳으로 올라올 때에 비해 더 심하게 덜컹거렸다. 연주는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시종일관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원래부터 산길이 이렇게 험했나?’
물론 평지보다 산길이 험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었다. 어느덧 연주의 머릿속에는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떠다녔다.
갑자기 산짐승이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어둠 속에 마편을 잡은 마부가 길을 잘못 들어 마차가 벼랑 끝에 매달리게 되진 않을까…….
자연히 바짝 긴장한 연주가 평소 마음을 가다듬을 때처럼 얌전히 포갠 두 손을 꼭 맞잡았다. 헌왕은 한껏 힘이 들어간 연주의 작은 손등을 도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본 왕의 시종은 길눈이 아주 밝습니다. 마부석에 등롱을 훤히 밝혀 놓았으니 최소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겁니다.”
연주는 자신을 안심시키는 헌왕의 배려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왕의 이야기가 요술 주문이라도 되는 것인지, 마차는 걱정과 달리 잠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산길을 내려갔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팽팽한 긴장에 지쳐 피로가 몰려올 무렵, 헌왕이 연주를 향해 말했다.
“마차가 심히 흔들리긴 하지만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으면 붙이십시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미 산꼭대기 정자에서 한 차례 잘못 눈을 붙였다가 이런 위험한 상황을 직면하게 된 연주였다. 그러니 집 앞 대문에 내리는 그 순간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전하야말로 소녀 때문에 일정이 길어져 피곤하실 텐데 잠시 눈을 붙이시지요.”
연주는 작게 웃어 보이며 도리어 헌왕에게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그 순간.
콰광! 쾅-!
굉음과 함께 마차가 한쪽으로 주저앉았다.
“어맛!”
하필 자기 쪽으로 주저앉은 마차 때문에 연주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헌왕은 순식간에 연주를 품 안 깊숙이 끌어안으며 보호했다.
“괜찮습니까?”
헌왕이 연주를 꼭 감싸 안은 채 자상하게 물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연주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헌왕은 그제야 안심한 듯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고, 마부와 시종이 당황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아무래도 마차 바퀴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진 듯하옵니다.”
“뭐라?”
놀란 헌왕이 훌쩍 마차 밖으로 뛰어내려 등롱을 들고 마차를 살폈다. 마차는 정말로 왼쪽 바퀴가 부서져 주저앉은 상태였다.
왼쪽 차창으로 자리를 옮긴 연주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망가진 바퀴를 확인하고 탄식했다.
“이를 어쩌지요, 전하?”
예기치 못한 사고에 연주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이겼다.
“마차의 바퀴가 고장 난 이상 이대로 산에서 내려가는 건 무리입니다. 일단 밤이슬을 피할 곳을 찾아야겠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연주를 안심시키듯 침착하게 대답한 헌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시종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사이 남은 등롱을 가지고 다가온 마부가 낭패한 얼굴로 부서진 바퀴를 요리조리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산 어디쯤 있는가?”
“이제 딱 산 중턱까지 내려온 참입니다.”
“산 중턱이라…….”
위로 올라가 도움을 청하기에도, 아래로 내려가 도움을 청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였다. 연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좁은 산길을 고려해 일부러 쌍두마차가 아닌 말 한 마리가 끄는 단두마차를 타고 나선 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차를 끌던 말이라도 잡아타고 산에서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마부와 시종 두 사람이 걸어서 산을 내려와야 했다.
뿐인가. 헌왕과 함께 말을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왔다가는 그와 외유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 될 것이다.
‘뭐, 애초부터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했지만.’
부부도, 연인도 아닌 남녀가 사이좋게 말 한 마리를 나눠 타고 돌아다니는 것은 쓸데없는 풍문을 부풀리기 딱 좋았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절대로.’
생각을 굳힌 연주는 일단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얼마 후, 밤이슬을 피할 장소를 물색한 헌왕이 돌아왔다.
“근처에 그럴싸한 건물이 한 채 있습니다. 아마도 버려진 사당 같습니다만, 일단은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지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