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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44화 (44/161)

44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지고 어느새 창밖이 어둑하게 변했다.

“시간이 벌써…….”

협탁 위 촛대 아래서 부싯돌을 찾은 연주는 가까운 촛대에 불을 댕긴 뒤, 정엽의 책상 위 빈 촛대에도 불꽃을 옮겼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고 난 뒤에야 그만큼 시간이 흘렀음을 인지한 정엽이 고개를 들었다.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 마치 꽃잎 위에 내려앉는 나비 같은 손놀림. 유황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등잔불을 밝히는 연주를 지켜보던 정엽이 어느새 턱을 괴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기척이 옅을 수가 있는지.’

용손이라는 허무맹랑한 단어로 자신의 존재가 명명된 순간부터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 온 정엽이었다. 높은 협곡에 숨은 매복병, 처마 아래 뱀처럼 숨어든 자객의 기척은 한여름 천둥소리 같은데, 왜 저 여자의 기척만큼은 공기처럼 가볍기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채연주만큼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건가?’

자문하던 정엽이 흘러내린 옷소매 사이로 살짝 드러난 연주의 팔목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 가느다란 팔목으로 뭘 어쩔 수 있겠어.’

그런데도 정엽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만일 이 세상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채연주 한 사람뿐일 거라는. 그리고 이 확신은 연주와 한 공간에 있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영 안 어울리지만.”

혼잣말과 함께 연주가 비수를 들고 제 앞에 서 있던 모습을 상상하던 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불을 밝히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너무 어두운걸요.”

“저녁 먹으러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켜지 마.”

“그런데 아실은 당신이 평소 연무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고…….”

정엽이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끝내 유황관 내 마지막 등불까지 모두 밝힌 연주가 그에게 다가왔다. 몸에 딱 맞지도 않는 헐렁한 옷을 입고 종종거리는 꼴이라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정엽이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가끔은 산해진미가 좋을 때도 있어.”

“그랬군요.”

식성이 까다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식사에 시간을 길게 소비하지 않는 정엽이었다. 연주는 별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앉아 있던 자리를 묵묵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빨리 나와.”

하지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정엽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집무실의 문을 활짝 열고 재촉했다. 연주는 별수 없이 뒷정리를 포기하고 유황관 밖으로 나섰다.

“빨리도 어두워지네.”

초를 밝힐 때까지만 해도 해가 조금 남아 있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바깥은 완전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이래서야 대숲을 어떻게 지나간담.’

연주는 곳곳에 등불이 놓인 유황관 주변과 달리, 칠흑처럼 어두울 숲길을 염려했다. 그사이 정엽은 유황관 입구 앞에 놓여 있던 등불 하나를 들고 앞서 걸었다.

“같이 가요!”

어둠 속에서 방향을 살피던 연주가 종종걸음으로 정엽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등불 하나에 의지해 연무장을 지나 대숲의 초입에 도착했지만 야트막한 오솔길에는 이미 얼음이 반질반질 얼어 있었다.

“후, 조심, 조심…….”

잔뜩 긴장한 연주가 빙판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보폭을 줄이고 느리게 걸었다. 하지만 연주보다 훨씬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정엽은 계속 서너 걸음씩 앞서 나갔다.

“조금만 천천히 가지.”

어느새 등불이 멀어져 발밑이 깜깜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정엽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이를 어쩐다.

난처함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던 연주가 정엽을 불러 세울 심산으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앞서간 정엽을 불러 봤자 목소리가 닿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연주는 별수 없이 걸음을 좀 더 늦추고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그러곤 희미한 저녁 달빛에 의지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어맛!”

얼마 못 가 눈에 덮여 있던 얼음을 밟은 연주가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몸이 기울어져 자칫하면 얼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판이었다.

“휴, 아앗!”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무게 중심을 잡는 데 성공한 연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근육이 놀랐는지 다리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 오기 시작했다. 연주는 괴로운 신음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 앞서 나갔던 정엽은 끙끙대는 연주의 신음을 듣고 순식간에 돌아와 등불로 연주를 비췄다.

“다친 건가?”

정엽의 물음 끝에는 익숙한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무안해진 연주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멀쩡한 척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직 통증이 여전한 다리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자세가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정엽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연주의 모습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하아…….”

아까보다 길어진 한숨 소리에 몸이 얼어붙은 연주가 우두커니 정엽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잃은 뒤 지겹도록 들은 한숨이건만 새삼스럽게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앞서서 가요.”

