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
연주는 헌왕의 말에 뒤늦게 제 오라비와 아우가 8황자의 탄일을 맞아 외유를 떠나기로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저가 뭐라고 헌왕이 음흉한 계책까지 써 가며 향산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겠는가?
연주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무안해하는 연주를 주의 깊게 지켜보던 헌왕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군주께서 정 어렵다면 본 왕이 군주의 일정에 맞추겠습니다. 언제가 좋겠습니까?”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마침 내일은 공주마마의 수업도 없는 날인 것을요.”
“잘되었군요.”
연주의 대답에 헌왕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내일 묘정에 본 왕이 세자부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꾸미지 않아도 늘 고우시니 나들이 간다 생각하고 편히 나오세요.”
“음, 나들이라면 더 곱게 차려입어야 하는 게 아닐지요?”
헌왕의 칭찬에 다시 한번 민망해진 연주가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정작 연주의 대답을 들은 헌왕은 시골에서 갓 수도로 올라온 풋내기처럼 순박하게 반응했다.
“아, 여인에게 나들이는 그런 것이로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전하 덕분에 내일 해홍화 구경을 실컷 하겠군요. 그럼 내일 세자부 앞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지요. 제가 궁문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앞길을 터 준 헌왕이 연주의 곁에 붙어 섰다. 덕분에 사방에서 궁녀들의 시선이 날아들어 연주의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하필 소성궁 근처에서 헌왕과 마주칠 게 뭐람.’
정신없이 헌왕의 말솜씨에 휘말리다 보니, 뒤늦게 소성궁 근처에서 헌왕과 만나 궁문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적 드문 곳에서 헌왕과 마주치는 경우도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보는 눈과 귀가 많은 게 나은지도 모르지.’
헌왕과의 만남을 지켜본 눈이 한둘이 아니니 적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애써 걱정을 한 편으로 밀어 둔 연주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다음 날,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작은 마차 한 대가 세자부 앞에 멈춰 섰다.
“본 왕의 손을 잡으십시오.”
세자부의 붉은 대문 앞에서 헌왕의 방문을 기다리던 연주는 밖으로 내려선 헌왕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이내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향산을 향해 날 듯이 내달렸다.
마차는 험한 산길을 한참 달려 향산의 네 봉우리 중 서쪽 봉우리 꼭대기에 다다랐다. 농장 초입에서 올려다본 산비탈에는 해가 잘 드는 곳마다 울긋불긋한 꽃송이를 단 나무가 계단처럼 층층이 자라고 있었다.
“세상에…….”
가지마다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워 낸 나무들이 모두 해홍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산꼭대기가 온통 꽃으로 뒤덮인 광경은 더할 나위 없는 장관이었다. 이렇게 연주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함께 온 시종에게 귓속말까지 하며 무언가를 은밀하게 지시한 헌왕이 웃으며 연주에게 다가왔다.
“그럼 가 보실까요? 산길이 험하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헌왕의 주의에 제 옷차림을 다시금 살핀 연주가 멋쩍게 웃었다. 산행임을 고려해 단출한 차림으로 나오긴 했지만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이 방해되는 건 사실이었다.
“예, 전하. 심려 마십시오.”
그렇게 대답한 연주가 왼손으로 비단 치마를 말아 쥐고 살짝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상태로 산을 둘러보는 건 역시 무리. 연주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헌왕은 자연스럽게 연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주는 별수 없이 한 손을 헌왕에게 의지하고 농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맞이하는 건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앉은 초로의 노인이었다.
“자네가 전하께서 말씀하신 해홍화 장인인가?”
“장인이라는 수식어는 과분하지만 여기 이 해홍화 농장의 주인을 찾으시는 거라면 소인이 맞습니다.”
정말 이 산 전체를 물들인 것이 해홍화로구나! 연주는 봉우리 전체를 덮을 기세로 산비탈을 가득 메운 꽃나무들을 떠올리고는 반색했다.
“나는 남해 땅에서 피고 지는 해홍화만 보고 자라 이런 산중에서도 해홍화가 자라는지 몰랐네.”
“해홍화 하면 남해에서 피는 것을 최상으로 치긴 하지요. 꽃잎 색이 가장 붉고 선명해 보기에도 아름답고, 향기도 만 리 밖까지 퍼지니까요.”
“그래, 남해의 해홍화는 참으로 아름답지.”
“하지만 세상은 넓고, 여전히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꽃들이 많습니다. 생물 역시 사람처럼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니까요.”
짧은 대화만으로도 노인의 해홍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물씬 느껴졌다. 가만히 노인의 말을 곱씹던 연주가 웃으며 말했다.
“하면 여기 농장의 나무들을 모두 자네가 개량한 것인가?”
“이 농장에 있는 나무들은 소인이 평생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모은 해홍화 묘목들을 손수 가꾼 것입니다. 더러는 제가 직접 개량해 낸 것도 있지요.”
“그렇군.”
“여기 있는 해홍화는 추운 땅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이니 산 아래에 심으시면 더욱 무성하게 잘 자랄 겁니다. 나무가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자네 말을 들으니 더욱 기대되네.”
농장 주인이 머무는 산채 너머 끝없이 펼쳐진 해홍화 바다를 눈으로 훑은 연주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해홍화에 대한 애정을 읽어 낸 노인의 태도 역시 한층 부드럽게 변했다.
