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하지만 연주의 대답은 태연하게 이어졌다.
“태의가 오늘 밤에는 몸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했으니 자리를 지켜야죠.”
그럼 그렇지. 오늘 자고 싶은 곳이 그의 침소라는 말에 잠시 동요했던 정엽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대꾸도 없이 휘장 안으로 사라졌다.
천하의 채연주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그렇게 일각이 흐르고, 또 일각이 흐르고. 밤이 점점 깊어 갔지만 정엽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연무장에서 녹초가 될 때까지 몸을 혹사한 뒤에야 겨우 잠드는 게 일상이다 보니, 팔을 좀 다쳤다고 잠이 쏟아질 리 만무했다.
구름이 하나, 둘, 셋.
학이 두 마리. 거북이가 한 마리.
결국 정엽은 여느 때처럼 천장에 새겨진 그림들을 하나하나 헤아리기 시작했다. 침상 발치 바닥에 앉아 저를 오도카니 바라보는 연주의 시선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대체 간호를 하는 건지. 감시를 하는 건지.’
속으로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정엽은 문득 연주가 좀 전에 있었던 불상사를 눈치챈 게 아닐까 생각했다. 보통 이럴 때는 자는 척이라도 하는 게 마음 편했다.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향내 덕분일까. 아니면 누군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눈을 감고 있던 정엽은 저도 모르게 금세 단잠에 빠졌다.
다음 날 새벽녘.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던 정엽이 눈을 떴다. 이상하게 가뿐한 몸을 일으키자 이마에서 마른 물수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게 뭐지?’
무심결에 이불 위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든 정엽은 연주가 간밤에 자리를 지키던 침상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
그러나 어젯밤 무슨 소란이 있었는지, 연주는 물이 담긴 대야를 옆에 끼고 한 손에는 물수건을 쥔 채 침상 머리맡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밤새 물수건을 갈아야 할 정도였다면 신열이라도 앓은 모양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
아무리 그래도 정말 밤새 간호를 할 필요는 없었는데. 정엽은 미련하게 제 곁을 지키다 불편하게 잠든 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두면 또 나만 나쁜 사람이 될 테니.”
결국 침상에서 내려와 연주가 쥔 물수건과 대야를 정리한 정엽이 연주를 안아 들었다.
“여전히 가볍군.”
겉보기엔 안색이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아서 영항에서 나온 뒤 완전히 몸을 회복한 줄 알았는데, 막상 안아 보니 여전히 무게감이 없었다.
연주를 침상에 눕힌 정엽은 심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단잠에 빠진 연주는 어린애 잠투정하듯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투명한 얼굴과 목덜미로 까맣게 흘러내렸다.
“무슨 머리카락이 이렇게…….”
참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스친 순간, 정엽의 손길이 무심코 연주에게 향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머리카락 앞에서 멈칫한 손은 길을 잃은 듯 공중을 맴돌다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머리카락에 손 좀 댔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
듣거나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던 정엽은 고민 끝에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연주의 귀 뒤로 넘겼다.
손끝에 보들보들하게 휘감기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좋아 굳게 다물렸던 정엽의 입매에 저도 모르게 얕은 호선이 떠올랐다. 하지만 잠든 연주의 얼굴은 근심 한 점 없던 예전과 달리 수심이 가득했다.
“곧 해광성으로 돌아간다면서. 또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
“이제 모든 게 네가 원하던 대로 될 텐데. 안 그래?”
연주가 듣지도 못할 질문을 연거푸 던진 정엽은 깨끗한 화선지에 튄 먹물을 지우듯, 굳어진 연주의 미간을 엄지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연주를 내버려 둔 채 침실을 나섰다.
* * *
연주는 해가 중천에 가까워져서야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락함을 감지하고 눈을 번쩍 떴다.
어딘지 익숙한 방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주는 지금 자신이 정엽의 침상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마마, 일어나셨사옵니까?”
“아실?”
익숙한 목소리에 침상 휘장을 걷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연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선 어디로 가셨는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연무장으로 나가셨사옵니다. 자, 소인이 소세를 도와 드리지요.”
아실이 바깥을 향해 가볍게 손뼉을 치자 다섯 명 정도 되는 궁녀들이 세숫물과 양치할 찻물, 그리고 눈에 익은 의복과 패물함, 화장품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연주는 묘한 기시감에 난처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연주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궁녀들은 능숙하게 그녀의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의복은 마마께서 겨우내 즐겨 입으시던 것으로 가져왔사옵니다.”
“장신구는 마마께서 가장 아끼시던 것들로 모아 가져왔는데 살펴보시겠사옵니까?”
연주는 부담스럽게 밀려드는 것들을 뒤로하고 세수와 양치부터 시작했다. 그런 뒤 자단목 경대 앞에 앉아 궁녀들이 예전처럼 준비해 준 진주 분과 신선한 장미 연지, 서역에서 수입된 눈썹먹으로 화장을 마쳤다.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실은 곧장 궁녀가 들고 있던 패물함을 열어 연주 앞에 선보였다.
“어느 것이 마음에 드시옵니까?”
“음, 글쎄…….”
“천천히 고르시옵소서.”
