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장명은 재차 숙소 안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술병을 주워 들었다. 그러자 술병 바닥에 일부러 숨겨 놓은 듯한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꾸깃꾸깃한 종이에는 알록달록한 고운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게 뭐지……?”
종이에 묻은 가루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장명이 의아한 얼굴로 술병을 거꾸로 뒤집어 흔들었다. 예상대로 술병에서도 가루가 섞인 묘한 빛깔의 술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종이를 이리 내라.”
“예, 전하.”
장명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정엽이 안으로 들어와 정체불명의 가루를 확인했다.
“설마 아편일까요?”
“아편 같지는 않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물건인 건 맞는 듯하니, 군영 밖으로 가지고 나가 은밀히 정체를 조사해 봐라.”
“예, 전하.”
그렇게 대답한 장명은 남은 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종이를 손수건에 싸 품 안에 넣었다. 장명을 지켜보던 정엽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군사 경합을 서둘러 진행해야겠다. 준비해라.”
“예? 벌써요?”
“그래.”
정엽은 예전부터 군사들이 서로 무예를 겨루는 내부 경합을 통해 순수한 실력만으로 승급과 강등을 진행하여 군의 기강을 세웠다.
‘역시…….’
이런 상황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시다니. 주군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우러러보던 장명이 고개를 숙였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가 봐라.”
장명이 떠나고 텅 빈 숙소 안, 아까부터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던 정엽이 다시 한번 숙소 곳곳을 살폈다. 하지만 몇 번을 살펴도 내부의 전경은 그대로였다.
“미리 근심할 필요는 없겠지…….”
애써 불안을 떨친 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잡념은 버리고 훈련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샛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린 화창한 봄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주의 서화 수업을 마친 연주가 소성궁을 나설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그 전에 공주에게 내 준 과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럼 다음 수업까지 제가 내어 드린 임서(臨書) 과제를 꼭 해 두셔야 해요?”
“네, 스승님!”
임서는 글씨본을 보면서 글씨를 연습하는 것을 말했다. 지루한 일이니만큼 공주는 임서 과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늘 대답만은 우렁찼다.
“오늘 출궁하면 저는 모레 입궁하니까 그동안 식사도 잘하시고, 일찍 주무시고, 보모상궁 말도 잘 들으셔야 하고요. 아셨죠?”
“알았어요! 시양이 스승님 말씀 잘 들을 테니까 모레 꼭 와야 해요?”
“그럴게요.”
“약속!”
시양은 연주가 돌아온 후 수업이 끝날 때마다 매번 그녀가 다시 입궁하는 날짜를 약속받았다. 이런 행동이 자신과 언제 헤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란 걸 아는 연주의 표정이 흐려졌다.
“어서요!”
그 와중에도 시양은 작고 오동통한 새끼손가락을 펴고 야무지게 연주를 재촉했다. 시양의 성화에 연주가 얼른 공주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히히, 딱 하룻밤 못 보는 거지만 시양이는 스승님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러니까 꼭 와요?”
연주가 약속하자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짓던 시양이 연주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속살거렸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새삼 저를 좋아해 주는 공주의 마음이 뭉클해 연주는 공주를 꼭 끌어안고 작은 등을 토닥였다.
“저도 공주마마가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더 나오지 마세요.”
“응! 스승님 안녕!”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연주의 품에서 벗어난 시양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런 시양을 향해 똑같이 손을 흔들어 준 연주가 천천히 소성궁의 입구인 소성문을 벗어났다.
“다음번에 입궁할 때는 공주를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는 게 좋겠어. 그런데 뭘 준비하지 ……?”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채 궁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길목을 무심하게 지나치던 찰나였다. 연주가 문득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걸음을 멈췄다.
“저분은 헌왕 전하 아니야?”
“하, 사람이야, 조각이야?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을 수 있지?”
“여긴 왜 오셨을까?”
“헌왕비 마마는 좋겠다. 저런 분하고 매일…….”
궁녀들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궁 한복판에서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만은 명확했다.
‘하지만 정말 헌왕이 맞긴 한 걸까?’
호기심에 궁녀 무리 너머로 상황을 살피던 연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세히 보니 궁녀들은 커다란 태호석(太湖石)뿐만 아니라 근처의 나무나 정자의 기둥을 엄폐물 삼아 몸을 숨긴 채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궁녀들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아, 승설군주!”
정말로 헌왕이 서 있었다.
헌왕은 무척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친근하게 연주를 부르며 다가왔다. 당황한 연주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하지만 부담스러워하는 연주와 달리, 헌왕은 이 상황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헌왕 전하를 뵙습니다.”
