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헌왕이 저를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연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어쨌든 해홍화를 좋아하는 저를 생각해 여기까지 데려와 주었는데 실망을 안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다만 여기 와 생각해 보니 이미 안뜰에 해홍화가 무성하여 새 해홍화를 옮겨 심을 자리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요.”
“아……. 그렇다면 별수 없군요.”
가볍게 나온 말 같지만 어쩐지 남다른 의미가 느껴지는 대답이라. 눈매가 가늘어졌던 헌왕은 이내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정신없이 꽃구경을 하다 보니 해가 벌써 중천이로군요. 아침 일찍 길을 나선 터라 군주도 시장할 테니 이만 점심 식사를 하러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점심…… 식사라고 하셨습니까?”
곧장 산을 내려가는 게 아니라?
지금껏 농장에서 묘목을 고르고 나면 산을 내려가 식사할 거라 생각했던 연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헌왕은 무척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농장을 둘러보기 전에 시종에게 산꼭대기 정자에 식사를 준비하라고 명해 두었습니다. 모두 헌왕부에서 준비해 온 요리들이니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아…….”
연주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종에게 귓속말하던 헌왕의 모습을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헌왕이 연주를 향해 재촉하듯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말없이 바라보던 연주는 헌왕을 향해 마지못해 웃어 보이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소녀는 천천히 따라갈 테니 전하께서 앞서서 가시지요.”
“아, 그렇게 하겠습니까?”
좀 전과 달리 선뜻 손을 내어 주지 않는 연주의 반응에 겸연쩍어하던 헌왕이 손을 거두고 느릿느릿 농장 꼭대기로 향했다. 이윽고 산 정상에 올라앉은 정자에 도착한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 앉아 사방이 탁 트인 절경을 감상했다.
주변을 빙 둘러보니, 저 멀리 가장 높은 남쪽 봉우리 중턱에 지어진 향산 별궁이 보였다. 연주는 문득 술에 취해 홀로 출타한 정엽을 찾아 거센 빗줄기를 뚫고 향산을 이 잡듯 뒤지던 작년 가을날이 떠올랐다.
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의미 없는 순간에도 그 사람을 떠올리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네.’
정작 정엽은 단 한 순간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 무슨 거창한 미련이 남았다고.
‘이제 그만 잊어야지.’
잊어야지. 몇 번이고 읊조리며 스스로를 설득하던 연주는 헌왕의 시종과 농장 주인이 하나둘씩 요리를 내오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주의를 돌렸다. 그런데 탁자 위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요리가 즐비했다.
“이게 웬 해산물 요리이옵니까?”
산중에서 해산물 요리라니. 연주의 얼굴에 놀라움보다 당혹스러움이 먼저 스쳤다. 하지만 헌왕은 외려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혹시 해산물 요리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본 왕이 평소 해산물 요리를 즐겨 먹기도 하고 군주도 남해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 특별히 준비한 것인데…….”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대로 감사 표시를 해야 하는데. 멀거니 상차림을 바라보던 연주는 과분한 헌왕의 호의에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헌왕의 성품이 세심하다지만 어떻게 하면 산꼭대기까지 해산물 요리를 가져올 생각을 할 수 있는지. 한편으로는 겨울을 봄으로 바꾸고 산을 바다로 바꾸며 자연의 섭리를 희롱하는 오만한 태도가 과연 황족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헌왕이 상념의 고리를 끊듯 입을 열었다.
“으음, 해산물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본 왕이 당장 근처에 사냥을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예?”
“향산은 평소 황족들이 자주 사냥을 나오는 곳 아닙니까. 반 시진 정도면 한 끼를 해결할 사냥감도 잡고 요리도 마칠 수 있을 겁니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웃어 보인 헌왕이 금방이라도 산짐승을 잡아 올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연주는 서둘러 헌왕의 팔을 붙들고 만류했다.
“아닙니다. 저 하나 때문에 그러실 필요야 있겠습니까. 해산물 요리는 소녀 역시 무척 좋아하옵니다.”
“진심입니까? 혹시 본 왕을 위해 일부러 그런 얘길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산중에서 해산물 요리를 맛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라서 조금 놀랐던 것뿐이옵니다. 그러니 앉으세요. 음식이 다 식겠습니다.”
연주가 재차 설득하자 헌왕이 안도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준비한 음식을 모두 내놓은 시종은 마지막으로 알록달록한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술병을 집어 든 헌왕이 유쾌한 얼굴로 자기 술잔을 채우고는 연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소녀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합니다. 이따가 정자를 내려갈 길도 걱정이 되고요.”
연주는 손사래까지 치며 술 받기를 거절했다. 자칫 이 상황이 기분 나쁠 법한데도 헌왕은 연주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별수 없지요.”
이윽고 자기 몫의 술잔을 단숨에 비운 헌왕이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헌왕은 뜻밖에도 자신의 앞접시를 채우기도 전에 연주의 앞접시를 먼저 채웠다.
