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정말요?”
연주는 뜻밖의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정엽의 심기를 살폈다. 정엽이 단 하룻밤 만에 윤을 사면하기로 마음먹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하지만 무뚝뚝하게 대답한 정엽은 연주의 시선을 피해 태연히 젓가락질을 이어 갔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빤히 정엽을 바라보던 연주는 아실이 새 음식을 권하자 그제야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가벼운 담소 한마디 오가지 않는 조용한 식탁이었지만, 궁인들은 오랜만에 사람 사는 것처럼 온기가 도는 분위기에 주인 몰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권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궁인들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는데…….’
채연주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냉골 같던 경수당에 봄바람이 불어 든 듯했다. 이상하리만치 정겨운 분위기를 감지한 정엽은 연주가 식사를 얼추 마치자 상황을 외면하듯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 방에서 밤을 새우지 않아도 돼. 네가 쓰던 향경당을 치워 두라 일렀으니.”
“아…….”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저를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는 정엽의 의도를 읽은 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다만……. 전하와의 약속이 마음에 걸려서요.”
정엽이 내일 황제를 알현하겠다곤 했지만, 아우가 방면될 때까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지극정성으로 시중을 들라는 조건은 최소한 오늘 밤 그가 침소에 드는 순간까지 유효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연주는 되도록 정엽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혹시 저와의 식사가 불편해서 그러신 거라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드세요.”
예전에 비해 적어진 정엽의 식사량을 살핀 연주가 자리를 지키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전처를 괴롭히는 악취미는 없어.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에 담을 생각도 없고. 그러니 이만 네 처소로 가.”
“…….”
“얼른.”
마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찔렀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연주는 이 상황을 최대한 표면적으로,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거면 혼란스러울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테니까.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하지만 연고는 새로 발라야 해요. 팔을 감은 천도 갈아야 하고요.”
“정말이지…….”
“시중은 그런 거잖아요.”
“됐어.”
또 무슨 험한 꼴을 겪을 줄 알고. 어젯밤 연주의 손에 몸을 맡겼다가 퍽 난처한 밤을 보낸 사실을 떠올린 정엽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양해가 말을 보탰다.
“군주마마, 오늘은 소인에게 맡기시지요. 마마께서 소인이 할 일을 다 뺏어 가시면 이 양해는 엄동설한에 왕부 밖으로 내쳐질지도 모르옵니다.”
누구보다 정엽을 오래 보필해 온 양해는 간밤에 주인이 곤란을 겪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양해가 익살스럽게 사정하는 통에 더 이상 주군의 비밀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아실마저도.
“하지만 약속이…….”
“마마, 차라리 소인을 매우 치시고 일을 시켜 주시옵소서.”
양해는 아예 눈물 닦는 시늉까지 하며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매도 치고 일도 시켜 달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 소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연주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알았네, 알았어. 매는 치지 않고 일을 맡길 테니 그쯤 하게.”
“감읍하옵니다, 군주마마.”
양해는 신난 강아지처럼 바닥에 넙죽 엎드려 과장되게 감사를 표했다. 연주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본 궁인들은 하나같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양해 자네 덕에 왕부가 심심하지는 않겠어. 전하께서 아끼실 만하네.”
먼저 시중을 들라며 제안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랫것들 앞에서 약속이니 변덕이니 떠들어 댈 수는 없었다.
연주는 이쯤에서 완전히 마음을 놓고 편히 웃었다. 반면 연주가 밝게 웃는 모습 자체를 오랜만에 본 정엽은 묘한 기분을 몰아내듯 입을 열었다.
“아실, 군주를 모셔라.”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연주가 나붓이 예를 갖추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정엽은 금세 시선을 돌렸다.
* * *
“여긴 그대로구나.”
경수당에서 안채인 향경당으로 넘어가는 길목, 추억을 되짚듯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연주가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풍경 속에서 스치듯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돌아오니 좋으시지요?”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소인을 비롯한 향경당 궁인들은 항상 마마를 생각하며 자리를 지켰사옵니다. 마마께서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만을 기도하면서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옛 추억과 저를 위하는 이들의 정성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연주는 아실의 따스한 이야기에 그녀의 거친 손등을 감싸 쥐고 도닥였다.
“고맙네, 아실.”
“별말씀을요, 마마. 자, 문턱이 높으니 조심하시옵소서.”
