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짧은 순간 불온한 광경을 상상하고만 헌왕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연주의 자태를 유심히 살폈다. 차를 홀짝이는 일상의 단편일 뿐인데도 이 순간 연주는 무릉도원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비현실적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청순한 눈망울, 오뚝한 코, 장밋빛 입술, 아담한 어깨, 가늘고 희맑은 목덜미. 그리고 그 아래…… 보드라운 비단으로 감춰진 숨 막히는 능선과 골짜기는 얼마나 황홀할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천하절색의 미인이 교태를 부린다면 마다할 사내가 있을까. 단 하룻밤의 운우지정인들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하겠지.’
헌왕은 자연스럽게 여인에 관한 한 정엽의 취향이 까다롭기 이루 말할 수 없다던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떠올렸다. 그의 전처였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럴 만하다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긴 하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여인이 제 몸을 무기 삼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과연 채연주가 정말로 그런 굴욕을 자처했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황제의 사혼을 거부하고 영항에서 고초를 겪길 택할 정도인 여자니까…….’
평해왕의 적녀인 채연주는 그간 헌왕이 보아 온 어떤 여자보다 자긍심이 높았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미에 정엽이 잠자리를 요구한다고 순순히 응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왕자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제 목숨을 구명할 옥패를 가지고 있는데 뭣 하러 그런 치욕을 감내하겠는가.
‘다시 원점이로군.’
헌왕은 자꾸만 커지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찻잔을 비웠다. 잠시 후, 해홍화를 가지러 갔던 시녀가 돌아왔다.
“군주마마, 분부하신 대로 해홍화 가지를 꺾어 왔사옵니다.”
“이리 다오.”
시녀는 꺾어 온 꽃을 연주에게 건넸다. 품 한가득 꽃을 안은 연주는 상한 꽃송이가 없는지 일일이 살펴본 후 조심스럽게 헌왕에게 넘겨주었다.
“다행히 이 아이가 곱게 핀 것들로만 가져온 듯하옵니다. 개화를 앞둔 꽃망울도 많이 달려 있으니 화병에 꽂아 두시면 한동안 해홍 향을 찾지 않으셔도 되실 겁니다.”
“정말 곱군요.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해홍화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게 말한 헌왕은 연주에게 받은 해홍화 다발에 코끝을 대고 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아주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로군요. 남해에서는 이 꽃을 두고 사랑꽃이라고도 부른다고 들었는데, 참 어울리는 별칭입니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박학다식하시군요. 이 꽃을 사랑꽃이라 부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던데…….”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연주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헌왕은 도리어 겸연쩍다는 듯 꽃다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해홍 향에 빠진 뒤로 한동안 해홍화를 조양에서 키우려 애써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실력 좋은 정원사를 붙여도 소용이 없더군요.”
“그러셨군요.”
“조양에서 키우기 힘든 꽃이라 정성을 많이 쏟았을 텐데, 이렇게 귀한 꽃을 선뜻 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소녀야말로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옵니다.”
연주의 화답에도 좀처럼 기쁨을 숨기지 못하던 헌왕은 여러 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헌왕을 위해 해홍화를 가꾼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 연주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때, 세자부 노복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저, 군주마마. 왕세자 저하께서 돌아오셨사옵니다.”
세자부의 주인이 돌아왔다? 곁에서 소식을 함께 접한 헌왕은 해홍화 다발을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본 왕은 그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대문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사옵니다.”
“아닙니다. 귀한 차도 대접받고 이렇게 귀한 꽃도 받았는데, 이 이상 군주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낮 동안 저자에서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피곤하셨을 테니 편히 쉬십시오.”
“하면 멀리 나가지 않겠사옵니다.”
헌왕을 향해 가볍게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예를 대신한 연주가 노복과 함께 멀어지는 헌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길,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자부의 붉은 대문으로 향하던 헌왕이 막 귀가한 왕세자를 발견하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따라 우연이 잦군. 이제야 궁에서 돌아오는 것이오?”
연주가 헌왕과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후원으로 향하던 채신이 헌왕의 품에 안긴 해홍화를 보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헌왕 앞에서 빈틈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헌왕 전하를 소신의 집에서 뵙는 날이 다 있군요.”
“그러게.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오. 본 왕이 여기서 이렇게 세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한데 주인도 없는 집에 헌왕 전하께서 무슨 일로……?”
“어쩌다 보니 군주와 잠시 연이 닿아서.”
공손하지만 적개심이 묻어나는 채신의 어조에 웃음을 터뜨린 헌왕이 여유 만만한 태도로 응수했다. 하지만 받아치는 채신의 말씨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연이 닿았다. 아주 낭만적인 표현입니다만, 누가 잘못 들으면 전하께서 제 누이와 정이라도 통한 줄 알겠습니다.”
