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한편, 연왕부에서 돌아온 연주는 세자부로 돌아오자마자 형제들을 위한 만찬을 다시 준비했다. 며칠 전과 똑같은 요리지만 정성스럽게 상차림을 마친 연주는 이내 초조한 얼굴로 문간을 서성였다.
“마마, 왕세자 저하께서 왕자마마를 직접 마중 나가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두 분 다 금방 돌아오실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옵소서.”
연주가 계속 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불안해하자, 이를 지켜보던 시녀가 차분히 그녀를 달랬다.
“그만 좀 쉬시옵소서. 음식은 소인이 챙기겠사옵니다.”
결국 시녀에게 떠밀려 억지로 창가에 앉은 연주는 새로 끓인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마, 차가 입에 맞으시옵니까?”
“그래, 고맙구나.”
하지만 연주가 찻잔을 다 비우기도 전, 문밖에서 왕세자와 왕자의 귀환을 알리는 노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 저하께서 돌아오셨네. 왕자마마도 함께 돌아오셨어.”
아마도 안에 있는 연주가 놀랄까 봐 시녀에게만 살짝 알린 모양이지만,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노복이 하는 말을 전부 다 들은 연주는 형제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라버니! 윤아!”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며,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막냇동생과 오라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은 괜찮니? 종정사에서 고생이 많았어.”
그러나 걱정 반, 기쁨 반으로 동생을 맞이한 연주와 달리, 윤은 심상치 않은 얼굴로 대뜸 연주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누님, 저를 위해 소정엽에게 달려가 빈 게 사실이에요?”
“윤아……?”
“대답하세요. 사실이냐고요!”
고생 끝에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만난 윤은 무서운 얼굴로 연주를 다그쳤다. 난생처음 보는 아우의 험악한 표정에 놀란 연주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순한 눈만 깜빡이던 연주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군요.”
연주의 침묵이 곧 긍정임을 확신한 윤은 눈을 질끈 감으며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윤아, 실은 그게…….”
“대체 왜 그랬어요. 왜! 왜!”
윤은 연주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 가며 언성을 높였다. 화를 이기지 못한 듯 한참 땅바닥에 발을 구르며 거칠게 분노를 표출하던 윤은, 이내 종정사에서 쌓인 분노를 마구잡이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누님을 위해 그 자식에게 복수하려고 그랬던 거라고요. 그런데 왜 누님이 그 자식을 찾아가 빌어요? 그럼 내가 뭐가 되는데!”
“…….”
“내가 어찌 되든 그냥 내버려 뒀어야죠. 내가 이만한 일도 혼자서 해결 못 할까 봐서요? 최소한 나를 믿고 기다려 줬어야죠.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어요?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
“윤아, 나는…….”
“설마 아직도 그 자식한테 미련이라도 있는 거예요?”
미련?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을 들은 연주의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누님은 예전부터 그 자식 일이라면 정신을 못 차렸잖아요. 내가 그 자식은 나쁜 놈이라고, 혼인할 여인이 보낸 편지에 답장 한번 보내지 않는 사내는 절대로 누님의 버팀목이 될 수 없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누님은 그래도 그 자식이 좋다고 했잖아!”
“…….”
“내 핑계로 그 자식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달려갔던 거예요? 그런 거예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연주는 윤의 물음에 곧장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목이 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쁜 놈에게 바보같이 마음을 주었다는 윤의 비난이 오늘따라 날카롭게 들려서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이혼하고 두 해가 지나서야 왜 정엽이 단 한 번도 서신에 답장하지 않았는지 알아차린 자신이 바보 같아서.
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헛된 인생을 바친 자신이 정말이지 부끄럽고 초라해 견딜 수가 없어서.
하지만 오늘 연주가 무슨 일을 겪고, 또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윤은 말없이 눈물만 떨구는 누이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정엽 때문에 지금껏 무수한 고초를 겪고도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니!’
이제 더는 누이를 그 망할 소정엽이 있는 수도에 함께 남겨 둘 수 없었다. 당장 수도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윤이 연주의 손목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당장 가요! 나랑 해광성으로 돌아가!”
과거에는 윤이 그저 작고 귀여운 막냇동생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연주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장정이었다. 더 이상 아우의 힘을 이길 수 없게 된 연주는 속절없이 문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형님.”
그때, 바로 옆에서 누이와 아우의 모습을 관망하던 채신이 연주를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윤의 손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이 손 놓거라.”
신에게 팔목을 붙잡힌 윤이 난생처음 보는 형의 냉랭한 얼굴과, 금방이라도 제 팔을 부러뜨릴 것 같은 엄청난 악력에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윤의 뇌리를 스친 것은 형이 아주 오랫동안 소정엽과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이가 혼인하기 전부터 이혼한 지금까지도.
