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 같지만.
차디찬 창가에서 홀로 실없이 자문자답하던 연주는 이내 보석 상자를 닫았다.
“마마.”
그때, 아까부터 먼발치에서 예전처럼 북쪽 창가에 서 있는 연주를 지켜보던 아실이 다가왔다.
“차가 식기 전에 드셔 보시옵소서.”
아실의 권유로 창가 옆 의자에 착석한 연주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평소 즐겨 마시던 차가 오늘따라 밍밍하게 느껴졌다.
‘차향의 깊이는 마음의 깊이를 닮은 건가.’
그렇다고 저를 생각하는 아실의 마음이 얕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 낮 유황관에서 용무군 군사에게 대접받았던 야생차의 잔향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을 해야지.’
연주는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엽은 아직도 많이 미운 사람이지만, 아우를 구해 줄 그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남남이 된 사람에게 빚을 진다면 그 빚은 또 무엇으로 돌아올까.’
그게 무엇이든 죽음은 아니어야 할 텐데. 담담하게 생각하던 연주는 어젯밤 경수당의 향로가 텅 비어 있던 것을 떠올리곤 아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예전에 모아 둔 향료가 아직 남아 있는가?”
“갑자기 향료는 어찌……. 전하께서 향경당의 물건은 모두 있는 그대로 관리하도록 지시하시어 향료 역시 남아 있기는 할 것이옵니다.”
갑자기 향료를 찾는 연주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실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럼 조향 도구와 향료들을 가져다주게.”
“예, 마마. 잠시만 기다리시옵소서.”
아실은 문 앞을 지키던 궁녀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연주는 남은 차를 마시며, 오랜만에 기억을 헤집어 정엽을 위해 만들었던 안식향의 향보를 천천히 되짚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폐하를 뵈러 왔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드시지요.”
정엽은 동이 트자마자 입궁하여 황제를 알현했다. 매일 찬바람이 불더니 웬일로 쉽게 정엽에게 문안을 허락한 황제는 꽤 살가운 얼굴로 그를 맞았다.
“몸은 좀 어떠하냐?”
“작은 상처일 뿐이옵니다. 말끔히 나았사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하는 말만 들으면 영락없이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것 같았다. 하지만 정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에는 걱정보다 일종의 흥미 같은 것이 엿보였다.
흥미라. 일별에 황제가 제게 보이는 관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챈 정엽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한데, 그토록 작은 상처였다면 어째서 왕자를 황족 시해 죄로 종정사에 가둔 것이냐?”
“아무리 혈기 왕성한 나이라 해도 감히 황족을 향해 검을 빼 든 행동은 엄하게 질책해야 한다고 여겼사옵니다.”
“흐음…….”
“고통 없이 얻어지는 교훈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잘못은 즉시 바로잡아야 반복되지 않는다고 배웠사옵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한동안 말없이 정엽을 응시했다. 그놈의 예언만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시험은 계속됐다.
“그래, 왕부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더냐. 연왕부의 안주인 자리가 빈 지 오래되어 하는 말이다.”
“괜찮사옵니다.”
“괜찮기는. 몸이 아플 때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법이거늘.”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옮긴 황제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연주가 이혼을 청한 후 그간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 황제였다.
‘지금 연왕부에 연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게로군.’
어차피 비밀로 삼을 일도 아니긴 하지만. 새삼스럽게 연왕부 곳곳에 숨은 눈과 귀를 실감한 정엽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연왕부의 안주인 자리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황의 안위이옵니다.”
“네가 기특한 말을 다 하는구나.”
그래서 연왕부에 버젓이 드나드는 전처는 떠도는 말대로 오로지 제 아우를 위해 그런 것이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정엽을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들은 아들인데. 너무 덮어놓고 의심만 하는 것도 좋지 않지. 암.’
정엽의 진심이 무엇이든 이만큼 주제를 알면 조금 더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 다 좋다. 너는 짐의 하나뿐인 적자가 아니냐. 하지만 명분을 무기 삼아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십수 년 끈질기게 이어진 아들에 대한 적개심을 하루아침에 거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제는 왕자의 일을 넘어, 정엽이 연주에 대한 복권령이 떨어지기 전 영항에서 연주를 구출해 나간 일까지 묶어 언급하며 습관처럼 그를 압박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래.”
이쯤에서 황제는 정엽이 더는 전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 않고, 평해왕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킬 생각도 없다고 여겼다. 한시름 내려놓은 황제는 그제야 내내 고민하던 문제를 슬며시 드러냈다.
“한데 너는 왕자를 어찌 처결할 생각인 것이냐? 왕자를 가둔 사람은 너이니 의견을 듣고 싶구나.”
“종실과 관련된 일은 부황께서 처결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질책하지 않을 테니 말해 보아라.”
“부황의 뜻이 정히 그러시다면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왕자의 행동에 놀란 사람은 많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사옵니다. 게다가 왕자의 나이도 고작 열아홉이지요. 혈기 왕성한 나이에 저지른 실수인 만큼 한 번쯤 기회를 베푸심이 어떠하시옵니까?”
