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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54화 (54/161)

54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뒷목을 쓸어내린 헌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내가 향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볼까 봐 숨겼던 것뿐입니다.”

헌왕이 곽 귀비의 아들인 이상, 정엽과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혼 전이나 후나 그와 일절 교류하지 않던 연주였다. 그러나 연주는 이번 일을 통해 헌왕을 달리 보게 됐다. 향에 민감한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해서 타인에게 감응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기 때문이다.

‘헌왕이 왜 조양에서 그토록 환영받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구나.’

그러고 보면 수려한 외모와 언변,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춘 헌왕이었다.

“취향이 어찌 성별에 구애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군주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헌왕은 이 말을 끝으로 연주의 바구니를 시녀에게 돌려주었다. 시녀는 바구니를 건넬 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시녀를 귀엽게 여기며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주가 헌왕 옆에 멀대처럼 서 있는 시종을 발견하고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헌왕은 물론이고, 함께 온 시종의 손 역시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선 아직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셨나 보옵니다.”

“아, 본 왕은 여기 있는 것들 말고 찾는 것이 따로 있어서요.”

“그게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인장이 물건을 가져다줄 때가 됐는데…….”

조금은 부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헌왕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때, 바삐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호화스러운 비단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전하, 이를 어쩌지요. 전하께서 찾으시는 해홍 향이 요즘 인기가 많아 모두 나갔사옵니다.”

“저런.”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내는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연신 굽실거렸다. 내내 웃는 낯이던 헌왕이 난처한 듯 미간을 좁혔다.

요새 조양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해홍 향은 해홍화로 만든 향을 말했다.

제대로 된 해홍 향은 오직 그늘에서 말린 해홍화로만 만들어야 하지만, 조양에서는 소량의 해홍화에 다른 향료를 첨가해 만든 것까지 해홍 향이라 통칭했다. 주로 남해에서 나는 원재료의 특성상 해홍화가 조금만 들어가도 부르는 게 값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해홍 향은 언제 다시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게……. 향의 원료가 되는 해홍화 운송이 날씨 탓에 좀 늦어져서요. 최소한 보름은 걸릴 것 같사옵니다.”

“곤란하게 됐군. 본 왕에게 꼭 필요한 것이거늘.”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던 헌왕이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향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해홍 향이 꼭 필요하다니.’

해홍 향은 연주의 고향인 남해와 연관 깊은 향이었다. 주인장과 헌왕의 대화를 들으며 어쩐지 친근한 느낌을 받은 연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찾으시는 게 해홍 향이었군요. 한데 해홍 향은 어찌 찾으시옵니까?”

“본 왕이 근래 부쩍 불면에 시달리는지라 밤마다 해홍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백약이 무효한데 오로지 해홍 향만이 병에 효험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찾을밖에요.”

연주는 헌왕의 대답에 무심코 자신의 처소 뜨락에 가득 피어 있는 해홍화를 떠올렸다. 그토록 필요한 것이라면 몇 송이 꺾어 보내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아니야.’

우연히 향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찾긴 했지만, 평소 왕래가 없던 헌왕을 위해 마음을 쓰자니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았다.

“안타깝군요. 저도 마침 군방원의 해홍 향이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별수 없지요.”

연주가 점잖게 헌왕을 위로하고는 주인장에게 눈짓으로 향료가 든 바구니를 가리켰다. 이제 계산을 해 달라는 신호였다.

“아, 예.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계산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헌왕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처신이 무척 곤란해졌던 주인장은 한눈에 보아도 지체가 높아 보이는 연주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주판이 놓인 매대 앞으로 안내했다.

“흠, 어디 보자…….”

능숙하게 주판알을 튕기던 주인장은 연주가 바구니에 담은 향료의 값을 계산하고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모두 다 해서 은 아홉 냥입니다.”

“은 아홉 냥이요? 아홉 냥…….”

행여 향료값을 잊을세라 염불 외듯 중얼거리던 시녀가 허리춤에 단단히 맨 돈주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주머니는커녕 동전 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어어? 내 주머니가 어디 갔지?”

“괜찮으니 천천히 찾아보아라.”

“네? 네. 왜 없지? 어쩜 좋아…….”

연주는 당황한 시녀를 다독이며 침착하게 기다렸지만 시녀는 끝내 주머니를 찾지 못했다. 시녀는 주저앉아 대성통곡이라도 할 것처럼 울상이 되었다.

