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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43화 (43/161)

43화.

이처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군사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대오를 맞추어 섰다. 오가는 대화로 정엽을 찾아온 미인이 전 연왕비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전에 없던 군사들의 분위기를 감지한 정엽은 연주만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말 붙일 틈만 노리는 무리가 거슬려 어깃장을 놓았다.

“오늘은 너희 모두 내게 모두 졌으니 벌로 연무장 백 바퀴를 돌아라.”

“배, 백 바퀴라 하셨사옵니까?”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가혹한 처사에 두 귀를 의심하던 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황을 관망하던 장명은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군사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해? 연무장 안 돌아? 해 지기 전까지 백 바퀴를 돌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다른 사내들이 자기 여자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시다는데 자리를 비켜 드려야지. 주군의 속마음을 헤아린 장명은 목청을 높이며 군사들을 연무장 쪽으로 몰았다.

연주와 단둘이 남게 된 정엽은 추운 날씨 탓에 찬합을 든 연주의 손이 불그죽죽하게 변한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로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가지.”

정엽은 건물을 돌아 유황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황관(幽篁館)이라고 쓰인 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뒤따라 들어선 연주의 눈이 커졌다. 문을 지나자마자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거대한 대화국 전도가 연주를 반겼기 때문이다.

“세상에…….”

책상 위에 찬합을 내려놓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거대한 지도를 훑던 연주가 감탄했다.

지도에는 대화국의 산과 강, 협곡 등 주요 지형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곳곳에는 대화국과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정리한 쪽지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연주는 묘한 기분으로 정엽의 열정이 고스란히 남은 흔적을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찬합에서 약사발을 꺼내 비운 정엽이 책상에 가볍게 몸을 기댄 채 나란히 서서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

“그냥요. 아직도 대화국 안팎 소식에 이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안보 상황은 수시로 바뀌기 마련이니까. 별거 아니야.”

“이게 별일이 아니면 뭐가 별일이겠어요. 불사왕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은 아니네요.”

“불사왕이라…….”

연주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별칭에 정엽이 싱겁게 웃었다. 철이 들어 왕부를 하사받은 때부터 늘 지금 같은 생활을 유지해 온 정엽으로서는 불사왕이라는 별칭만큼 낯간지러운 것이 없었다.

“그래도 한수성은 이제 폐하께서 파견하신 장수가 관리하고 있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 않나요?”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고 다시 달려가야 할 곳이야. 수도에서 몸 편히 지낸다고 하루아침에 관심을 끊어서야 되겠어? 대화국 강산을 지키는 것이 황가에서 태어난 내 소명인데.”

정엽의 목소리에는 물안개처럼 흐릿하긴 해도 분명 애정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연주는 기존의 생각과 다른 울림을 가진 정엽의 대답에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가야 할 곳. 국토를 지키는 건 황가에서 태어난 자의 소명이라.’

지금까지 정엽이 전쟁에 골몰하며 한수를 일군 이유가 오로지 저를 꺼리는 부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고만 여긴 연주였다. 그런데 소명이라니. 자못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단어에 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긴 시간 함께했는데 겨우 이제야 당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구나.’

정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정엽이 처음 보는 사람보다 낯설게 느껴졌다.

“한수로 돌아가고 싶나요?”

“내가 일군 곳이니까. 언젠가는.”

담백하게 대답한 정엽은 지도에 선명하게 표시된 한수성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친왕에 봉작되어 수도에 정착하게 된 지금, 그래서 유배지나 다름없던 한수에서 가장 멀어진 지금이 바로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순간인 줄만 알았는데. 한수성을 바라보는 정엽은 어쩐지 삶의 일부를 잃은 사람처럼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돌아간다고요…….”

연주는 혼인 후 툭하면 북방으로 출정하는 정엽을 볼 때마다 애가 닳았다. 부황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가 늘 위태롭게만 보여서, 차라리 내 시신을 황제에게 바칠 테니 그 위험한 도박을 멈추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살아 돌아와야 황제도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눈물로 설득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정엽의 마음속에 부황의 애정에 대한 갈망이나 황위를 차지하려는 욕심 따위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단지 소정엽의 삶 자체가 오롯이 북방에 매여 있었을 뿐.

‘아, 당신은 머나먼 북녘땅을 무덤으로 쓰려는 거구나.’

이 순간 연주는 아버지 평해왕을 떠올렸다. 언젠가 삶을 마감할 때가 온다면 마지막 순간은 바다 위에서 맞고 싶다던 아버지였다.