새우, 전복, 해삼은 물론, 통통한 생선 살을 발라 주기까지. 어느새 앞접시가 가득 찬 것을 확인한 연주가 민망함에 헌왕에게 음식을 권했다.
“저는 괜찮으니 음식은 전하부터 드시지요.”
“본래 맛있는 요리는 나눠 먹어야 더 맛있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헌왕은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가만히 있기 민망해진 연주는 젓가락을 들어 헌왕의 접시에 조심스럽게 요리를 덜기 시작했다. 연주가 저를 챙겨 주는 모습을 싱글벙글한 얼굴로 지켜보던 헌왕은 연주가 젓가락질을 멈추자마자 냉큼 접시를 비우고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해홍화에 관심을 갖게 된 덕분에 산중에서 바다 향을 느껴 보기까지 하는군요. 해홍화에 둘러싸여 있으니 앉은 자리가 산중인지 바닷가인지 헷갈리기도 하고요. 이런 색다른 풍류를 즐겨 보기는 처음입니다.”
“다 전하께서 세심하게 준비하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군주가 본 왕에게 진짜 해홍화의 매력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같은 날은 오지 않았겠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소녀야말로 이런 곳에 데려와 주신 전하께 감사드리옵니다.”
예의 바르게 화답한 연주가 천천히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헌왕이 준비한 음식은 하나같이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둔 남해식 요리들이었다.
‘이런 좋은 요리를 먹고 있으니 고향 생각이 나는구나.’
연주는 신선하고 담백한 요리를 음미하며 남해의 깊고 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강렬한 햇살 아래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어부들,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새하얀 이를 가지런히 드러낸 채 웃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하지만 싱싱한 해산물을 내륙까지 운반하고, 요리하고, 산중까지 가져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갔을지. 연주는 특별하고 근사한 오찬을 즐기면서도 어쩐지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반면 헌왕은 여전히 흥취에 젖은 듯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롭게 나들이를 나와 봅니다. 게다가 이렇게 향산의 절경을 벗 삼아 맛있는 음식까지 즐기니 더는 바랄 게 없군요.”
“나들이가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매일 이렇게 한가로이 노닐며 천수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아주 가끔은 황실에서 태어난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밝게 웃어 보일 때는 언제고 어느새 생각 많은 얼굴이 된 헌왕이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재차 술잔을 비웠다.
황실에서 태어난 덕분에 호사를 누린다. 연주는 헌왕의 이야기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도 한수성은 이제 폐하께서 파견하신 장수가 관리하고 있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 않나요?’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고 다시 달려가야 할 곳이야. 수도에서 몸 편히 지낸다고 하루아침에 관심을 끊어서야 되겠어? 대화국 강산을 지키는 것이 황가에서 태어난 내 소명인데.’
황실에서 태어났으니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던 그 사람.
슬픈 기억이 가득한 곳임에도 언젠가 또다시 그 얼어붙은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 사람.
연주는 불쑥불쑥 떠오르는 정엽에 대한 기억에 절로 숨이 막혔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유유자적한 헌왕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할수록 풍류라고는 전혀 모르는 뻣뻣하고 미련한 정엽의 모습이 대비되며 연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처자식을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제 목숨마저 귀한 줄 모르는 냉혈한이 뭐가 그리 좋다고.’
정엽을 생각하다 보면 어김없이 경수당 서재에서 발견한 뜯어보지 않은 수십 통의 서찰들이 뇌리를 스쳤다. 아무런 보람 없이 상처만 가득 남겼던 사랑의 잔상은 꼭 흙바닥에 산만하게 흩어지던 겹해홍화의 종말을 닮아 있었다.
향기롭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사랑의 종말.
마음이 일렁여 걷잡을 수 없이 심란해진 연주가 붉은 입술을 짓이기다 스스로 술병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헌왕은 연주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술병을 끌어당기려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본 왕이 따라 드리지요.”
이내 연주에게서 술병을 뺏어 든 헌왕이 손수 연주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쪼르륵-. 맑은 소리와 함께 눈물처럼 일렁이는 투명한 액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연주가 눈을 꼭 감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콜록콜록.”
하지만 연주는 술잔을 비우자마자 잔기침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헌왕은 연주의 잔을 채우길 멈추지 않았다.
‘다들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목이 따갑고 배 속이 후끈거리는 느낌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지만, 얼마 안 가 잡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걸 보니 효과는 분명한 듯했다.
지금껏 술로 괴로움을 잊어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잡념을 짓밟아 놓지 않으면 언젠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주향이 진한 것이 명주인가 보군요.”
실은 알싸한 주향이 외려 역겹게 느껴지면서도. 연주는 애써 웃으며 갑갑한 속을 누르듯 연거푸 잔을 비웠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세 잔. 속이 홧홧해질 때까지 술잔을 비우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아…….”
연주가 무거운 이마를 짚으며 작게 신음했다.
“군주, 괜찮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