“기회라?”
“단 이틀이라도 종정사에 갇혀 있었으니 왕자도 충분히 제 잘못을 반성했을 것이옵니다. 이 일은 이쯤에서 덮으시지요.”
그럭저럭 틀린 말은 아니다. 재차 정엽이 한 말을 곱씹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일은 천하의 평해왕의 기를 꺾어 놓을 좋은 기회라, 천우신조의 기회를 하루 이틀의 소동으로 끝맺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래도 왕자에게 씌워진 죄목은 황족 시해 죄인데, 너무 쉽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
“얼마 전 평해왕이 부황께 세상에 둘도 없는 진귀한 선물을 바쳤다고 들었사옵니다. 평해왕에게 어떤 보답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왕자의 사면을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삼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침 평해왕에게 내릴 보답을 궁리하던 차인데 묘안이로구나.”
“평해왕과 왕자 모두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것이옵니다.”
평해왕이 진상품을 올린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천자 체면에 진상품보다 못한 것을 답례품으로 하사할 수 없어 고심이 깊던 황제였다. 고민을 내려놓은 황제의 안색이 밝아졌다.
저놈을 눈앞에 두고 이토록 흐뭇한 감정을 느껴 본 게 언제인지. 잠시 감상에 젖었던 황제가 황룡포를 떨치며 상석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저보다 훌쩍 자란 아들의 든든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항상 뻣뻣하기만 하던 녀석이 친왕이 된 후 아비의 고충을 헤아릴 줄도 알고. 더는 걱정이 없구나.”
“과찬이시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너도 계속 수도에서 지낼 텐데, 근질거리는 몸을 달랠 소일거리가 필요하겠구나.”
“…….”
“짐도 너의 재주를 안다. 하니 새해부터는 신의군을 맡아 키워 보도록 하여라.”
뜻밖의 제안에 정엽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신의군은 공신들의 자제와, 엄격한 기준을 통해 선발된 귀족 자제들을 모아 만든 황실의 친위 부대. 그런 만큼 황제에게 의미가 각별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째서 내게 신의군을 맡기시는 거지?’
황제가 은혜를 베푸는 의도를 의심하던 정엽이 일단 무릎을 꿇으며 감사를 표했다.
“부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그래, 장하구나.”
황제가 어떤 의도를 갖고 군대를 맡겼건, 일단 부딪쳐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히는 생각을 정리한 정엽이 고개를 숙였다.
* * *
그 시각, 향경당.
정엽이 입궁하기 전에, 그에게 답례를 건네야 한다는 생각에 밤새 안식향을 완성한 연주가 피곤한 두 눈을 비볐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아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를 어쩌지…….”
막상 다른 궁인의 손에 물건을 맡기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연주는 결국 완성된 안식향을 가지고 직접 경수당으로 향했다.
“마마? 이곳까진 무슨 일로 오셨사옵니까? 손에 든 것은 소인에게 주시옵소서. 들어 드리겠사옵니다.”
양해가 안채에서 건너오는 연주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경수당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안식향을 품에 안은 연주는 양해의 배려도 마다하고 대뜸 정엽부터 찾았다.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이를 어쩌지요? 전하께선 꼭두새벽부터 입궁하시어 처소에 아니 계시옵니다.”
“벌써 입궁하셨다는 말인가?”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벌써 떠나고 없다니. 난처한 표정으로 경수당 현판을 올려다보던 연주가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양해가 연주를 설득했다.
“그래도 전하께서 곧 돌아오실 시간이니 안에서 기다리심이 어떠하시옵니까?”
“그래도 되겠는가? 주인도 없는 처소에 들어가 있으면 전하께서 불쾌해하실 텐데.”
“전하께서 그러실 리 있겠사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왕부의 안주인이셨던 분인 것을요.”
“그야 그렇지만…….”
“마마, 날이 춥사옵니다. 찬바람을 맞으시면 아니 되니 어서 안으로 듭시옵소서.”
양해는 망설이는 연주를 재촉해 경수당 안으로 이끌었다. 마지못해 연주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연주를 경수당에서 침실 다음으로 가장 따뜻한 서재로 안내했다.
“차를 내드릴 테니 편히 계시옵소서.”
“고맙네.”
양해가 자리를 비우자 연주는 낯익은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고는 책상 위에 안식향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과거 정엽과 서재에서 시간을 보낼 때처럼 책상 맞은편에 놓여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정엽의 흔적을 관찰하던 연주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즐겨 읽던 책들이 2년 전 그 자리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벽에 걸린 그림도, 장식장에 놓인 도자기도, 심지어 창가에 휘늘어진 휘장까지도. 자신의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던 정엽의 침실처럼, 서재 역시 모두 연주가 꾸미고 정리했던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것보다 변한 걸 찾는 게 빠르겠네. 어쩜…….”
연주는 혼잣말과 함께 예전과 달라진 그림을 찾기 위해 눈앞의 책장과 장식장을 느긋한 시선으로 훑었다. 그때, 책장 한구석에 놓인 낯선 상자 하나가 연주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이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