결국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연주가 헌왕을 향해 예를 갖췄다. 헌왕은 곧장 연주를 손수 일으켜 세워 주며 말했다.
“서운하군요. 일전에 만났을 때 분명 예는 됐다고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본래 다정한 성품이기는 해도 아내인 헌왕비 외의 여인에게 친근하게 구는 법이 없는 헌왕이었다. 도끼눈이 된 궁녀들이 저들끼리 심각하게 쑥덕거렸다. 하지만 헌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군주께서 내준 해홍화 덕분에 며칠 잠을 푹 잤습니다. 본 왕이 그간 쓰던 해홍 향은 진짜 해홍화 향기와는 천지 차이더군요.”
“효험을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다 군주 덕분입니다. 하지만 해홍화 향기가 조향사들이 흉내 내 만든 것보다 좋긴 해도, 생화라 금세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쉽더군요.”
헌왕은 마치 시들어 가는 해홍화 가지를 품에 안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자연의 조화는 절대 사람의 영역이 될 수 없었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니 별수 없지요. 이제 세자부에 심어 둔 해홍화 나무도 개화가 끝물이긴 하옵니다. 그래도 혹시 아직도 해홍 향을 구하지 못하신 거라면 꽃을 좀 더 내드리지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본 왕의 불면증은 하루아침에 나을 병이 아닌 것을요.”
“그야 그렇지만……. 하면 군방원에서 향을 충분히 구하신 건지요?”
“아닙니다. 해홍 향은 이제 구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예? 그럼 어찌하시려고요?”
자신의 불면증에는 해홍 향이 특효라더니. 헌왕의 대답에 당황한 연주가 되물었다.
“이참에 헌왕부 안뜰 가득 해홍화 나무를 키울 생각입니다.”
“조양에서…… 해홍화 나무를요?”
연주 역시 세자부에서 해홍화 나무를 키우긴 했다. 하지만 조양 땅에서 해홍화의 꽃을 피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선뜻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번에 군주를 통해 진짜 해홍화 향기를 알고 나니 가짜인 해홍 향이 더는 성에 차지 않아서요. 그래서 수소문을 좀 했지요.”
“수소문이라 하심은……?”
“알아보니 향산 꼭대기에서 해홍화를 키우는 장인이 있다고 하지 뭡니까?”
산꼭대기에서 뭘 키운다고? 놀란 연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주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헌왕이 말을 이었다.
“듣자니 그 장인의 특기가 해홍화 품종 개량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참에 향산을 직접 찾아가 해홍화 묘목을 사들일 생각인데, 혹시 군주께서도 동행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 소녀가요?”
“예, 이 조양에서 해홍화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군주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본 왕이 본 해홍화는 군주가 꺾어 준 게 전부라 향산 꼭대기에서 키운다는 그 꽃이 진짜 해홍화인지 알 도리도 없고요.”
뜻밖의 제안이긴 했지만, 품종을 개량한 해홍화는 구미가 당겼다. 사실 산꼭대기는 평지보다 기온이 낮아서 해홍화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는 화로를 피우지 않고 해홍화를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생각이 많아진 연주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지?’
세자부에서 해홍화를 키우면서도 사철 난로를 피워야 하는 점은 분명 부담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덥석 헌왕과 향산에 동행했다간 또 무슨 사달에 휘말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 선뜻 나서지 않는군.’
여인의 고민이 길어진다는 건 부정적인 신호. 기민하게 연주의 기색을 살피던 헌왕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소문에 의하면 그 장인은 세상에 둘도 없는 해홍화를 여럿 만들어 내 키운다고 합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해홍화요?”
“그렇습니다. 한 그루에서 흰색 꽃과 붉은색 꽃이 함께 피는 해홍화는 물론이고, 잎사귀에 고운 줄무늬가 있는 해홍화도 있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어찌 그런 꽃이…….”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아, 물론 많은 시간을 할애하진 않을 겁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생각이니까.”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다니. 그렇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지 않을까?
세상에 둘도 없는 진귀한 해홍화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진 연주가 고민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길을 나서실 생각이신지요?”
“군주만 좋다면 바로 내일 가 볼 생각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해홍화를 구했으면 해서요.”
“내일이요?”
일정이 늦어지지 않는 건 좋지만 바로 내일이라니. 헌왕의 마음이 그만큼 급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헌왕의 제안에 연주가 잠시 머뭇거렸다. 시무룩한 얼굴이 된 헌왕이 되물었다.
“아, 혹시 내일은 어려우신 겁니까? 이런, 내일이 8황자의 탄일이라 강학이 없어서 향산에 다녀오기 딱 좋은 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