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주인 없는 경수당에 홀로 남은 연주는 바깥 공기라도 쐴 겸 뜨락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양해가 연주를 알아보고 밝은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마마, 아직 날이 찬데 어찌 나오셨는지요?”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말일세. 어차피 연무장으로 나설 생각이기도 하고. 한데 양해 자네는 어찌 전하의 곁을 지키지 않고 여기 있는가?”
“마마께서 이리하실 줄 알고 소인을 경수당에 남겨 두고 가셨사옵니다.”
“그래?”
연왕부 궁인들이 다 함께 나를 속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오늘따라 저를 챙기는 정엽의 행동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연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지척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군주마마?”
“아, 자네는…….”
연주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채고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정엽의 부관인 장명이 서 있었다. 단박에 그의 얼굴을 알아본 연주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넸다.
“소신을 기억하고 계시옵니까?”
정중하게 예를 갖춘 장명은 연주가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부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마마께서 기억해 주시다니 참으로 기쁘옵니다.”
장명은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벅벅 문질렀다. 악명 높은 불사왕을 보좌하는 군관이라기엔 순박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절로 친근감을 느낀 연주가 웃으며 물었다.
“한데 예까진 무슨 일로 걸음 했는가? 전하께서는 연무장에 계시다고 들었네만.”
“아, 전하께서 어제 올라온 군보를 가져오라 명하셔서 잠시 들렀사옵니다.”
“그렇군. 하면 어서 챙겨 가야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연주가 곁에 서 있는 양해를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양해는 부리나케 경수당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윽고 가죽으로 돌돌 말린 서류 뭉치를 가지고 돌아와 장명에게 건넸다.
“어제 올라온 군보는 이것이 다입니다.”
“알았네. 군주마마, 하면 소신은 이만…….”
“그래, 가 보게.”
연주에게 예를 갖춘 장명이 막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장 부관, 잠시 기다리십시오!”
때마침 정엽이 마실 탕약을 준비해 나온 아실이 다급히 장명을 불러 세우곤 연주에게 다가왔다.
“마마, 전하께 올릴 약이 다 되었사오니 이참에 장 부관과 함께 연무장으로 가시지요.”
“음, 그럴까?”
설마 군주께서도 연무장으로 가시려던 것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한 장명이 점잖게 허리를 숙였다.
“군주마마, 대숲에 눈이 쌓여 길이 불편하니 소신이 모시겠사옵니다.”
“그럼 부탁하지. 아실, 그 찬합을 내게 주게.”
손수 찬합을 챙겨 든 연주는 장명과 함께 연무장을 둘러싼 거대한 대숲에 들어섰다. 그녀는 장명이 앞서가며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느긋하게 주변의 경치를 살폈다.
곧게 뻗은 대나무의 푸른 기상은 눈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이라. 연주는 첫 방문 때와 달리 제법 즐거운 얼굴로 대숲을 둘러보았다.
“길이 험한데 불편하지는 않으시옵니까?”
“자네 덕에 편히 걷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다행이옵니다. 한데, 마마의 비단신이 젖으면 전하께서 무척 화를 내실 것이라 그 점이 걱정이옵니다.”
연주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서 걸으며 오솔길 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꾹꾹 힘주어 밟던 장명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 다들 사람 놀리는 재주만 는 것 같군.”
“농이 아니옵니다. 이따가 마마께서 연무장에 나타나시면 용무군 군사 모두가 기뻐할 것이옵니다. 소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잘 지켜보시지요.”
“두고 보지. 한데 용무군 군사들이 왜 나를 보고 기뻐한다는 것인가?”
“용무군 군사 중에 마마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사옵니까. 저희가 전하를 따라 한수에 주둔하는 동안 마마께서 가족들을 살뜰히 보살펴 주신 걸 모두가 알고 있사옵니다.”
다 옛일인 것을.
일개 궁녀에서부터 용무군의 군사까지. 하나같이 주군인 정엽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웃으며 넘기던 연주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장명의 태도는 꽤 진지했다.
“마마께서 연무장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시니 소신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들도 감사 인사를 올릴 기회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러한가.”
진심 어린 이야기에는 사람을 이끄는 마력이 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새삼 마음이 뭉클해진 연주가 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전하의 명을 어기고서라도 연무장에 얼굴을 비쳤을 걸세.”
