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건…….”
“군기가 엉망이란 건 이미 알고 있다.”
정엽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재하가 보고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 없는 52인 중 20인은 관혼상제를 비롯하여 일신상의 이유로 군영에 나오지 않았고, 32인은 군영에 있지만 아직 훈련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무 명은 핑계라도 대고 도망을 갔다지만, 나머지 서른두 명은 군영에 있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재하의 보고에 한층 인상이 험악해진 정엽이 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등군사 우재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정해진 훈련을 시작해라.”
“예!”
상관의 명령에 재하를 제외한 군사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정엽은 단상에서 내려와 긴장한 얼굴로 턱을 바짝 당기고 서 있는 재하와 마주 섰다.
“군영 밖에서부터 전하를 맞이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재하는 정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죄했다. 그러자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장명이 재하를 나무랐다.
“그걸 알면서도 통령께서 단상에 오르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게 다 소관이 군사들을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재하의 변명을 들은 정엽이 코웃음 쳤다.
“혼자 다 뒤집어쓰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아닙니다.”
정엽이 단정하듯 말하자 재하가 극구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신의군은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군대와는 사정이 특수했다.
“귀관은 어느 집안의 자제인가?”
“소관은…….”
“뭘 그렇게 망설이나? 신의군에 들어올 정도라면 집안이 보통은 아닐 텐데.”
“소관은, 병부낭중 우명선의 서자입니다.”
병부낭중 우명선이라. 부친이 한직을 전전하는 인사는 아니지만, 신의군에 속한 다른 군사들에 비하면 좋은 배경이라고 할 순 없었다. 게다가 서자라…….
“자네가 왜 다른 군사들을 감싸는지 알지만 이런 일은 덮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송구합니다.”
“일어나라.”
그러나 남들보다 부족한 배경을 가졌음에도 가장 높은 두등군사 자리에 올랐다는 건 남들보다 특출난 실력을 갖추었다는 뜻이었다. 단박에 재하의 가치를 알아본 정엽이 그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결속을 위해 아군의 잘못을 감싸 안을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벌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일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
“군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집단이지, 군사 간 친목을 다지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다. 명심해라.”
“예.”
“그럼 이제 나머지 서른두 명이 어디 있는지 안내하도록.”
재하를 다독인 정엽이 명령했다. 정엽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재하는 곧장 그를 다른 군사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재하의 발이 멈춘 곳은 군영 안 숙소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 앞이었다. 건물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정엽이 장명을 향해 눈짓했다. 무언의 명을 받은 장명은 건물 문을 힘껏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활짝 열린 합문 안에서는 의관도 정제하지 않은 군사들이 한데 뒤엉켜 술과 도박을 즐기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냐! 당장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신의군 통령께 예를 갖춰라!”
황망한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본 장명이 험악하게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군사들은 건물 밖에서 냉혹한 얼굴로 자신들의 면면 하나하나를 굽어보고 있는 정엽을 발견하고서 느릿느릿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술에 취해 천지 분간이 안 돼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수려한 외모에, 압도적인 풍채와 위엄까지 두루 갖춘 사내라니. 그야말로 낭중지추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정엽은 존재만으로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연친왕은 야만적이기 그지없는 백융을 무찌르고 북방을 평정한 무신(武神)이 아닌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언제 오랑캐들처럼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후 군사들이 비틀거리면서도 눈치껏 제자리를 찾아 도열하는 모습을 훑던 장명의 시선이 숙소 구석에 꽂혔다. 용감한 건지, 아니면 정신이 없는 건지.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다섯 명의 사내만이 요지부동이었다.
‘저자는…….’
인상을 쓰며 구석진 곳에 자리한 다섯 명의 군사를 살펴보던 장명이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실소했다. 장명은 얼굴을 숨기려 하찮게 용을 쓰는 사내 앞에 주저앉아 말했다.
“상 공자를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상 공자는 지난겨울 연왕부에서 장명에게 혀를 잘릴 뻔한 수모를 겪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장명은 상 공자를 향해 칼을 들이밀던 그때처럼 빙그레 웃어 보였다.
“히익!”
겁에 질린 상 공자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동료의 품에 파고들었다.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버둥대는 꼴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우스웠다.
“으아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변 형, 저 미친놈을 좀 내쫓아 주시오! 저놈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다루는 미친놈이올시다!”