‘어릴 땐 부왕의 그런 말이 싫고 마음 아프기만 했는데.’

장수는 집을 떠나는 순간 더는 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매 순간 나라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들은, 그래서 삶이 사선 위에 놓인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걸.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정엽과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속마음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게 된 연주가 조용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어쩌면 지금 이만큼의 간극이 자신과 정엽 간의 알맞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의 고리가 끊어진 연주가 정엽과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들어와라.”

바깥을 향해 짧게 명령한 정엽은 책상 위를 대강 정리한 뒤 용무군 군사를 맞았다. 척 봐도 집무를 시작할 태세라, 연주는 급히 책상 오른편에 놓인 여분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저, 왕비마마. 아니지, 군주마마.”

그러나 투박한 찻잔 두 개를 가지고 들어온 군사는 정엽보다 연주에게 먼저 알은체했다.

“군주마마께서 오셨다기에 차를 좀 끓여 왔사옵니다.”

“……차?”

이게 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의아한 얼굴로 되물은 연주가 정엽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정엽은 사소한 일로 집무실을 찾은 군사를 나무라지도, 연주를 왕비라고 부른 실수를 정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됐으니 군주에게 내드려라.”

“예, 전하.”

불호령이 떨어지진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 찻잔을 들고 서 있던 군사가 안도한 표정으로 연주 앞에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릇은 변변치 않지만 찻잎은 저희들이 특별히 아끼는 것으로 정성을 다해 끓인 것입니다. 모쪼록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저희들이라면……?”

“아, 왕비마마께 은혜를 입은 용무군의 군사들 말입니다. 다들 마마를 직접 뵙고 인사를 올리고 싶어 했는데 오늘은 소신이 대표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

장명이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구나. 뒤늦게 깨달은 연주가 미소로 화답했다.

“자네들이 전하와 함께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일세. 그러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예? 예. 하면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연주의 다정한 위로에 감격한 군사는 벅찬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이다가 황급히 유황관을 나섰다. 순박한 군사의 행동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연주는 찻잔의 뚜껑을 열어 뜨거운 김을 내보낸 뒤 조심스레 차향을 맡았다.

“으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차향을 확인한 연주의 눈이 반짝였다. 이 차의 향기는 지금까지 마셔 본 어떤 명차보다 진하고 향긋했다.

차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연주는 곧장 찻물을 입에 머금어 음미했다. 내쉬는 숨결에도 묻어날 만큼 진하다 못해 알싸한 차향이 온몸을 감쌌다.

“이건 무슨 차예요?”

연주는 동그란 눈으로 정엽을 돌아보았다. 정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야생 차나무 잎으로 끓인 차. 군사들이 고산지대를 행군하다 우연히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면 잎을 따다가 말려 차로 끓여 먹곤 하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만 얻을 수 있는 찻잎이라니. 참 귀한 차네요.”

가슴이 뭉클해진 연주는 다시 신중하게 차를 음미했다. 별거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예쁘게 웃는 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엽이 피식 웃었다. 지극히 채연주다운 행동이라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정엽이 군보를 살피는 동안 천천히 차를 마시며 여유를 만끽하던 연주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나무의 싱그러운 푸른빛이 눈이 따갑도록 맑았다.

‘깊은 대숲에서 멋진 차를 대접받았으니 이 귀한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생각을 마친 연주가 정엽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여분의 지필묵이 있나요?”

“지필묵은 갑자기 왜?”

“그냥요.”

이상하게 말을 아끼는 연주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정엽은 이내 책상 서랍에서 여분의 지필묵을 꺼내 건넸다.

“고마워요.”

정엽이 내준 지필묵을 챙긴 연주는 책상 맞은편 협탁에 그것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최대한 조용히 먹을 간 뒤, 연적을 기울여 충분한 양의 먹물을 만들었다.

이윽고 종이를 메우는 것은 멋들어진 시구와 손 가는 대로 그려지는 그림.

크고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보아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모양이라고 추측한 정엽은 들고 있던 군보를 내려놓고 연주의 붓놀림을 훔쳐보았다. 거침없이 붓을 놀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언젠가 시양이 그에게 자랑스럽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는 검을 들었을 때 가장 멋지지만 새언니는 붓을 쥐었을 때가 제일 멋져요. 새언니는 붓을 무기처럼 휘두르거든요!’

역시 어린애 눈은 못 속인다니까.

고개를 가볍게 흔든 정엽이 잠시 내려놓았던 군보를 다시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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