“……전하의 명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장명이 무례함도 잊고 반문했다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쩐지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연주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연무장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으셨었다네. 아직도 전하께서 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뜻밖의 이야기에 어리둥절하던 장명은 순진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이내 그 이유를 알겠다는 듯 탄식과 함께 위아래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전하께서 마마를 걱정해서 그러셨을 것이옵니다.”
“……걱정?”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린가. 천하의 소정엽이 남을 걱정할 때가 다 있다니. 조금 놀란 연주가 장명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다섯 해 전쯤인가, 여섯 해 전쯤인가. 연무장으로 심부름을 오던 궁인이 해마다 넓어지는 대숲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다 독사에 물려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
“요즘 같은 날씨에 한번 눈이 내리면 잘 녹지도 않고, 꼭 겨울이 아니더라도 궁인들이 툭하면 대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니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사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마께서 길을 잃어 독사에 물리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뜻하지 않게 뒷이야기를 늘어놓은 장명은 이 상황이 민망해 저도 모르게 갈지자로 걸었다. 좀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태도였지만, 연주는 담담한 얼굴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독사라. 그럴싸한 핑계긴 하지만 부부로 지내는 동안 정엽으로부터 배려받고 있다고 느껴 본 적이 거의 없는 연주로선 크게 와닿는 것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엽이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왜 나는 정작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혹시 내가 문제였던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주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 정엽이 자신을 얼마나 위하고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한들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유황관에 계십니다. 그리로 안내해 드리지요.”
“고맙네.”
어느새 대숲의 오솔길이 거의 끝나 있었다. 눈길을 걸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은 연주가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연무장에는 한겨울에도 웃통을 벗은 늠름한 군사들이 젖은 땅을 달리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뜻밖의 살색 향연에 당황한 연주는 저도 모르게 장명의 뒤꿈치로 시선을 떨궜다. 하지만 장명이 안내한 유황관 뒤꼍에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무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친 얼굴로 눈밭에 널브러진 스무 명 남짓한 군사들. 그리고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새카만 무복 위에 흰 수건을 두른 채 목을 축이고 있는 정엽의 모습이었다.
어젯밤 끙끙 앓던 사람은 한 점 흐트러짐 없고, 애먼 군사들만 녹초가 되어 있다니. 연주는 기이한 광경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장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무료하실 때면 용무군 군사들과 대련을 벌이십니다. 어느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대련은 계속 이어지지요. 뭐, 예상하시다시피 지금껏 전하를 이겨 본 군사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만…….”
지루하고 심심해서 사람이 녹초가 될 때까지 대련을 벌인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무지막지한 처사에 놀란 연주가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멀찍이서 장명과 연주를 발견한 정엽이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전하께서 마마를 찾으시나 봅니다.”
“그럴 리 있는가. 아무래도 전하께선 자네가 가져온 군보를 애타게 찾으시는 것 같네만.”
연주의 지적에 머쓱한 표정을 짓던 장명이 꾸벅 고개를 숙이곤 정엽에게 달려갔다.
“여기 전하께서 찾으신 군보입니다.”
“이리 내라.”
장명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흘끗 쳐다본 정엽은 그에게 수통을 넘기고 군보를 받아 들었다. 가죽에 싸인 군보는 일목요연하게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수고했다.”
“아니옵니다, 전하.”
“한데…….”
“또 무슨 분부라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주군의 기색을 살피던 장명이 제 어깨 너머로 향하는 시선을 감지하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긴 왜 왔지?”
“약을 가지고 왔어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 연주는 정엽의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약이 든 찬합을 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열심이네.”
“지극정성으로 돌보라면서요.”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정엽 때문에 연주의 목소리가 조금씩 불퉁해졌다.
“왜 그렇게 화를 내지?”
“당신이 나를……. 아니에요. 됐어요.”
이것도 길어야 며칠.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다친 사람과 말씨름을 할 수는 없다.
체념하듯 한숨을 삼킨 연주가 입술을 꼭 앙다물었다. 이렇게 매사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인 정엽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배려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설명은 정엽에게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뿐이리라.
“내가 열심히 돌봐도 당신이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으니 다 허사네요.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과격한 훈련을 하면 어떻게 해요?”
“잔소리에 이토록 일가견이 있는 줄은 몰랐군.”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질렸다는 듯 피식 조소한 정엽이 어느샌가 뒤따라온 양해에게 눈짓했다. 어서 연주를 데리고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안 가요.”
“안 가면?”
“오늘은 여기 있으려고요. 전하께서 여기 계신데 제가 어딜 가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