“하면 찬찬히 농장을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는 나무에 이 노란색 끈을 매 두십시오. 소인이 고르신 나무를 추려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았네.”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며 자신이 나설 틈을 노리던 헌왕이 잽싸게 노인이 내미는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바구니 안에는 노란 끈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군주, 가시죠.”
헌왕은 연주와 나란히 농장 탐방에 나섰다. 꽃나무가 온통 위험한 산비탈에 늘어서 있어 이동이 어려울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농장 곳곳에 사람이 다니기 편하도록 오솔길이 나 있었다.
게다가 길 위에는 짚단을 꼬아 만든 거적까지 깔려 있어 흙을 밟아 신이 더러워지거나, 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염려도 없었다. 아마 농장 주인이 매일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해홍화를 가꾸다 보니 생긴 것들인 듯했다.
‘주인이 이토록 정성을 쏟아 키웠다면 꽃은 더욱 아름답겠지.’
연주는 부푼 마음을 안고 주변을 둘러보며 야트막한 오솔길을 올랐다. 가장 먼저 연주를 반기는 꽃은 겹겹의 붉은 꽃잎을 가진 겹해홍화였다.
“이건 해홍화가 아니라 마치 장미 같네요.”
지금껏 희거나 붉은 홑겹의 꽃잎과 샛노란 꽃술을 가진 해홍화만 보아 온 연주는 풍성한 겹해홍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찌나 꽃잎이 빽빽하게 들어찼는지, 겹해홍화는 노란 꽃술조차 꽃잎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꼭 비밀을 감춘 미인 같군요.”
연주와 함께 겹해홍화를 들여다보던 헌왕이 빙그레 웃었다.
비밀을 감춘 미인이라. 시적인 헌왕의 표현이 마음에 들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연주가 자연스럽게 꽃송이에 코끝을 대고 향을 맡았다.
‘어라?’
그런데 기대와 달리 겹해홍화는 아무 향기도 없었다. 당혹감에 연주가 고개를 기울이자 건드리지도 않은 꽃송이 하나가 갑자기 무수한 꽃잎을 후드득 흙바닥으로 떨궜다.
“어머나. 이를 어째.”
촘촘하게 비밀을 감추고 있던 꽃은 헤프게 꽃술을 드러낸 채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연주는 발치에 붉게 흩뿌려진 꽃잎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반면 헌왕은 요란하게 지는 꽃의 자태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줍게 아물린 모습이 참하니 고왔는데 이토록 솔직하게 흉금을 터놓는 매력도 있다니. 참 독특하군요. 이 나무는 밀희(密姬)라고 이름 붙여 헌왕부 안뜰에 들여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헌왕은 바구니 속에서 노란색 끈 한 가닥을 풀어 나무 둥치에 표식을 남겼다. 하지만 연주는 그런 헌왕을 물끄러미 보며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랑꽃이라는 별칭을 알고 있기에 그 유래도 제대로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연주가 생각하는 해홍화의 진정한 매력은 숨이 다해 땅에 떨어지는 순간조차 시들지 않는 것. 마지막까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생생하게 품은 채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남해에서 해홍화를 사랑꽃이라고 부르는 이유 역시 바다 건너 그리운 연인에게 닿을 만큼 짙은 향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령 당신이 거친 파고에 휘말려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 당신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겠어요.]
해홍화의 고결한 마지막 모습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맹약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남해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헌왕이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거라고 넘겨짚은 게 잘못인지도…….’
헌왕의 행동에서 기묘한 어긋남을 인지한 연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개량된 해홍화에 대한 흥미 역시 어둡게 변한 안색만큼 빠르게 떨어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헌왕은 연주의 손을 잡아끌며 농장을 둘러보는 일에만 열중했다.
“군주, 이번엔 저쪽으로 가 보지요.”
헌왕을 따라간 곳에는 독특한 분홍색 꽃잎을 가진 해홍화, 헌왕의 말처럼 한 그루에서 붉은 꽃과 흰 꽃이 동시에 피는 해홍화, 초록색 잎사귀에 특이한 줄무늬를 가진 해홍화,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꽃잎에 희고 붉은 줄무늬가 산만하게 얽힌 해홍화까지, 각양각색의 해홍화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 줄무늬가 독특한 해홍화 나무는 녹의(綠衣)라는 이름이 어울리겠습니다.”
“…….”
“그리고 이 붉은 해홍화는 홍상(紅裳)이라 이름 붙이면 좋겠군요. 두 나무를 일컬어 녹의홍상. 하나는 미인의 녹색 저고리 같고, 다른 하나는 붉은 치마 같으니 더없이 잘 어울립니다.”
헌왕은 연주와 온 동산을 헤집으며 마음에 드는 해홍화를 발견할 때마다 그럴싸한 감상과 이름을 붙여 주며 표식을 남겼다. 반면 연주는 난생처음 보는 독특한 해홍화의 향연에도 차분하게 꽃을 감상하며 이따금 의식을 치르듯 꽃송이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신중하게 맡아 보았다.
하지만 농장에 있는 어떤 해홍화도 남해의 해홍화만큼 짙은 향기를 품은 것은 없었기에, 연주는 꽃나무에 다가섰다가 물러나길 반복할 뿐이었다.
“음, 본 왕의 눈에는 하나같이 아름다운데 불행히도 군주의 마음에 차는 꽃은 없는 모양이군요.”
예상보다 시원치 않은 연주의 태도를 지켜보던 헌왕이 뒤늦게 연주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