연주는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수화문을 넘어, 향경당의 입구인 향경문을 지났다. 온갖 길상무늬가 아름답게 얽힌 영벽(影壁)을 돌아서자, 뜨락 한가운데를 차지한 백매화 한 그루가 연주를 반겼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크게 몸집을 불린 매화나무는 사방으로 길게 뻗은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가득 달고 진주알 같은 흰 꽃을 수줍게 피워 내고 있었다.
‘주인이 떠난 뒤에도 알아서 잘 자라다니, 기특도 하지.’
연주는 선뜻 맨손을 내어 가지 위에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 주었다.
“날이 조금 풀려 꽃이 만개하면 참으로 절경이겠구나.”
“마마…….”
“다른 궁인들도 이 매화나무를 좋아하던가?”
“예, 향경당 궁인들 모두 이 나무를 좋아하옵니다. 마마께서도…….”
새해에 매화가 흐드러진 모습을 함께 보시면 참 좋을 텐데.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삼킨 아실이 잠자코 연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오른팔을 내밀었다. 잠깐 차가운 눈을 만졌다고 금세 검붉게 변한 연주의 손이 염려스러운 탓이었다.
“날이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하지만 동상의 저릿한 고통이 익숙한 연주는 아실의 행동을 재촉으로 이해하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렇게 향경당 내실로 들어선 연주는 3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풍경 앞에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사리물었다.
‘꼭 잠시 나들이라도 다녀온 것 같구나.’
궁전 곳곳에 놓인 청동화로는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키는 궁인들 모두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배치한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타올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항아리에 가득 담긴 불수감 열매는 오늘도 상큼한 향기를 뿜었다. 협탁과 창틀마다 놓인 수선화 화분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흘러내렸다.
말할 리 없는 물건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궁인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을 기다렸다고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할 수가 없었다.
“차를 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옵소서.”
아실은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연주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연주가 평소 오랜 시간을 보내던 귀비 탑에 앉힌 뒤 사라졌다. 연주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정엽을 기다리며 매일 책을 읽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자수를 놓기도 했었다.
“오랜만이로구나.”
감상에 잠겨 푹신한 비단 보료를 손으로 쓸어 보던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키는 대로 처소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궁전 곳곳에는 연주가 직접 고른 수정렴과 비단 휘장이 걸려 있고, 계절마다 그림이나 글씨를 바꿔 걸어 놓는 북쪽 벽에는 그녀가 겨울마다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꺼내 놓던 푸릇한 파초도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파초도 옆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연주가 매일 빠짐없이 열어 놓던 커다란 북쪽 창문이 그녀를 반겼다.
지금은 닫혀 있는 북쪽 창문을 밀어 열자, 머나먼 산마루가 연주의 시선을 당겼다. 지금은 어둠이 내려 잘 보이지 않지만, 저 산마루 꼭대기에는 북방에 변란이 생겼을 때 올라오는 봉화대가 있었다.
“예전에는 그 사람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 것만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정엽이 북방으로 출정을 나가 왕부를 비울 때면, 연주는 매일 이 북쪽 창문을 젖혀 놓고 하염없이 저 봉화대가 있는 산마루를 올려다보곤 했다.
북쪽 봉화대에 불꽃이 피어오른다는 건 곧 북방의 전선이 무너져 그곳에 있는 정엽에게도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라. 그래서 연주는 눈이 오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낮이든 밤이든 저 산마루 끝에서 연기나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봄이 와도 정엽이 돌아오지 않아 그리움에 말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연주는 향경당 처마 아래나 월대 아래, 화단 주변을 뒤져 보라색 제비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 작은 꽃송이를 손바닥만 한 화병에 넣어 놓고 멀리 있는 정엽을 향해 이 제비꽃이 시들기 전에 내게 돌아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아주 많이 미워할 거라며 정엽이 듣지 못할 투정을 늘어놓았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주술은 꽤 신통해서, 빌고 또 빌다 보면 반드시 정엽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평생 미워하지 못할 줄 알았어.”
지금 북쪽 창가에 말라붙은 이 제비꽃은 어느 시절의 기다림일까. 연주는 정엽을 기다리는 동안 함께 말라 갔을 제비꽃의 잔해를 집어 들었다. 습관처럼 창틀 한구석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아직도 연주가 놓아두었던 자그마한 보석 상자가 남아 있었다.
연주는 익숙한 손길로 상자를 열고 빼빼 마른 제비꽃 줄기를 그 안에 넣었다. 보석 상자에 가득한 마른 제비꽃을 들여다보노라니, 새삼 참 유치하고 정성스럽게 정엽을 사랑했었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었다.
“내 사랑이 이토록 아프게 부서질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는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