상 공자의 야단법석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얼떨결에 상 공자를 품에 안은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장명을 향해 소리쳤다.
“네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인데 내 아우를 겁박하느냐!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개뼈다귀 놈이 감히 우리를 능멸하려 들어? 네놈의 아비가 누구냐!”
한바탕 소란 끝에 장명의 멱살을 움켜쥔 사내가 거칠게 그의 몸을 흔들었다. 결국 바깥에서 이를 지켜보던 재하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하기 시작했다.
“이분은 연친왕 전하의 부관이니 신분의 귀천과 상관없이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는 연친왕 전하께서도 계시는데 이 무슨 추태입니까!”
“흠흠, 연친왕 전하? 어디?”
재하의 말에 지금껏 의도적으로 정엽을 무시해 온 사내가 바깥으로 고개를 쭉 빼고 정엽을 찾듯 두리번거렸다. 정엽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서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쿠! 연친왕 전하께서 와 계셨군요! 제가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요. 연친왕 전하를 제때 맞이하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아차, 소신의 이름은 변해중이옵고 여기 이자들은 모두 제 절친한 지기들이옵니다!”
좀처럼 동요 없는 정엽의 태도를 확인한 해중은 뒤늦게 넙죽 허리를 숙였다. 입으로는 송구하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상관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변해중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던지 그의 말 한마디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연친왕 전하, 송구하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일단락됐다고 해서 군영에서 주색잡기에 열중하던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엽은 문제 군사들과 말을 섞는 대신 빠른 처결을 선택했다.
“두등군사 우재하.”
“예, 전하.”
“여기 있는 자들을 모두 훈련장으로 끌고 가 군법에 따라 곤장 80대를 쳐라.”
“8, 80대?!”
군인을 징벌할 때는 일반 백성에게 적용되는 처벌 수위보다 한 단계 높이는 것이 관례. 또 군영 안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벌인 행위는 분명 용서받지 못할 중죄였다.
하지만 곤장 80대는 매를 다 맞기도 전에 장독이 올라 세상을 하직할 수준이었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종아리 한번 제대로 맞아 본 적 없는 군사들은 정엽의 명령에 깜짝 놀라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여, 연친왕 전하! 저희가 군영에서 술과 도박을 즐긴 것은 분명 사실이오나 황실에 대한 충심으로 여기 모였사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럼 황실에 대한 충심으로 여기 모여서 술판을 벌이고 도박을 했다는 말이냐?”
“예!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황실에 대한 불경죄를 물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을 쳐야겠구나.”
“아니, 그것이 아니옵고! 아이고, 전하!”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매로 막을 일을 목숨으로 대신하게 된 군사들이 아연실색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정엽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하고, 또 단호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 저기 상 형과 변 형이 시켜서 한 일입니다. 저는 아무 잘못도……!”
“맞습니다!”
“저, 저도!”
“뭐야? 이 자식들이!”
“맞잖소! 연친왕 전하를 물 먹여 보자고 바람을 잡은 게 누군데 이제 와 발뺌이오!”
상황이 불리해지자 반석 같던 우정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군사들은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며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엽은 이들이 뒤에서 무슨 작당을 했든, 또 무슨 말로 서로를 비난하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보나 마나 헌왕의 뒷배를 믿고 이런 일을 벌였겠지.’
오합지졸이 따로 없는 군사들의 행동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던 정엽이 조소했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라도 훈련에 참여하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 왕이 부임한 첫날이니 단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지금 당장 훈련장으로 나가 다른 군사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해라.”
정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숙소 밖에 도열해 있던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정작 이 사태의 주범인 5인방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낄낄대기 바빴다.
“아이쿠, 이놈 꼴 좀 보게. 자, 모두 연친왕 전하의 말씀 들었지? 이제 행산(行散)하러 가야 해. 행산!”
“아! 행산! 그거 중요하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5인방은 비틀거리며 정엽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취를 맡은 정엽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명은 홀가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쉽게 신의군을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지요.”
“글쎄다.”
“성국공께서도 이번이 중앙 귀족을 포섭할 좋은 기회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 딴에 주군을 생각한다고 성국공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장명이 살벌한 정엽의 눈빛을 느끼고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정엽의 시선은 여전히 문제의 5인방을 향해 있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당장 저 다섯이 머물던 자리를 살펴봐라.”
“예? 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