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47화 (47/161)

47화.

서재 안에서 전과 다른 게 저 상자 하나뿐이라?

호기심이 인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중하게 상자의 외관을 살폈다. 고급 목재인 자단나무로 만든 상자는 이렇다 할 꾸밈새가 없어 자못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뚜껑과 상자 몸체가 분리되어 있을 뿐, 뚜껑과 몸체 그 자체에는 이음새가 전혀 없었다.

말인즉, 이 상자는 자단나무 목판을 조립해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의 아름다운 색과 나뭇결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수백 년 묵은 나무를 벌목해 뚜껑과 몸체를 각각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외국과의 해상 무역이 활발한 해광성에서 자라며 진귀한 물건을 숱하게 보아 온 연주지만 이런 물건은 과거에 본 적이 없었다. 연주는 상자를 들어 올려 바닥까지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뒤늦게 시선이 닿지 않는 뒤쪽 모서리 하나가 흉하게 깨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귀한 물건이 망가졌는데 수리도 하지 않고 그냥 놓아두다니.”

평소 도자기, 가구, 그림과 같은 예술품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연주였다. 연주는 밀려드는 안타까움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손이 여물지 못한 궁인이 청소를 하다 상자를 떨어뜨린 모양이네…….”

그래도 잘만 고치면 멀쩡할 것 같은데.

고심하던 연주는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조금 더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깨진 모서리 외에 고칠 부분이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마, 차를…….”

그때 차를 끓여 돌아온 양해가 좀 전에 연주가 앉아 있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휴우, 마마, 향경당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사옵니다.”

“뭘 그리 놀라는가. 그보다 양해, 서재를 둘러보다 모서리가 깨진 상자를 하나 발견했네. 알고 있었는가?”

“네? 상자요?”

차를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연주와 대화를 이어 나가던 양해가 책상 위에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연주가 가리키는 상자를 확인했다.

“이 상자는…….”

정엽이 수도로 올라온 뒤 한수성에서 보내온, 연주의 편지가 담겨 있다던 바로 그 상자였다.

긴장한 양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자의 내막을 알 리 없는 연주는 상자를 고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상자 자체가 보기 드문 상품(上品)이니 어떻게든 고치는 것이 좋겠네. 지금 당장 내용물을 비우고 상공국 장인에게 맡겨 깨진 모서리를 금으로 상감하게 하게.”

“예, 하오면 안에 든 물건을 옮기시도록 다른 상자를 가져올까요?”

“그리하게.”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다!

어쩌면 저 편지 상자가 주인 내외 사이에 쌓인 앙금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지도 몰랐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양해가 넙죽 허리를 굽혔다.

“예, 마마. 당장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천천히 하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급해 보이는 양해를 다독여 내보낸 연주가 상자를 비우기 위해 걸쇠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특별한 상자 안에는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서신만이 가득했다.

“웬 서신만 이렇게 많지?”

자세히 보니 대다수가 겉봉도 뜯기지 않은 서신이었다. 내용도 모르는 서신을 이렇게 모아 둘 이유가 있을까? 앞뒤가 맞지 않는 알쏭달쏭한 상황에 연주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보자…….”

평소의 연주였다면 남의 서찰을 살펴보는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편지에서는 어쩐지 익숙한 잔향이 풍겼고, 봉투를 만든 종이의 문양 역시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힌 연주는 가장 위에 놓인 서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연왕 전하께. 승설군주 채연주 배상.]

이 글씨는 내 것인데?

익숙한 필체 앞에서 연주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당황한 연주는 곧장 상자 안에 든 서찰을 일일이 꺼내기 시작했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깨끗해.’

상자에 담긴 서신은 모두 혼인 전 연주가 정엽에게 보낸 것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뜯어지지 않은 겉봉을 하나하나 살피던 연주의 입가에 헛웃음이 맴돌았다. 어느덧 책상 위에는 읽히지 않은 편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실의에 빠진 연주는 이제 마구잡이로 상자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때, 밑바닥에서 감촉이 다른 종이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헤쳐 보니 봉투에 담겨 있지 않은 시전지였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끄집어낸 연주가 안도하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열어 봐도 모르겠지.’

유일하게 봉투가 사라진, 달리 말해 유일하게 확인한 흔적이 남은 서신을 겁 없이 펼친 연주가 단숨에 내용을 읽어 내렸다.

“이건…….”

