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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52화 (52/161)

52화.

일부종사치 못하고 남편을 여러 번 바꾸는 여인이라?

적어도 헌왕과 맺어 줄 만한 신분의 여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어디 곽 귀비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인이던가.

불길한 예감에 삽시간에 얼굴이 굳어진 연주가 황후를 바라보았다. 연주와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황후가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과부를 헌왕과 맺어 주겠다는 뜻인가? 황실에 과부를 들이다니. 내 반대는 둘째 치고 폐하께서 그런 일을 허락하시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들이 요절하고 만다는데 폐하께서도 뾰족한 수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자식이 있으시니 신첩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시리라 믿사옵니다.”

“그야 그렇네만…….”

“과부를 황실에 들인다 해도 입 밖에 내어 떠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찌 그 사실을 알겠사옵니까? 또 내세울 신분은 만들기 나름이지요. 황제 폐하는 신첩이 설득할 테니, 황후마마께서는 조용히 지켜보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결국 내명부의 수장인 황후에게 허락을 받는 것은 형식적인 절차이고, 황제의 총애를 앞세워 일을 해결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사실 황후로서는 헌왕과 맺어질 상대가 과부이건 일흔 먹은 노파이건, 그 뒷감당은 모두 곽 귀비 모자가 하는 것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그 대상이 연주라면 곤란했다.

“일단 알았네. 생각해 보지.”

“그럼 신첩은 황후마마만 믿겠사옵니다.”

용건을 마친 곽 귀비가 서둘러 덕교궁을 나섰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황후의 착잡한 한숨이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황후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연주를 돌아보았다. 황후의 하문에도 오랫동안 답을 내놓지 못하던 연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종실 왕공이 측실을 들이는 목적은 대개 후사를 위해서이지 않겠사옵니까.”

안타깝게도 연주의 머릿속에는 곽 귀비 모자가 자신을 넘볼 수 있다는 계산이 전혀 없었다. 다 지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형의 아내였던 사람을 아우가 취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인 데다, 연주에게 헌왕은 철저히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헌왕 내외가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혼인한 지 8년이 지나도록 왕비에게 태기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구나.”

“그러니 과부라도 들이겠다는 건 수태 능력이 입증된 여인을 측실로 들이겠다는 뜻일지도 모르지요.”

“아무리 그래도 과부라니.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황실을 비롯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바로 혼인이었다. 가장 손쉽게 권력을 키우고 대물림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헌왕비의 친정인 설가는 전통 있는 명문가지만, 2대째 고관대작을 배출하지 못한 줄 아옵니다. 만일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을 헌왕의 측실로 들인다면 헌왕비는 물론이고 설가의 반발도 만만치 않겠지요.”

“어느 쪽이든 다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하기야 친왕 작위도, 신의군 통솔권도 중요하지만 자질만으로 황태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예.”

곽 귀비의 끝없는 간교함은 마음에 걸리지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판단을 마친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후사 이야기가 나오자 연주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직 황자 중 어느 누구도 황제에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아이를 손주로 안겨 준 일이 없었다. 그러니 정엽을 앞지르기 위해 과부를 측실로 들인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만일 내 아이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상황이 달라져 있었을까. 아이가 반음양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언젠가 나의 바람대로 귀엽고 씩씩한 사내아이였더라면…….

‘정엽이 또 내게 화를 내겠구나.’

막연한 생각 끝에 냉랭한 정엽의 얼굴을 떠올린 연주가 고개를 떨궜다. 애당초 정엽을 만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지만, 당분간은 더욱 주의 깊게 그를 피해 다니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에 잠긴 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후가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자식을 여럿 낳은 과부를 들인다고 하루아침에 황손이 점지될 리는 없지 않겠느냐. 게다가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천륜인데, 천륜이 그렇게 쉽게 맺어질 리도 없고.”

“…….”

“아무리 헌왕의 자식이라고 해도, 과부인 측실이 낳은 서자와, 정실인 왕비가 낳은 적자의 격차는 결코 줄일 수 없을 것이다. 또 측실이 낳은 아이를 왕비에게 내준다 한들 영영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니라.”

“황후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연주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황후의 의견에 동조했다. 인자한 표정을 짓던 황후는 밝은 어조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래. 하면 우린 곧 다가올 원소절이나 즐겁게 보내자꾸나. 좀 전에 명절 연회에 장미 탕원을 곁들이자고 하였지?”

“예, 마마.”

“장미 탕원이라니. 나는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어 궁금하구나. 연회석에 올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먹어 보자꾸나.”

