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연주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한참을 울었다. 읽지도 않은 편지들을 대체 왜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절망의 수렁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안간힘에 불과했다.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여전히 내 흔적으로 가득 찬 연왕부를 소정엽이 꺼리지 않는 건 그만큼 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인걸!’
연주는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을 끌어안고 시든 꽃송이처럼 웅크렸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설움을 토해 냈을까. 흘릴 눈물조차 바닥난 연주가 인기척을 감지하고 어질어질한 이마를 들었다.
“군주마마.”
안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에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소렴자가 머뭇머뭇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연주는 붉게 부어오른 눈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평소 맑디맑던 연주의 음성이 꽉 잠겨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소렴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럽게 말문을 떼었다.
“전하께서 오늘 중으로 왕자께서 종정사에서 나오실 것이니 이만 세자부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
“마마?”
소렴자의 전언을 듣고 나니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연주가 불안해하는 소렴자를 향해 차분히 화답했다.
“전해 주어 고맙네. 나는 이제 그만 세자부로 돌아갈 테니 마차를 준비해 주게.”
“예, 마마.”
일이 뭔가 잘못된 걸까? 소렴자를 안으로 들여보낸 후 서재 밖에서 노심초사하던 양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마, 어찌 눈물을 보이시옵니까.”
“내 아우가 드디어 종정사에서 나온다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나는군.”
“마마…….”
양해는 연주가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일까. 왜 일이 이렇게까지 돼 버린 걸까.
자신에게 유용하거나 의미 깊은 물건이 아니면 옆에 오래 두는 법이 없는 정엽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껏 연주의 서신을 귀한 상자에 모아 따로 보관했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굴어도 실은 누구보다 연주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양해는 정엽의 성정을 잘 아는 연주라면 함 안에 든 서신을 보고 조금이나마 서운함을 내려놓을 줄 알았다. 하지만 빨갛다 못해 퉁퉁 부은 연주의 눈을 보니 아무래도 일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았다.
“마마, 하오면 이 상자는 어찌 처리할까요?”
“나는 전하의 명으로 곧장 왕부를 떠나야 하네. 자네가 나 대신 이것들을 좀 정리해 주게.”
“예? 예, 알겠사옵니다. 그럼 깨진 상자는 소인이 상공국으로 가져가 말끔히 고쳐 놓겠…….”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전하께서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신 물건이 아닌가.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
말을 마친 연주는 곧장 경수당을 나섰다. 당황한 양해는 곧장 연주의 뒤를 쫓았다.
“전하를 뵙고 가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용건이 있으셔서 오셨던 것으로 아옵니다만!”
양해는 어떻게든 연주를 붙잡기 위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뒤늦게 정엽에게 안식향을 선물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상기한 연주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오다 연주에게 부딪칠 뻔한 양해가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제는 정엽에게 안식향을 선물할 이유가 없었다. 향이 담긴 상자를 깜빡하고 챙겨 나오진 못했지만, 주변에 무심한 정엽이라면 자세히 살펴볼 리도 없으니 자신이 향을 만들어 온 사실도 알 리 없었다.
“미안하네. 실은 용건이 없었네.”
연주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연왕부를 떠났다.
* * *
그날 저녁, 아무것도 모르는 정엽이 해가 진 뒤에야 경수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불을 환히 밝힌 처소는 오늘따라 눈과 얼음뿐인 혹한의 땅보다 춥고 황량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날 같군.’
어딘지 낯설지 않은 기분에 옛 기억을 더듬던 정엽은 2년 전 섣달그믐을 떠올렸다. 연주가 멋대로 이혼을 청하고 황제가 너무나 쉽게 허락한 그날.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고 경수당으로 돌아온 정엽의 마음이 딱 이렇게 허무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뭐가 이렇게 엉망진창인지.’
그때도 황제는 멋대로 아들의 인생을 휘두르길 좋아했다. 상황을 돌이킬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는 것 또한 같았다. 그러나 정엽은 연회장에서 훌쩍 자취를 감춘 연주가 한 번쯤은 자신을 만나러 올 것으로 여겼다.
그래도 한때는 혼인해 아이까지 가졌던 사이니까. 마지막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하고 헤어지는 게 인간 된 도리니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황제에게 이혼을 청한 걸 비난할 뜻은 없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뒤였고, 그는 단지 연주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연주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제 오라비가 있는 세자부로 떠났다. 연왕부에는 연주가 아끼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무엇도 아쉽지 않다는 듯 부와 영예, 종내에는 사랑마저 내던지고 떠나갔다.
그날 밤, 정엽은 난생처음으로 연주를 기다렸다.