이것은 정엽이 북녘에서 가장 흔히 볼 얼음꽃 핀 나무와 닮았을 것 같아서 곁에 백매화 나무를 들이고 쓴 편지였다. 정엽과의 혼인이 결정된 후 가장 먼저 쓴 편지이기도 했다.

“뜯어본 서신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놓고 외면해 온 서운한 감정이 하나하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와 정엽에게 미련이 남은 건 아니지만, 막상 방치된 서신을 확인하고 나니 군홧발에 가슴이 짓밟힌 듯 견딜 수 없이 슬퍼졌다.

‘사실 알고 있었는걸.’

연주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사실, 연주는 정엽이 편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매일 정엽에게 성실하게 편지를 띄운 반면, 그는 단 한 번도 회신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혼인 전부터 그토록 무심한 사람이었건만…….’

연주는 정엽의 무소식을 상황 탓으로만 돌렸었다. 하필 그가 이민족의 침략이 잦은 북방에 있어서라고. 편지를 받아 읽어 보기는 해도 미처 답신할 여유가 없을 뿐일 거라고.

그런데 읽어 본 서신이 단 한 통뿐이었다니.

‘처음부터 내 사랑은 소정엽에게 닿은 적이 없었구나.’

진실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이제 보니 정엽은 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한 게 아니었다. 하늘가에 떠 있는 정엽에게 닿아 보겠다며 나 홀로 마음을 조각내 허공에 던지고, 또 던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너질 리 없는 철옹성 밖에서 성벽을 두드리며 홀로 애태우고 가슴을 뜯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행복이라 여겼던 순간들은 모두 착각이고 거짓이었을까?’

혼인하고 함께 지내는 동안 연주는 분명 정엽으로 인해 행복을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 행복이, 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었다니.

책상에 태산처럼 쌓인 서신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연주가 무너지듯 얼굴을 감쌌다. 갑자기 온몸의 피가 밖으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연주는 눈을 감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숨을 골랐다. 파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무던히 애썼다. 하지만 가슴은 하염없이 일렁이고, 머릿속에는 대수롭지 않게 던져두었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이 묘목을 여기에 심자꾸나.’

정엽과 혼례를 올리고 부부끼리 한 침실에서 지내는 동방을 닷새간 치르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마친 날, 연주는 가장 먼저 경수당에 해홍화 한 그루를 심었다.

그때, 연주가 난데없이 꽃나무를 심겠다고 나서자, 경수당 태감들은 상전의 신임을 얻기 위해 곧장 앞뜰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해홍화 묘목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제 키의 반도 되지 않는 묘목을 발견한 정엽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게 뭐지?’

‘해홍화예요.’

‘해홍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꽃나무의 존재가 무척 불쾌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연무장을 향해 멀어지던 정엽의 뒷모습을, 연주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엽은 그때 이미 무언의 신호를 보낸 건지도 몰랐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너의 사랑 따위 알지 못한다고.

그래도 연주는 정엽을 믿었다. 설마 내 사랑이 외면당했을 리 없다고도 생각했다. 편지에 내가 그려 넣은 수많은 사랑꽃을 총명한 정엽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고 자신했다.

‘오늘 내가 심은 건 꽃봉오리 하나 올라오지 않은 작은 묘목일 뿐이니까. 꽃이 피면 내게 다정히 웃어 줄 거야.’

‘매일 대륙 곳곳의 소식을 살피는 사람이니 내가 서신에 해홍화를 무척 좋아한다고 밝혔던 것을 깜빡 잊은 것뿐이야.’

‘언젠가는 정엽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하지만 경수당에 심었던 해홍화 묘목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수도 조양은 한수보다 남쪽에 있어 비교적 날씨가 따뜻했지만, 해광성과 비교하면 한참 북쪽에 위치해 처음부터 해홍화가 자라기에 적합한 기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주는 그제야 북쪽에서 해홍화를 키우려면 사시사철 난로를 피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연왕의 아내이자 황실의 맏며느리가 한겨울에 얼어 죽는 가난한 백성보다 꽃나무를 더 애지중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애써 모른 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경수당에서 해홍화가 뿌리내리지 못한 건 추운 날씨 탓이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식물마저 죽이는 그 잔혹한 무관심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죽이지 못할 리 없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선 안 되는 인연이라고. 어쩌면 해홍화는 죽음으로 알리려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나는…….”

미련하게 굴다 헛되이 모든 걸 잃었구나.

끝없는 자책 속에 갇힌 연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은 손바닥 가득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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