“마마, 어쩌지요? 분명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있었사옵니다. 정말이에요. 그런데 군방원에 오는 동안 사라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거리를 구경하는 동안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사옵니다.”

“소매치기?”

“네에. 송구하옵니다. 다 소인의 잘못이에요.”

어느새 시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난처해하던 연주는 송구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 시녀를 다그쳐 봐야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생각을 정리한 연주가 주인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네. 다음에 다시 오지.”

그 순간, 연주 일행을 따라온 헌왕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헌왕 전하?”

“귀한 분께 다시 저자에 나올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향료값은 본 왕이 대신 치러 드리지요.”

“아닙니다. 어찌 전하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요. 제가 괜찮지 않을 것 같아 그럽니다.”

연주는 극구 사양했지만, 헌왕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함께 온 시종을 향해 눈짓했다.

“은 아홉 냥이라고 했소?”

“예? 예, 그렇습니다.”

“자, 여기 있소.”

결국 주머니를 끌러 은 아홉 냥을 꺼낸 헌왕의 시종이 연주를 대신해 값을 치렀다. 어느 쪽에게서든 돈을 받으면 그만인 주인장은 굽신대며 돈을 받고는 연주의 시녀에게 향료를 바구니째 건넸다.

“그럼 나서지요.”

주인장이 물건을 건네준 것을 확인한 헌왕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정중하게 길을 열었다. 연주는 어영부영 헌왕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군방원을 나섰다.

“오늘 일은 감사했습니다. 세자부에 도착하는 대로 사람을 시켜 돈을 보내 드리지요.”

“은 아홉 냥이 뭐 대수라고요. 군주께서 돈을 보내시면 그냥 돌려보낼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괜찮다는 데도요.”

헌왕은 손사래까지 치며 재차 돈을 보내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신세를 지면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 연주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은 아홉 냥이 적은 돈도 아니고, 신세를 졌으니 이대로 넘어갈 순 없습니다. 아까 군방원에서 해홍 향을 찾으시던데 해홍 향은 아니더라도 세자부에 제가 기르는 해홍화가 있기는 합니다.”

“지금 해홍화라고 하셨습니까? 조양의 기후가 따뜻하기는 해도 해홍화 나무가 꽃을 피우기는 역부족일 터인데…….”

“그 나무를 위해 세자부에서는 사시사철 화로를 피우지요.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해홍화 가지를 좀 꺾어 보내 드리겠습니다.”

“해홍화를 얻을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안 그래도 훤한 헌왕의 얼굴이 해홍화 이야기로 한층 더 밝아졌다.

“마침 본 왕이 잠시 짬이 있으니 하인이 오갈 필요 없이 세자부로 가서 직접 해홍화를 가져오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 그건…….”

“해홍화는 조양에서 보기 힘든 아주 귀한 꽃이지 않습니까. 하인이 오가는 길에 꽃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꽃 한 송이에 이토록 정성을 쏟는 사내라니. 화초 따위에 무관심한 정엽과는 반대로, 해홍화를 꽤나 아끼는 듯한 헌왕의 반응에 반가움을 느낀 연주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헌왕을 세자부로 데리고 가도 괜찮은 걸까?

‘오라버니나 윤이 난처해하진 않겠지?’

이렇듯 연주가 고심하는 사이, 마차 한 대가 천천히 인파를 가르며 군방원을 향해 다가왔다. 연주가 세자부를 나설 때 탔던 그 마차였다.

“마마, 저기 마차가 와요.”

“벌써 시각이 다 되었나 보다.”

“예, 마마.”

이윽고 마차가 연주 앞에 멈춰 섰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연주는 결국 헌왕과 함께 세자부에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오라비는 기린전에서 황자들과 수학하여 헌왕과도 자주 만나는 사이이고, 막내인 윤 또한 헌왕을 불편하게 여길 이유가 없으니 큰일이 벌어질 리 없었다.

“그럼 함께 가시지요. 아, 그런데 전하의 마차는…….”

“세자부로 마차를 보내라고 일러두면 될 일입니다.”

“그렇군요. 하면 전하께서 먼저 마차에 오르시지요.”

“아닙니다. 군주께서 먼저 오르셔야지요.”

손수 마차의 문을 연 헌왕이 연주를 향해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었다. 연주는 이 상황이 무척 난처했지만 그렇다고 헌왕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순순히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외침과 함께 헌왕과 연주를 실은 마차가 세자부를 향해 부드럽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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