‘너는 이 일방적인 이별을 통해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지만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채연주가 멋대로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황망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잉걸처럼 뜨거운 분노로 변했다. 그러나 다음 날 왕부의 붉은 대문을 두드린 사람은 연주가 아니라 황제가 보낸 사자였다.
‘전하, 황명입니다.’
[국경의 상황이 다급하다. 너는 날이 밝는 즉시 한수로 떠나라.]
오죽하면 황명을 전하러 온 사자조차 그를 불쌍히 여겼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수에서 수도로 돌아온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조차 황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자식인 정엽은 어땠겠는가. 정엽은 불결한 것을 내쫓듯, 서둘러 제게 귀환 명령을 내리는 황제가 피눈물 나도록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사소한 원망조차 역심이 되던 서슬 퍼런 시절, 정엽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홀로 수도를 떠나야만 했다.
‘설마 지금, 이 순간이 그때만큼이나 끔찍하다는 건가?’
연주가 연왕부에 체류했던 시간은 고작 사흘 남짓. 게다가 연주에게 세자부로 떠나라고 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을 마주한 이 순간, 인생 최악의 날을 떠올리다니.
‘정신이 나갔지.’
몸이 고달프지 않으니 느는 게 잡념뿐이라고 자조하던 정엽이 발길을 돌려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젯밤 연주와 함께 지나 왔던 오솔길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 도착한 곳은 유황관이었다. 하지만 연주가 어제저녁 불을 밝혀 줬던 유황관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전각처럼 쓸쓸하고 어두컴컴했다.
“젠장.”
이 시간에 찾는 유황관은 늘 고요했다. 그러나 똑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하루 사이에 다른 감정을 품는 스스로가 황당했다. 정엽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그런들 예전의 연주가 돌아올 리는 없었다.
정엽은 유황관의 문고리를 손에 쥐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길게 심호흡했다. 유황관은 그가 연왕부 안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그런 소중한 공간에 불쾌한 기분을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후우…….”
잠시 뜸을 들이며 경수당에서 생겨난 불편한 감정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정엽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간에서 능숙하게 부싯돌과 여분의 초를 찾아 불을 붙인 그는, 어제의 연주가 그랬듯 유황관 곳곳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둑했던 실내가 밝아지자, 정엽은 책상 앞에 앉아 읽다 만 군보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줄글을 읽어 내리는 그의 시선은 자꾸만 군보 너머로 향했다. 연주가 어제 그에게 빌려 가고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지필묵 때문이었다.
“참 여기저기 많이도 어질러 놨군.”
혀를 차던 정엽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연주에게 내줬던 물건을 묵묵히 정리하다가 다른 종이와 달리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니 화면을 가득 채운 대숲 속 오두막 그림과, 모서리에 적힌 유려한 필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금을 뜯고 긴 휘파람을 분다네.
깊은 숲속엔 아는 이 하나 없지만 밝은 달이 찾아와 나를 비춰 준다네.]
“왕유의 ‘죽리관(竹籬館)’이라…….”
인동초 줄기처럼 아름다운 획으로 얽힌 글씨를 읽어 내린 정엽이 콧방귀를 뀌었다. 유황관이 대숲 안에 들어앉은 전각은 맞지만, 이곳은 엄연히 용무군이 땀 흘리며 훈련하는 연무장이었다. 매일 창칼 부딪치는 소리, 기합 소리, 뜀박질 소리로 시끄러운 이곳이 어떻게 왕유가 시를 지었던 조용한 오두막으로 탈바꿈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연주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당시, 그녀 곁에는 분명 정엽이 한 공간에서 정무를 보고 있었다. 뿐인가. 연주가 유황관에서 시간을 보낸 때는 달이 빛나는 밤이 아니라 해가 중천에 걸린 한낮이었다.
“소란스러운 군영에서 홀로 풍류를 찾고 벌건 대낮에 달빛을 떠올리다니.”
홀로 고고한 것이 지극히 채연주스러운 감성이었다. 하지만 채연주는 예전부터 그랬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왜 채연주가 변했다는 생각이 든 걸까.
더는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지 않아서? 아니면 더 이상 나를 위해 먼 길을 달려오지도, 애달파하지도 않아서?
철없는 꼬맹이처럼 마음속에 삐딱한 심술이 자랐다. 내키는 대로 서화를 구겨 던졌던 정엽이 한숨과 함께 내버린 것을 도로 주워 와 천천히 펴기 시작했다.
‘언젠가 채신에게 보여 주며 네 누이가 실은 이렇게나 철부지라고 면박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세상 여자 중 제 누이가 최고인 줄만 아는 녀석이니까.’
실은 그게 다 핑계인 줄도 모르고, 정엽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연주의 서화를 책상 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