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한참을 달린 마차가 세자부 앞에 멈춰 섰다. 헌왕과 연주가 세자부의 붉은 대문을 넘어서자, 세자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집사 표 씨가 달려와 그들을 맞았다.
“군주마마,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한데 함께 오신 분은……?”
“헌왕 전하일세.”
“아! 헌왕 전하시로군요. 알아 뵙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행여 주인에게 폐가 될까, 표 집사는 서둘러 허리를 굽히며 헌왕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헌왕의 반응은 의외로 소탈했다.
“괜찮네. 자네가 본 왕을 알아보지 못한 건 본 왕이 그만큼 세자와 격조했기 때문이겠지. 잘못이 있다면 본 왕에게 있으니 사과는 거두게.”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하옵니다. 하면 안으로 드시지요.”
헌왕의 온화한 태도에 긴장으로 얼어붙었던 표 집사의 얼굴이 풀렸다. 주변 사람의 마음을 다사롭게 어루만지는 헌왕을 보며, 연주는 이상하게도 늘 무뚝뚝한 태도로 궁인들을 긴장으로 몰아넣는 정엽을 떠올렸다.
왜 이런 순간에도 정엽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 이제는 의식적으로라도 정엽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연주가 머릿속에 가득한 정엽의 얼굴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군주, 해홍화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 아, 그것이…….”
불쑥 치고 나오는 헌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연주가 말끝을 흐렸다. 동행하는 내내 연주의 눈빛과 표정을 눈여겨보고 있던 헌왕이 부드럽게 되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무어라 하셨지요?”
“해홍화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해홍화는 제 처소인 별당에…….”
대수롭지 않게 해홍화가 있는 장소를 대답하던 연주가 멈칫했다. 별당은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수화문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외간 남자인 헌왕을 세자부의 내밀한 곳까지 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한 구설에 휘말릴 필요는 없지.’
짧은 순간 헌왕에게 둘러댈 말을 생각해 낸 연주가 입을 열었다.
“해홍화는 별당에 있으니 시녀에게 꽃가지를 꺾어 오라고 시키면 될 것이옵니다. 후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소녀가 전하께 차를 대접해도 괜찮을지요?”
“아……. 그 또한 나쁘지 않지요.”
연주가 후원에서 차를 대접하겠다고 하자 일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던 헌왕이 수더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눈치가 빠른 시녀 금란이 연주 앞으로 나섰다.
“하면 소인이 가서 해홍화 가지를 꺾어 오겠사옵니다.”
“그러려무나. 표 집사, 후원으로 다과를 내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연주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은 서둘러 안채 쪽으로 사라졌다. 연주는 자연스럽게 헌왕을 세자부 후원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세련되고 멋스럽게 가꾼 향나무와 백송나무가 가득한 후원이 헌왕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가 세자부 후원입니다.”
연주는 헌왕과 함께 정자에 올랐다. 두 사람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곧 세자부 하인들이 송화 가루를 꿀로 뭉쳐 만든 과자와 함께 예사롭지 않은 다구를 내려놓았다.
“흐음…….”
귤만 한 찻주전자와 호두만 한 찻잔이라니. 소꿉놀이에나 쓰일 법한 아기자기한 다구를 마주한 헌왕이 눈을 빛냈다. 연주가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거라고 하기엔 앙증맞은 찻주전자와 찻잔 모두 정교한 장식이 틈 없이 빼곡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다구는 처음 보는군요. 대체 이런 희귀한 다구로는 무슨 차를 내리는 겁니까?”
“아우 윤이 상경하는 길에 무이암 차를 구해 올라왔사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전하께 내드릴 차는 ‘수금귀(水金龜)’라고 하지요.”
무이산 암벽에서 자란 차나무 잎으로 만든 무이암 차는, 예부터 바위 위에 핀 꽃향기인 암골화향(岩骨花香)을 품은 것으로 유명했다.
“무이암 차는 황자인 본 왕도 자주 접하기 어려운 차인데 세자부에서 만나다니 영광이로군요. 듣기로 질 좋은 무이암 차에서는 바위의 기운은 물론, 백 가지 꽃향기를 즐길 수 있다던데. 이 차는 어떻습니까?”
“저는 아직 맛보지 않았습니다만, 제 오라버니와 아우의 말로는 계화 향이 난다고도 하고, 복숭아 향이 난다고도 하더군요.”
“계화 향과 복숭아 향이라…….”
“전하께서 이 차에서 어떤 향을 발견하실지 무척 기대되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주는 귀여운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맑은 등황빛 찻물을 감상한 헌왕은 술잔처럼 작은 잔을 들어 신중하게 차 맛을 음미했다. 찻물을 머금자 과연 입 안 가득 다채로운 꽃향기와 과일 향이 진하게 퍼졌다.
