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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51화 (51/161)

51화.

그도 그럴 것이 헌왕은 황제의 소생 중 유일하게 황실의 돌림자와는 무관한 이름을 썼다. 그 탓에 헌왕은 황자 중 가장 큰 총애를 받으면서도 늘 불안에 시달렸다.

“미안하구나.”

헌왕은 ‘기(器)’라는 자신의 이름이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는 자의 표식이라고 여겼다.

그릇은 내용물을 담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담을 것이 없으면 주인의 마음에 들어 장식장 한 칸을 차지할 수야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찬장에 처박혀 영원히 쓰임 받을 기회를 잃는 게 그릇의 운명이었다.

만일 황제가 자신에게 온전하지 않은 이름을 준 이유가 있다면 나름의 표식을 남기기 위해서일 터. 헌왕은 그게 황제가 천한 무희에게서 얻은 아들, 혹은 제왕 체면에 하룻밤 실수를 저질러 얻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표식이라고 여겼다.

“어찌 이것이 어마마마의 탓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무어라 더 말하려던 헌왕이 말끝을 흐렸다.

“소자가 실언했습니다.”

내 어머니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저 연회에 흥을 돋우러 나갔다가 황제를 만나 시침을 든 것뿐인 것을.

헌왕은 모친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어미가 무능하여 연왕의 친왕 책봉도 막지 못하고 연왕과 평해왕부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지도 못했으니 어쩌겠느냐.”

“그래도 평해왕부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데는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평해왕부의 명성이 어디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더냐. 나는 이번 일로 최소한 승설군주를 재혼시켜 훗날 연왕과 엮일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싶었느니라. 한데 그 계집이 미치기라도 한 것인지…….”

함량궁에서 또박또박 황제에게 대들며 저를 압박하던 연주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눈이 세모꼴로 변한 곽 귀비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군주가 재혼에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오히려 앞으로도 재혼 얘기는 꿈도 못 꾸게 생겼으니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모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헌왕은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재혼 생각이 없는 게 과연 군주 하나뿐일까 하는 게 그것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전장을 전전하는 것 외에 어떤 일에도 무관심한 소정엽이 전처에 관한 일이라면 무리수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그러고 보니 연왕부에서 귀공자들과 내게 크게 망신을 준 이유도 다 그 계집 때문이었지…….’

승설군주는 사내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보석. 게다가 천하의 소정엽이 아끼던 보석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헌왕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마마마께선 승설군주의 재혼 상대로 누구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너를 지지하는 공신가 자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건 왜?”

“어마마마, 승설군주의 명성에 흠집이 나긴 했지만 세상 어떤 보석보다 진귀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 승설군주 같은 여인을 남에게 거저 주려 하십니까?”

“하면 네 말은……?”

“남에게 주기 아까운 물건은 영원히 감춰 두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가지는 게 속 편한 법입니다. 무엇보다 한때 종실의 아내였다는 체면과 자존심이 있는데 승설군주가 한낱 공신가 자제와의 재혼을 반기겠습니까?”

아들의 말을 들은 곽 귀비가 무릎을 쳤다. 지금까지 단순히 승설군주의 성미가 사나워 모든 일이 어그러졌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다른 속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이제 보니 그 계집과 어울리는 배필은 따로 있었구나. 아무렴, 군주를 얻는 자가 평해왕부의 세력을 얻는 것인데, 공신가 자제 따위에게 넘겨줄 수야 없지!”

곽 귀비가 눈을 빛내며 아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헌왕은 이제야 제 말뜻을 알아듣고 머리를 굴리는 모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묘안이 있느냐?”

“조금 더 생각은 해 봐야겠지만, 당장은 군주를 우리 손에 넣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래. 어떤 일이든 명분이 중한 법이지.”

“소자는 어머니만 믿겠습니다.”

“그래, 이 어미가 판을 만들어 볼 테니 너는 염려 말고 기다리거라.”

마음이 급해진 곽 귀비는 식은 차를 쭈욱 들이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친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 진 헌왕의 관옥에는 뱀처럼 음흉한 미소가 넘실댔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원소절을 앞두고 연주가 덕교궁을 찾았다. 황실 연회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황후를 돕기 위해서였다. 황후는 연주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번 연회에서 황실 무희들은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대신 ‘남풍가(南風歌)’에 맞춰 춤을 추도록 하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또 올해 궁중에 다는 등은 백낙천의 ‘춘풍(春風)’을 주제로 만든 화등(花燈)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이전부터 남다른 창의력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연주였다. 황후는 연주가 어떤 의견을 개진하든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연회상에 올릴 음식과 공연, 그리고 연회장 장식이 눈 깜짝할 새에 결정됐다. 오랜만에 황후와 즐겁게 시간을 보낸 연주는 열띤 논의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사이 궁인들이 먹음직스러운 다과를 내와 수고한 연주를 위로했다. 뒤늦게 협탁 위에 올라온 장미 과자를 확인한 연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황후마마, 올해 원소절 탕원(湯圓)에는 무엇을 넣어 빚도록 하셨는지요?”