“사람 인연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하면 다음에 또 보지.”
약 올리는 것처럼 끝까지 얄미운 말만 늘어놓은 헌왕은 유유히 붉은 대문을 나섰다. 헌왕의 말을 곱씹던 채신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헌왕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연주를 물고 늘어지는 거지?’
끼이익-.
이윽고 헌왕의 등 뒤에서 세자부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헌왕이 밖으로 나오자 마차와 함께 대기 중이던 시종이 다가와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받아라.”
“예.”
해홍화를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떠받들 땐 언제고, 헌왕은 안고 있던 꽃다발을 하찮은 물건이라는 것처럼 시종에게 떠넘겼다. 갑자기 날아온 꽃다발을 어영부영 끌어안은 시종은 마차에 오른 헌왕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 이 전낭은 어찌할까요?”
시종은 품 안에서 은전이 가득한 돈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연주의 시녀 금란이 저자에서 소매치기당했다던 그것이었다.
“그런 걸 뭣 하러 묻느냐? 술값으로 탕진하든 계집의 치마폭에 던져 주든 네 마음대로 해라.”
헌왕은 차창 밖으로 손을 내저으며 만사 귀찮다는 듯 짜증을 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마부는 꽃다발을 안은 시종을 남겨 둔 채 서둘러 마차를 출발시켰다.
* * *
다음 날 아침.
황명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신의군 통령을 맡게 된 정엽은 자미성 북동쪽 외곽에 위치한 신의군 군영을 찾았다. 그러나 군영 앞은 정엽을 환영하는 군사 하나 없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이건 문제가 있습니다. 새 수장이 부임하는 날인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정엽과 동행한 장명이 분노했다. 하지만 정작 정엽의 신경을 긁는 것은 따로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할까.”
“전하, 너무 태평하신 것 아닙니까?”
“마치 군영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지 않으냐. 이른 아침이기는 하지만 군영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정엽의 지적에 다시 한번 군영을 빙 둘러본 장명이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건 둘째 치고, 군영 내부에서 인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하, 어쩌지요?”
“처음부터 신의군 군사들이 나를 수장으로 예우할 거라 여긴 적 없다. 하지만 군기가 빠진 정도는 상상 이상인 것 같군.”
정엽은 신의군 통령직을 수락한 후, 한동안 신의군 전임 수장과 군 내부의 분위기를 수소문했다. 현재 신의군은 황제의 친위 부대라는 명분 아래, 실상 귀족 자제들이 거쳐 가는 명예직쯤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최정예 군사를 모아 놓았다는 신의군이 이 지경일 줄이야…….’
자고로 군대라면 이 시간쯤 벌써 신변을 정리한 군사들이 어슬렁거리며 군영 밖까지 사람 북적이는 기운이 흘러넘쳐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훈련은 고사하고 누구 하나 자기 위치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니.
황제가 난제를 던져 줄 줄은 알았지만, 그게 저를 옭아맬 덫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정엽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폐하께서 신의군이 이 지경이 된 걸 모르실 리 없다. 한데 어째서…….’
정엽은 오로지 내 나라를 지키고 황실을 수호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간 북방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 왔다. 한데 내가 애써 지켜 온 조국의 심장부가 이렇게까지 썩어 문드러져 있다니. 그간 쌓아 온 나의 노력들은 다 뭐란 말인가?
정엽은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우선은 군 내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일단 안을 좀 더 살펴야겠다.”
날 선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정엽이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장명과 함께 군영 안으로 들어섰다. 드넓은 훈련장에는 오십 명 남짓한 군사들이 대오를 맞추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나마 신의군 전부가 구제 불능 상태가 아니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씁쓸한 감상을 지워 내린 정엽이 단상에 올랐다. 그러자 도열한 군사 중 가장 앞줄에 선 군사 하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선창했다.
“우재하 외 47인이 신의군 통령께 인사 올립니다!”
“통령을 뵙습니다!”
자신을 우재하라 소개한 청년이 선창하자, 다른 군사들이 따라서 예를 갖췄다. 하지만 정엽은 이 상황이 여전히 황당하기만 했다.
‘도합 마흔여덟 명이라니.’
신의군의 총원은 본래 백 명. 최소한 반 이상의 군사들이 제구실을 못 하는 쭉정이라는 소리였다. 한숨과 함께 마흔여덟 명의 군사를 두루 살핀 정엽이 평신을 명하며 입을 열었다.
“우재하, 네가 두등군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신의군은 두등(頭等)군사, 이등군사, 삼등군사 총 세 개 계급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두등군사는 전체 정원의 3할이 채 안 됐다.
“그럼 묻지. 내가 알기로 신의군 총원은 백 명인데 나머지 인원은 다 어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