“그러다 또 미끄러지려고?”

“괜찮다니까요.”

“됐으니까 잡아.”

연주의 보폭이 저보다 짧은 건 둘째 치고, 저 상태로 홀로 걷게 두었다간 빙판에 머리가 깨질지도 몰랐다. 연주를 향해 손을 내민 정엽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속도에 맞춰 숲을 지나다간 저녁 식사는커녕 내일 아침 식사도 힘들 거야. 그러니까 미련하게 굴지 말고 잡아.”

좀 곱게 말하면 혀에 가시가 돋나?

기분이 상한 연주가 정엽을 한참 쏘아보았다. 하지만 연주가 저를 노려보거나 말거나 정엽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며 재차 손잡기를 종용했다.

“나 배고파.”

“…….”

“얼른.”

연주는 별수 없이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정엽은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연주는 흔들림 없는 손에 의지해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정엽은 연주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별 하나 뜨지 않은 캄캄한 숲길을 지났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소리인 것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이렇게 손을 맞잡고 걸어 본 적이 없었는데.’

연주는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정엽의 온기가 낯설어 단단하게 얽힌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등불에 희미하게 드러난 커다란 손은 지금껏 그가 걸어온 인생을 대변하듯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이 손으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을까.’

그러나 연주는 정엽이 이 손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한 만큼, 또 무수한 생명을 거뒀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

문득 정엽의 생각이 궁금해진 연주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정엽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언제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얼굴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역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정엽은 언제나처럼 앞만 보며 눈 덮인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옆을 돌아보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냉정함은 언뜻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속을 알 수 없는 게 꼭 저 달 같네.’

달은 주기적으로 기울고 차오르며 사람의 마음속에 무한한 환상을 심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달의 뒷면을 알까. 오늘 유황관에서 한수를 생각하는 정엽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본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사색에 빠진 사이 숲길이 끝났다. 멀리 경수당 처마가 보이고, 궁인들의 인기척도 느껴졌다. 연주는 정엽과 맞잡은 손에 힘을 풀며 손을 놓아 달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곧 죽어도 체면은 챙기는 게 채연주답네.’

마지못해 연주의 손을 놓아준 정엽이 아직 손바닥에 남은 온기를 놓칠세라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감춘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연주를 앞서 지나갔다.

“어서 오시옵소서.”

경수당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녹나무 식탁 가득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두 사람을 반겼다. 그러나 연주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 음식들은 다 뭐고, 내가 왜 정엽과 한자리에서 밥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먼저 식탁 앞에 앉은 정엽은 담담하게 맞은편 빈자리를 권했다.

“앉아.”

연주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아실이 예전처럼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그녀의 곁에 섰다.

아실이 가장 먼저 내민 것은 닭고기를 결대로 찢어 넣어 만든 뜨끈한 닭죽. 어서 음식을 맛보라 재촉하는 듯한 아실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연주가 수저를 들었다.

그러자 다음에는 전복과 죽순, 버섯을 곁들인 바닷가재 요리가 접시에 놓였다.

‘정엽은 해산물을 잘 먹지 않는데 웬 해산물 요리지?’

연주는 뒤늦게 식탁 위에 놓인 접시를 하나하나 살폈다. 뜻밖에도 반은 해산물 요리, 반은 고기 요리였다. 연주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실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놓겠다더니…….’

남해에서 나고 자란 연주는 해산물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정엽은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아서 결혼생활 내내 억지로 식성을 맞추고 살았던 연주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주방을 닦달해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했을 아실의 정성을 생각하면 맛있게 먹고 접시를 비우는 게 최고의 보답. 하지만 이 순간 연주는 상한 음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음식이 내키지 않았다.

‘전복은 윤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데…….’

접시에 놓인 전복을 보니 자연히 옥에 갇혀 있을 동생과, 어전 앞에 꿇어앉아 있을 오라비가 떠올랐다. 마음이 무거워진 연주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이런 진수성찬을 즐기는 건 고생하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었다.

“마마,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옵니까?”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는 연주를 보고 당황한 아실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나 연주는 대꾸 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 다른 요리를 덜어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한편, 맞은편에 앉아 이 기묘한 소란을 주시하던 정엽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황궁의 소식을 전했다.

“오늘 새벽에 폐하께서 왕세자를 돌려보내셨다고 하더군.”

“그럼 윤이는…….”

“내가 내일 폐하를 알현할 테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밥이나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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