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3층 건물 전체를 항료점으로 쓰는 군방원은 입구에서부터 온갖 향기가 풍겼다. 이름 그대로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동산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갖 향기가 문 앞에서 쏟아지는데도 전혀 불쾌하지 않구나.’
기분이 좋아진 연주가 시녀와 함께 군방원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중앙이 지상부터 3층까지 트인 높다란 상점 내부를 구경하고 있노라니, 젊은 점원이 다가와 싹싹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향을 사러 오셨습니까?”
“향을 배합할 때 필요한 향료를 좀 사러 왔네.”
“그러셨군요. 한데 우리 군방원에는 최고의 조향사들이 만들어 낸 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번거롭게 직접 향을 만들지 마시고 저쪽에서 원하는 향을 골라 보는 건 어떠실지요?”
“조향사?”
“예, 저희 군방원에서는 향을 만드는 장인을 그렇게 부릅니다.”
“그렇군.”
정중한 태도로 연주의 물음에 답한 점원이 1층 곳곳에서 조향사들이 만든 향을 맡아 보고 구매해 가는 손님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연주의 감상은 단순했다.
‘과연 유행의 중심인 조양에서 살아남은 상점답구나.’
보통의 명문 세가 여식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향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다. 자기만의 향기를 가지는 것 또한 스스로를 가꾸는 방법의 일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직접 향료를 배합해 향을 만들어 오던 연주에게 남이 만든 향을 골라 보라는 제안은 구미가 당길 리 없었다.
분주한 조향사들을 바라보는 연주의 표정만으로 고객의 성향을 얼추 파악한 점원은 재빠르게 태도를 바꾸었다.
“손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느낌의 향을 만드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그럼 향은 손님께서 직접 사용하실 건지요? 아니면 귀한 분께 선물이라도……?”
쏟아지는 질문에 연주가 대답을 망설였다. 연주가 원하는 것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 사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가 일부러 말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점원은 그녀가 직접 배합한 향을 쓰긴 하지만 향에 대한 조예가 깊지는 않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는지, 능숙하게 향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직접 쓰실 거라면 역시 달콤한 꽃향기가 나는 게 좋겠고, 혹여 정인께 선물하시려면 저쪽에 있는 침향이 들어간 게 인기가 좋으니 살펴보시지요.”
“아니, 호의는 고맙네만 나는 정말 내게 필요한 향료만 사러 온 것이니 향을 추천해 주지 않아도 괜찮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향료의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알아서 특상품으로만 골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찌 이리 잡소리가 길까. 군방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연주의 곁에서 점원이 하는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시녀가 답답한 듯 나섰다.
“이봐요, 우리 아가씨는 아주 특별하신 분이에요. 당신보다 향에 대한 안목이 수백 수천 배는 뛰어나신 분이라고요. 여기 이렇게 세워 둘 시간에 향료가 준비된 곳으로 안내하기나 해요.”
“아이고, 이런. 소인이 실수했습니다. 하면 당장 우리 가게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조향사를 불러 드리지요. 원하시는 향을 주문하시면 정성껏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참 어지간히 말귀를 못 알아듣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항료만 사러 왔다는데 조향사를 불러 향을 주문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손님들의 시선이 점원에게로 쏠렸다. 무안함에 얼굴이 벌게진 점원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그, 그럼 3층으로 올라가 보십시오. 손님이 찾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부 있을 겁니다.”
“고맙네.”
한바탕 소란에도 담담하게 인사를 건넨 연주가 시녀와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점원의 말대로 수백, 수천 가지 향료가 겹겹의 종이에 밀봉되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연주는 향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다른 것들보다 작게 포장된 향료를 펼쳐 꼼꼼하게 살폈다. 처음에는 눈으로 보고, 그다음에는 거리를 달리하며 향을 맡아 보고. 손끝으로 향료의 질감까지 일일이 확인한 연주가 시녀가 들고 온 바구니에 필요한 향료를 한 봉지씩 담기 시작했다.
연주가 우아한 자태로 향을 고르는 모습을 선망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시녀가 종알거렸다.
“어쩜, 마마께서는 향을 고르시는 모습도 고우세요.”
“별 얘기를 다 하는구나.”
“한데 마마, 이렇게 따로 파는 향료들은 같은 무게인데도 가격이 1층에 있는 것보다 훨씬 싸네요?”