고작 탕원 정도로 풀어질 상황은 아니었으나, 저를 위해 애쓰는 황후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연주는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상궁, 주방에 가서 장미 탕원을 만들어 올리라고 해라.”

“예, 황후마마.”

황후의 명을 받은 허 상궁이 물러나고, 황후궁에는 다시 연주와 황후 두 사람만 남았다. 연주는 여전히 제 손 위에 겹쳐진 황후의 따스한 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그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사람들은 과거의 인연을 놓지 못하고 황후와 공주 주변을 맴도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이들뿐이었다.

* * *

원소절과 우수가 차례로 지나고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마차를 타고 외출한 연주가 상점이 모인 거리로 향했다. 한 해 동안 사용할 종이에 향을 입히기 위한 향료를 사고, 오랫동안 돌아보지 않던 조향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여긴 늘 활기차구나.”

“네, 거리 곳곳이 종이꽃으로 꾸며진 걸 보니 더욱 봄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아요.”

“나와서 좋으니?”

종실 왕공과 대귀족들의 저택이 모여 있는 정자가(丁字街)와 다르게, 시끌벅적 활기 넘치는 풍경을 차창 틈으로 구경하던 연주가 곁을 돌아보았다. 함께 나온 어린 시녀는 연주보다 더 들뜬 얼굴로 해맑게 대답했다.

“네, 좋아요. 예전엔 다른 아주머니들하고 같이 저자에 나왔거든요. 이렇게 혼자서 마마를 모시고 저자에 나와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서요.”

“그렇구나.”

“한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네요. 마차를 타고서는 인파를 뚫기가 훨씬 어려울 것 같은데. 차라리 마차에서 내려 조금 걷지 않으시겠어요?”

시녀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둘러보다가 기대에 찬 눈망울로 연주에게 물었다. 마침 마차 안이 비좁게 느껴지던 참이라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우와! 그럼 우리 가는 길에 다른 상점도 구경해요!”

“알았으니 나를 좀 부축해 다오.”

“네, 마마!”

마차를 세우고 시녀의 부축을 받아 내려선 연주가 주변을 살폈다. 마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군방원(群芳園)이 어디 있는지만 자네가 제대로 알려 주면 되지 않겠는가?”

“마마께서도 참……. 군방원은 이 큰길을 쭉 따라가시면 나옵니다. 조양에서 가장 큰 향료 가게이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반 시진 뒤에 군방원으로 나를 데리러 오게.”

“예, 알겠습니다.”

연주는 마부에게 당부한 뒤 시녀와 가볍게 저자 구경을 나섰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떡 냄새에 이끌려 좌판으로 향했다.

“이건 계화떡이로구나. 아직 계화가 피지도 않았는데 계화떡을 파는가?”

“예, 작년에 계화를 따서 일부러 꿀에 재워 보관한 걸로 만든 것입죠. 향긋하고 달콤한 맛이 아주 일품입니다요.”

“그래? 그럼 하나씩 주게.”

주인에게서 꼬치에 끼운 계화떡 한 조각을 받아 든 연주는 시녀가 값을 지불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 손에는 떡을, 한 손에는 돈이 든 주머니를 쥔 시녀는 서둘러 소지품을 정리하지 못해 낑낑댔다. 뒤늦게 곁이 허전한 것을 감지한 연주가 돌아섰다.

“저런, 떡은 내가 들 테니 어서 주머니부터 정리하거라.”

“예? 아니에요. 이 정도는 소인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주인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주머니를 대충 동여맨 시녀가 해맑게 웃으며 연주에게 다가섰다. 사람이 많아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일행을 놓치기에 십상이었다.

“어마! 죄송합니다! 군주마마, 좀 천천히 가세요!”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에, 바삐 연주의 걸음을 따라잡던 시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시녀의 외침에도 연주는 한가롭게 떡을 베어 물며 비단과 옥기,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 차례로 들렀다.

“아휴, 힘들어. 구경은커녕 마마의 뒤꽁무니만 찾느라고 혼났네요. 벌써 향옥(香玉)까지 들렀다 나오신 거예요? 아쉬워라!”

뒤늦게 연주를 따라온 시녀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손님으로 가득 찬 상점 안을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상급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만 취급하는 향옥은 여인이라면 누구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별세계였다.

“나중에 다시 오자꾸나. 대신 저기 군방원이 코앞이잖니.”

“히히, 하긴 그렇지요. 군방원도 향옥만큼 구경할 거리가 많거든요.”

“자, 하면 가 보자꾸나.”

“네,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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