만개한 해홍화 사이를 한 쌍의 나비가 사이좋게 노니는 풍경을 세공한 자개함에는, 정엽이 연주의 생일과 혼인 기일에 맞추어 양해를 통해 선물했던 장신구들이 새빨간 우단(羽緞) 위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황제 황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동주(東珠) 못지않게 알이 굵은 북주(北珠)로 가느다란 꽃대에 오밀조밀 피어난 은방울꽃을 형상화한 머리 장식. 순금에 홍옥석을 가득 박아 만든 홍매화 목걸이. 희귀한 연분홍 금강석으로 만든 귀걸이와, 흠 없는 비취 덩어리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비취 팔찌 한 쌍까지.
하나같이 아름답고 휘황찬란하지만 그래서 더 덧없게 느껴지는 패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연주는 이내 자개함을 닫았다.
“이제는 내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니 넣어 두게. 나는 여기 올 때 하고 왔던 청옥 비녀 하나면 충분해.”
“하오나 마마…….”
“되었네. 나를 도와주려거든 머리를 정돈하고 청옥 비녀나 다시 꽂아 주게.”
자신을 위하는 아실의 마음은 다치지 않게, 하지만 단호하게 장신구를 마다한 연주가 잔머리가 뻗친 머리 타래를 매만지며 웃어 보였다.
연주의 굳은 의지에 잠시 당황하던 아실은 재빨리 낯빛을 바꾸고 그녀가 바라던 대로 머리를 빗겨 준 뒤, 궁녀가 받쳐 들고 있는 의복을 손수 펼쳐 보였다.
“그럼 화장도 곱게 하셨으니 의복을 갈아입으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 마마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옷으로 가져왔사옵니다.”
“이 옷은…….”
금사와 은사를 섞어 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상아빛 비단에, 붉은 비단을 덧대어 지은 치마와 저고리. 가만히 서 있을 때는 단정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붉은 안감이 살짝 드러나며 경쾌하고 발랄한 인상을 주는 이 옷은 연주가 매해 겨울마다 즐겨 입던 옷 중 하나였다.
“이 옷은 왕부의 군주인 내게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마마…….”
“그러니까 내 말은, ……전하께서 못마땅해하실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지. 안 입겠다는 것이 아닐세.”
마음 같아서는 의복 역시 거절하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눈을 한 아실과 궁녀들을 마주한 연주가 서둘러 말을 바꿨다.
“옷 갈아입는 걸 좀 도와주게.”
연주의 말에 금세 얼굴이 환해진 궁인들은 서둘러 연주의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영항에서 고생을 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리 마르시다니 어쩜…….”
전보다 허리가 많이 남는 옷을 확인한 아실이 속상한 얼굴로 탄식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들 연주가 해 줄 수 있는 건 괜찮다는 말뿐이었다.
“옷이야 다시 맞겠지. 영항을 무사히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사옵니다. 저녁에도 마마께서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하겠사옵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푸근한 분위기에 편히 미소 짓던 연주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녁에도?”
“자, 마마. 이리 와 앉으시지요.”
“아니, 그보다…….”
연주가 홀로 자문하는 사이 아실은 연주를 침실 한편에 놓인 작은 탁자 앞으로 데려갔다. 이윽고 나이 어린 궁녀가 연주 앞에 내려놓은 것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었다.
“이게 무엇인가?”
“전하께서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죽을 올리라고 명하시어 준비하였사옵니다. 타락죽이니 식기 전에 드시지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정엽의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던 연주가 멀거니 타락죽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죽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전하의 엄명이 있었사옵니다. 그러니 어서 한술 뜨시지요.”
“전하께서 정녕 그리 말씀하셨는가?”
“그럼요. 소인이 어찌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아실은 어쩐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연주는 숟가락을 들어 타락죽을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타락죽은 입 안에 들어가는 족족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순간에도 연주는 정엽이 이토록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 나를 위해 아실이 꾸며 낸 이야기겠지.’
만에 하나 아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정엽이 베푸는 호의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이를테면 시중을 들랬더니 예전처럼 왕비 행세를 한다며 트집을 잡으려는 심산이라든가. 약을 제때 챙겨 주지 않았으니 간호를 성심껏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려는 심산이라든가.
그래도 전날 저녁부터 먹은 게 하나도 없어 속이 빈 참이라 죽 그릇을 비우는 손놀림은 제법 분주했다.
“자, 이만하면 됐지?”
마음은 복잡하지만 결국 궁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운 연주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실은 뭐가 그렇게 기쁜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릇을 치웠다.
연주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식사를 마치셨는가?”
“전하께선 평소 식사를 경수당에서 하시지 않고 연무장에서 군사들과 함께하시옵니다. 하여, 소인보다는 양 공공이 사정을 더 잘 알 것이옵니다.”
“그럼 전하께서 드실 약은?”
“아직이옵니다. 하오나 지금쯤이면 약이 다 달여졌을 테니 심려치 않으셔도…….”
“하면 약은 내가 직접 전하께 올릴 테니 지금 당장 준비해 주게.”
“예, 마마.”
어찌 됐건 연주는 정엽의 술수에 말려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연주의 질문 세례를 받아 낸 아실은 정신없이 경수당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