“본 왕은 복숭아 향과 난 향, 그리고 우유 향이 느껴지는군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연주는 헌왕이 차를 음미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뒤따라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병을 얻었다는 소문과 다르게 너무나 멀쩡한 모습인 헌왕과 마주 앉아 있자니 원소절쯤 곽 귀비가 덕교궁으로 찾아와 늘어놓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과부를 측실로 들이려 애써야 할 만큼 중한 병이라고 하더니. 아무리 보아도 병색이 느껴지지 않는데…….’
병환이 거짓이라면 예상대로 정엽을 제치기 위한 술수를 준비 중인 걸까? 어느새 저보다 더 차를 음미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헌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연주가 입을 열었다.
“한데 전하,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일전에 곽 귀비마마께서 전하의 병이 깊어 걱정하시는 모습을 뵈었사옵니다.”
은연중에 정곡을 찌르는 연주의 질문에 헌왕의 눈빛이 잠시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데 익숙한 헌왕은 수더분하게 웃으며 답했다.
“자식이 아무리 장성해도 어머니의 눈에는 항상 어린아이로 보이기 마련이지요. 지난겨울 심하게 앓은 뒤로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지나가는 말로 전했더니 어머니께서 또 극성을 부리시나 봅니다.”
곽 귀비의 자식 사랑은 황궁의 모두가 인정할 만큼 유별났다. 게다가 사람에게 있어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잠이 아닌가.
“아, 그래서 숙면에 좋은 해홍 향을 찾으셨던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과부를 측실로 들여 후사를 보려는 곽 귀비의 꿍꿍이는 모자가 함께 머리를 맞댄 결과는 아닌 모양이었다. 안도한 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헌왕은 소문난 애처가이니까.’
헌왕은 황실은 물론, 세간에서조차 둘도 없는 애처가로 유명했다. 소싯적 지금의 왕비에게 반해 백 일 동안 적극적으로 구애한 끝에 혼인 승낙을 받아 낸 일은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사랑 이야기였다.
게다가 헌왕은 여러 황자 중 가장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져 정엽 못지않게 여인들의 관심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니는 인사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해우왕자(該優王子)는 세자부에 없나 봅니다.”
“아, 요새 제 아우는 조양의 귀족 자제들과 어울리며 얼굴을 익히느라 무척 바쁘답니다.”
“그렇군요.”
손님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결례람. 홀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연주가 무안함에 손안의 찻잔을 꼭 감싸 쥐었다. 헌왕은 불쾌한 기색이라곤 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해우왕자의 친화력이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왕자가 어쩌다 형님 전하께 미움을 사 그 고생을 했는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실 왕자가 종정사에 갇혔을 때 본 왕이 어전에 들어 구명을 청하려 했는데, 좀처럼 신열이 내리지 않아 미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일이 어찌 전하께서 사죄하실 일이겠사옵니까. 어쨌든 연친왕 전하께 불경한 행동을 저지른 건 제 아우인 것을요.”
모두 내 아우 때문이다?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가던 헌왕이 마치 정엽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두둔하는 연주의 태도에 설핏 눈을 가늘게 떴다.
“형님 전하의 마음을 돌리신 분이 바로 군주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형님은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는 분이신데, 대체 어찌 설득한 건지요?”
“아, 그건…….”
연주는 갑자기 날아온 송곳 같은 질문에 말끝을 흐렸다. 정엽이 시중을 들라고 요구하기에 시중을 들며 간호를 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간 자칫 쓸데없는 풍문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그저 거래를 했을 뿐입니다.”
“거래요?”
“예.”
연주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에 헌왕의 표정이 묘해졌다. 거래라면 동생의 사면을 요구하는 대신 연주가 정엽에게 무언가를 내주었다는 뜻이었다.
‘대체 뭘까.’
승설군주 채연주는 귀한 신분이기는 해도 단독으로 정엽에게 정치적 이득을 안겨 줄 수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재물은 연왕부에도 성국부에도 넘쳐 나니 정엽에게 아쉬움이 있을 리 없고, 평해왕의 지지를 되찾고 싶어 한들 그런 문제는 친우인 문원왕세자(文元王世子)를 통하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왕세자는 정엽의 오랜 벗이므로 이미 미래의 평해왕부를 손에 움켜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존귀하신 군주께서 거래라니 의외로군요. 한데 거래라면 대체 무엇을 걸고…….”
“그건 연친왕 전하와 저만의 비밀입니다.”
“비밀이라고요?”
쉽게 대답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돌아오는 대답이 단호했다. 헌왕이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 웃음을 터뜨렸다.
“군주께서도 참 짓궂으시군요.”
“시전에서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들조차 거래 조건은 함부로 떠들지 않는 것이 도의라고 하지 않사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별수 없군요.”
헌왕은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엽과 연주 사이에 오갔을 거래 조건을 추측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 봐도 단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바로 거래를 제안한 채연주 그녀 자신이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