“무게가 같다고 해서 모든 향료가 같은 가격일 순 없지 않으냐. 그러니 아까 점원도 우리에게 군방원에서 제작한 향과 조향사를 추천한 게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군방원에서 조향사들이 만든 향을 팔면 거기에 들어간 향료가 정확히 무엇인지, 향료는 어떤 품질의 것을 썼는지 알려 줄 필요가 없지 않으냐. 게다가 자기들만의 공정을 거쳤다는 핑계로 가격 또한 원가보다 높여 부를 수 있지.”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시녀는 순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의 말이 단번에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서라는 사실만큼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주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이나마 아는 체하고 싶어진 시녀가 귀동냥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마, 이건 여기 오는 길에 들은 건데요. 요새 조향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대요.”
“그래?”
“특히 여기 군방원에서 명성을 떨치는 조향사는 몸값이 천정부지라고 하더군요?”
“너는 참 별걸 다 아는구나.”
빠진 향료가 없나 확인하던 연주가 바구니를 뒤적이던 손길을 멈추고 시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연주의 칭찬에 마음이 들뜬 시녀가 수줍어하면서도 눈을 빛냈다.
“마마께서도 향 만드는 솜씨는 일품이신데, 이참에 조향사로 나서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재물도 지금보다 더 많이 가지실 수 있잖아요!”
“재물이라고……?”
왕족씩이나 되어 조향사가 웬 말인가. 게다가 재물을 욕심내는 왕족이라니. 남들이 알면 비웃음을 살 일이다.
하지만 시녀는 아직 세상의 이치를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 타박하는 것도 우스워 가만히 시녀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연주가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승설군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등 뒤에서 연주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곳에는 수려한 헌헌장부 하나가 서 있었다.
‘향료점에 어찌 헌왕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연주가 황급히 예를 갖췄다.
“헌왕 전하를 뵙습니…….”
“아니, 예를 갖추실 것 없습니다.”
헌왕이 무릎을 굽히는 연주를 제지하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가까이 다가온 헌왕에게선 익숙하면서도 낯선 묘한 향기가 풍겼다.
‘이 향은 뭐지?’
연주는 잠시 코끝을 스쳐 간 향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일순간 헌왕과 눈이 마주친 연주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헌왕은 나이가 들어서도 관옥 같은 얼굴을 자랑하는 황제의 핏줄답게 정엽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날렵한 선을 자랑하는 정엽과 달리, 헌왕은 화려한 미모를 지닌 모친의 영향인지 여성스럽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정엽이 매일 창칼을 휘두르는 전쟁의 신처럼 날카로운 인상이라면, 헌왕은 온종일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향음신처럼 부드러운 인상이라고나 할까.
‘형제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도 있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코앞에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헌왕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연주의 외양을 탐미하듯 훑어보던 헌왕이 승냥이 같은 교활한 눈빛을 숨기고 예의 수더분한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승설군주를 이런 곳에서 다 만나다니 참으로 의외로군요. 이렇게 만나니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한데 귀하신 몸으로 군방원까지 직접 향료를 구하러 나오시다니. 구하려는 향료가 아주 귀한 것인가 봅니다.”
“그것보다는 향에 배합할 향료를 직접 살피는 일이 버릇이 돼 버려서요.”
연주의 말에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인 헌왕은 매끄러운 언변으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어떤 향료를 골랐는지 궁금한데, 본 왕이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만……. 향료에 대해 잘 아시는지요?”
“향에 관심을 가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문외한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연주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헌왕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짓고는 시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헌왕의 눈부신 미모에 넋이 나가 있던 시녀는 연주의 눈짓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란아?”
“…….”
“금란……?”
연주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시녀를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채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헌왕에게 내밀었다.
“고맙구나.”
반면 헌왕은 시녀의 이런 유별난 태도가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바구니 속 향료 봉지를 하나하나 살폈다.
“단향에 감송과 백지, 그리고 모란피, 정피, 고본, 회향, 강진향이라…….”
연주가 골라 담은 향료를 확인한 헌왕은 무언가 알아낸 사람처럼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매화꽃만 더하면 그 옛날 수양공주가 만들었다는 매화향이 되겠군요. 맞지요?”
헌왕은 수수께끼를 풀고 칭찬을 바라는 어린애처럼 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연주는 헌왕의 순진무구한 얼굴보다, 그가 재료만 보고도 무슨 향을 만들지 알아맞히는 것에 놀라 토끼 눈이 되었다.
“전하께서 이렇게나 향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