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주는 침상 안쪽으로 돌아누워 숨을 죽였다. 그럼에도 신은 연주가 이미 깨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예나 지금이나 작고 가녀린 누이의 어깨를 보노라면, 신은 알록달록한 꼬까옷을 입고 봄 나비처럼 팔랑팔랑 제 뒤를 쫓아다니던 어린 시절의 연주가 떠올랐다.
귀찮으니 따라오지 말라고 심통을 부려도 그저 해맑은 얼굴로 헤실거리던 예쁘고 귀여운 꼬마 숙녀.
저를 떼어 놓을 궁리로 일부러 험한 길만 골라 다니는 오라비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까져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괜찮다고 웃어 보일 만큼 천성이 순하고 다정했던 아이.
“어제 일은, 오라비가 미안했다.”
한때는 신도 누이가 바보같이 착하기만 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 연주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누이가 아무리 예쁘게 웃어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웃는 게 어여쁘면 뭘 하나. 제 속은 짓무르고 엉망이 되어 가는데.
신은 오래전부터 연주가 평생 행복하기만 바랐다. 그리고 연주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는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네가 해광성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말리지 않으마.”
그러니 신이라고 왜 정엽에게 따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혼한 연주가 차디찬 눈길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날, 신은 그길로 정엽에게 달려가 그의 잘난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그 순한 아이가 만신창이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질 지경이 되었는데 너는 대체 무얼 한 거냐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연주가 깨어나기도 전에 정엽은 다시 북방으로 떠나야 했다. 정신을 차린 연주는 그 소식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주야, 이 오라비는 지금 당장 네가 해광성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
신은 윤의 말처럼 아파하는 누이를 방관한 게 아니었다. 그저 누이의 마음에 난 상처가 아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시간이 흘러 상처에 새살이 차오르면 연주가 모든 걸 훌훌 털고 딛고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다림보다 눈앞의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네가 언제까지 연친왕을 피해 다니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일뿐더러, 연친왕을 피한다고 해서 네 아픔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질 않으냐.”
“…….”
“상처는 외면할수록 깊어지는 법이고, 고통에 취해 두서없이 걷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조차 잊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부터 길을 잃었을 땐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앉아 신발을 고쳐 신어 보라고들 하는 게지.”
“……오라버니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돌아누운 채 오라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연주가 조곤조곤 신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어진 신은 여전히 작고 마른 연주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다시 연주와 시선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조금 늦어도 목적지에 제대로 닿을 수만 있다면 잠시 눈비를 맞는 것이 대수겠느냐. 고민은 길어도 괜찮다. 윤이 녀석 말처럼 오라비가 힘이 없어 네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모두 막아 줄 순 없지만, 네가 고민을 끝낼 때까지 내가 네 곁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려 주마.”
“오라버니…….”
“이 오라비는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마음 편히 웃고, 더는 근심 없이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훗날 네가 갈 길을 정하면 그때 오라비가 너를 보내 주마. 그러니 그때까지는 함께 이 자리를 지키며 충분히 고민해 보자꾸나. 응?”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오라비의 너른 품을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고마울 것도 많다.”
품에 안긴 연주를 토닥이던 신이 가볍게 웃으며 화답했다. 연주는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 품에서 자신의 앞날에 대한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해 몸과 마음의 고통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기로. 처음부터 차분하게 다시 하나하나 딛고 일어서겠다고 말이다.
* * *
연주는 다음 날 곧장 덕교궁에 입궁하여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녀가 미욱하여 마마께 걱정을 끼쳤사옵니다.”
“괜찮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다면 소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조만간 다시 입궁하여 공주를 가르치도록 하거라.”
“감읍하옵니다, 황후마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나자 금세 새해가 밝았다. 겨우내 황궁을 시끌벅적하게 달구었던 소동들은 떠들썩한 춘절 분위기에 휩쓸려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혔다.
그렇게 춘절부터 원소절에 이르기까지 1년 중 가장 길고 흥겨운 명절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제의 총비인 곽 귀비가 황궁을 빠져나와 헌왕부를 찾았다.
* * *
“내 아드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귀, 귀비마마. 갑자기 무슨 일로 왕부를 찾으셨나이까?”
갑작스러운 곽 귀비의 방문에 당황한 헌왕부 궁인들이 놀란 비둘기처럼 푸드덕댔다. 태감이건 궁녀건, 나이가 많건 적건 하나같이 허둥지둥. 절도나 침착함이라곤 없는 어수선한 왕부를 마주한 곽 귀비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무슨 일이냐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냐?”
“그것이 아니오라…….”
“됐다. 어서 가서 내 아드님께 어미가 왔노라 고하거라.”