“평소처럼 설탕과 참깨, 대추를 넣어 빚으라고 했느니라. 어찌 묻느냐?”

“남해 지역과 가까운 전명성(全明省)에서는 장미꽃을 넣은 탕원을 만들어 먹는다고 들었사옵니다. 마침 세자부에 소녀가 작년 공주마마와 함께 만든 장미청이 있사오니 이번 원소절엔 장미 탕원을 더해 보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장미청을 넣은 탕원이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후가 선한 얼굴로 응수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올 명절은 너와 함께 상의하니 일이 착착 진행되는구나. 돌아가신 선황후께서 왜 중요한 연회마다 너를 부르셨는지 알 것 같다.”

“과찬이시옵니다.”

“과찬이라니. 겸손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이니라.”

황후의 칭찬에 몸 둘 바 몰라 하던 연주가 대답 대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황후궁의 분위기는 난데없는 불청객의 방문으로 삽시간에 깨졌다.

“황후마마, 곽 귀비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해라.”

궁녀의 전언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거둔 황후가 의복을 정제한 뒤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기다림 끝에 입실을 허락받은 곽 귀비는 곧장 내실로 들어와 황후에게 나붓이 예를 갖췄다.

“황후마마, 문안드리옵니다.”

“어서 오게.”

황후와 곽 귀비 사이에 짧은 인사가 끝나자,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곽 귀비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귀비마마를 뵙습니다.”

“어머나, 군주께서도 와 계셨군요.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하기야 영항…….”

아무렇지 않게 연주가 영항에 갇혔던 사실을 언급하려던 곽 귀비가 황후의 매서운 시선을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헛기침하고는 조용히 궁녀가 내준 의자에 앉았다.

“그럼 말씀 나누시옵소서.”

한 번은 황후의 제지로 넘어갔지만, 언제 또 곽 귀비의 방정맞은 혀끝이 저를 찔러 댈지 모를 일이었다. 곽 귀비와 한자리에 있기 거북해진 연주가 이만 자리를 뜨기 위해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이를 본 곽 귀비가 연주에게 말했다.

“본 궁이 불편한가요? 나는 오랜만에 군주를 만나 무척 반가운데. 그러지 말고 앉아요.”

“그래, 곽 귀비의 말이 옳다. 너무 어렵게 여기지 말고 앉도록 해라.”

황후의 만류는 본인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어렵지 않게 황후의 뜻을 파악한 연주가 조심스럽게 도로 자리에 앉았다. 황후는 귀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면 곽 귀비, 이제 말해 보게. 문안은 핑계일 테고 무슨 일로 덕교궁을 찾았는가?”

“신첩, 황후마마께 올릴 청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사옵니다.”

“청이라?”

천하의 곽 귀비가 황후를 상대로 부탁할 일은 많지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이든, 하고 싶은 일이든 황제를 통하면 불가능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곽 귀비가 황후를 상대로 이상하리만치 몸을 낮추고 있었다. 낯선 상황을 맞닥뜨린 황후는 당연히 곽 귀비를 미심쩍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어디 말해 보게.”

“다름이 아니라……, 올봄쯤 헌왕에게 여인을 하나 붙여 줄 생각인데, 황후마마께서는 부디 이 여인에게 어떠한 흠이 있어도 눈감아 주시옵소서.”

흠이 있어도 눈감아 달라? 대체 어떤 여인을 데려올 생각이기에?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황후가 연주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되물었다.

“그 말인즉, 헌왕에게 흠 있는 여인을 붙여 주겠다는 뜻인가? 어찌하여?”

황후의 반문에 곽 귀비는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갑자기 울컥하며 눈가를 소매로 찍어 냈다. 그러고는 준비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최근 헌왕이 황제 폐하께 문안도 들지 못할 만큼 병이 깊지 않았사옵니까? 실력이 뛰어난 태의가 여러 날 애써도 차도가 없었지요.”

“그래, 들어서 알고 있네.”

“하여 신첩이 갑갑한 마음에 출궁하여 유명한 법사에게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물었더니…….”

대체 이 간교한 계집이 또 무슨 말장난을 늘어놓으려고 이리 사설이 긴가? 이쯤에서 곽 귀비가 단순히 헌왕의 병환 때문에 덕교궁을 찾은 것이 아님을 눈치챈 황후가 차분하게 응수했다.

“그랬더니?”

“우리 헌왕은 양의 기운이 왕성한데 음의 기운은 너무 부족해서, 반드시 대가 센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어야 무병장수한다고 하지 뭡니까.”

“대가 센 여인이라 함은…….”

“일부종사치 못하고 남편을 여러 번 바꾸는 여인이라면 헌왕의 부족한 기운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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