‘그 무도한 놈과 어울려 다니더니 형님께서도 변하셨구나.’
더는 제가 알던 형이 아니라는 생각에 울컥한 윤이 이를 악문 채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형님이나 놓으십시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형님께서는 누님과 가까이 계시면서도 누님을 지켜 주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제 앞을 막아서십니까?”
“너 이놈……!”
윤의 거침없는 언행에 말문이 막힌 신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더 기세등등해진 윤은 실컷 이기죽거렸다.
“형님께서 아직도 그 자식과 교우하고 지내신다는 것을 압니다. 누님이 이혼까지 하고 돌아왔을 때 제대로 따져 본 적이나 있으십니까? 왜 내 누이를 못살게 굴어 제 손으로 부부의 인연을 끊게 했는지! 왜 그토록 누님께 모질었는지 물은 적이 있느냔 말입니다!”
“…….”
“누님이 영항에서 죽도록 고생할 때 부왕께 편지를 띄운 것 말고 형님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실은 누님이 부끄럽고 창피했던 거죠?”
“…….”
“필부에게 시집을 가도 이런 일이 있으면 남 보기 부끄러운데. 하물며 왕비씩이나 되어서 애를 잃은 것도 모자라 남남이 되겠다니 괘씸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점점 도를 더해 가는 윤의 비난에 힘주어 주먹을 쥔 신이 이를 악물었다. 윤은 아직 어리고, 마음 여린 누이도 지켜보고 있으니 싸움은 최대한 피하는 게 옳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네 누이가 부끄럽고 창피하다니.”
“왜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형님은 누님을 지킬 생각이 없으신 겁니다. 그러니 이 사달이 났지요! 나만큼 누이를 걱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여기까지 들은 신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창피하다니. 신이 생각하기에 진짜 부끄럽고 창피한 건 지금 윤의 행동이었다.
퍼억-! 우당탕!
신은 한 손으로 윤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의 얼굴을 향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요란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주변 공기가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얼굴을 얻어맞은 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가, 입가에 피가 묻어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금세 몸을 일으킨 그는 제 형을 향해 들소처럼 달려들어 똑같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만……!”
형제는 서로를 상처 내기 위해 살벌하게 주먹을 치켜들었다. 우격다짐이 시작되려는 찰나, 연주의 애처로운 외침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연주의 절규에 놀란 두 형제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마음이 쓰라린 건 바로 연주였다. 그 우애 좋던 형제가 저 하나 때문에 주먹다짐하는 상황도 충격적인데, 졸지에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린 제 처지는 더더욱 한심하고 초라해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다 그만하세요. 앞으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누, 누님!”
연주의 선포에 당황한 윤이 곧장 형의 멱살을 놓고 누이의 손을 잡았다. 연주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단호하게 윤의 손길을 밀어냈다.
“나는 오늘 해광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네 손에 끌려가는 거라면 더더욱.”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찌 이러십니까!”
처음 보는 누이의 냉정한 태도에 당황한 윤이 다급히 사정했다. 하지만 연주는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고는 또다시 엉망이 되어 버린 만찬석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떴다. 도망치듯 별당으로 돌아온 연주는 그대로 침상에 쓰러져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연주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잠에서 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침실의 천장을 들여다보던 연주는 문득, 이혼을 선언하고 하염없이 눈길을 걷다가 쓰러져 세자부에서 눈을 뜬 날을 떠올렸다.
‘벌써 꽉 찬 두 해가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아직도 아이를 잃고 남편에게 상처 입은 그날에 매여 있구나.’
지금껏 마음 아파하고, 외면하고, 딛고 일어나 보려 애썼던 모든 노력은 다 무엇이었나. 흘러온 시간을 돌이켜 보니 허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는 그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싶지 않아 이혼을 택했는데. 이제야 수도로 돌아온 정엽과 아무렇지 않게 마주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내 잘못인 건가? 꼭 길을 잃은 것만 같아…….’
연주는 불과 얼마 전까지 윤과 함께 해광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광성으로 돌아가면 저를 무작정 싸고도는 게 아우 하나뿐일 리 없었다. 부모님과 다시 마주 앉는다고 한들, 마음이 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안식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언젠가 영항 상궁이 제게 퍼붓던 악담처럼, 어딜 가도 절망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영항에서 그랬듯 끝내는 모진 매질과 비난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게 저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연주가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시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담 이대로 다시 우울에 잠겨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자꾸만 되풀이되는 의문에 질려 생각을 멈춘 연주가 베갯잇에 머리를 묻었다.
“연주야, 오라비다.”
그때, 별당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신의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