“예, 마마.”
아랫것들의 품격은 곧 그들을 부리는 주인의 품격이거늘.
곽 귀비는 어린 궁녀의 방정맞은 품행을 보고 혀를 찼다. 하지만 왕부의 모든 궁인이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뒤에도 귀비는 계속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마땅히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모인 내가 어렵게 출궁하여 여기까지 왔으면 응당 며느리이자 왕부의 안주인인 왕비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이해야 하거늘.”
이 계집은 어찌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게야?
헌왕의 정비인 헌왕비에게까지 불똥이 튈 조짐을 보이자 왕부의 분위기는 더욱 흉흉하게 변했다. 그러나 오늘 일이 아니라도 명문가 출신인 헌왕비는 평소에도 무희 출신인 곽 귀비를 업신여기며 은근히 예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저 아랫것들만 상전들 싸움에 휘말려 고생이란 뜻이었다.
“헌왕의 몸이 편치 않다고 해서 내가 친히 나와 보았건만 왕비는 어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냐?”
결국 곽 귀비의 언성이 날카로워졌다. 자라목이 된 궁녀 하나가 머뭇머뭇 앞으로 나섰다.
“헌왕비께서는 지금 출타 중이시옵니다.”
“지금 뭐라 했느냐?”
“헌왕비께서는 출타 중…….”
“지금 혼인한 여인이 병중인 부군을 내팽개치고 나들이라도 떠났다 이 말이냐?”
나들이라니. 나들이의 ‘나’자도 꺼낸 적 없는 궁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평소 며느리를 마뜩잖게 여기는 곽 귀비는 며느리가 자신을 욕보이려 오늘도 일부러 일을 벌인 거라고 확신했다.
“귀비마마.”
그때, 평소 헌왕을 배행하는 태감이 나타나 귀비 앞에 허리를 숙였다.
“너는 헌왕을 수발드는 태감이 아니냐?”
“전하께서 귀비마마께서 나오신 걸 알고 소인에게 마중을 명하셨사옵니다. 바람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듭시지요. 헌왕 전하의 심려가 크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아들이 저를 걱정한다는 전언 한마디에 곽 귀비의 마음에 쌓였던 분노가 눈처럼 녹아내렸다. 지체 없이 사랑채로 넘어간 곽 귀비는 아들의 처소인 청야당(淸野堂)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응접실에는 병중이라던 헌왕이 관옥 같은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 손수 차를 끓이고 있었다.
“어머니, 오셨사옵니까?”
“아니, 이것 참…….”
아들이 멀쩡하게 차를 끓이는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곽 귀비가 이마를 짚었다. 물론 흠 없이 아름다운 아들의 모습은 맑고 고요한 들판이라는 처소의 이름 뜻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기는 했다.
‘그래도 어미까지 감쪽같이 속일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제 배로 열 달을 품어 낳은 아들이긴 하지만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다. 곽 귀비는 금세 서운한 표정으로 아들과 마주 앉았다. 그러나 헌왕은 태연한 얼굴로 곽 귀비에게 갓 끓인 차 한 잔을 건넸다.
“병은 다 나은 것이냐?”
어쨌거나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아들의 모습에 안도한 곽 귀비가 입을 열었다. 헌왕은 연왕이 친왕에 책봉된 뒤 몸이 편치 않다며 어전에 마땅히 들어야 할 문안도 거르고 명절도 잊은 채 지금껏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육안차(六安茶)입니다.”
헌왕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육안차는 황제가 각별하게 아끼는 사람들에게만 하사하는 명차였다. 이를 익히 아는 곽 귀비는 농후한 차향을 맡으며 뿌듯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차를 내리신 것을 보니 너를 많이 걱정하시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헌왕은 무심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가 울어야만 사탕을 물려 주는 분이시니까요.”
“응?”
기분 좋게 차를 음미하던 곽 귀비는 어쩐지 뼈가 느껴지는 아들의 말에 생각 많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러 황자 중 굄을 받는 건 너 하나뿐이지 않으냐.”
“압니다. 하나 대체 소자를 향한 총애가 얼마나 깊기에 친왕 작위와 신의군 통솔권 대신 명차를 내려 주시는지…….”
자조 섞인 헌왕의 말에 곽 귀비의 표정이 흐려졌다. 정엽이 친왕에 책봉되자마자 신의군까지 도맡은 때, 아직 이렇다 할 조정의 중임을 맡지 못한 헌왕으로선 박탈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곽 귀비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아들을 다독였다.
“기야, 너무…….”
“어머니, 소자가 그 이름을 싫어한다는 걸 어머니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달칵-.
곽 귀비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인 헌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순간에 죄인이 된 곽 귀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