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40화 (40/161)

40화.

‘미친 건가?’

속절없이 끓어오르는 욕망을 짓밟듯, 조용히 숨을 고르던 정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사내들만 득시글거리는 군영을 제집처럼 여겼기로서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엽에게는 늘 하룻밤의 쾌락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한수에서는 성곽을 쌓고,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을 건너 백융을 궤멸시키는 일이 그랬다.

물론 그의 욕구를 해소해 줄 미인은 강가의 모래처럼 널려 있어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정엽에게는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여자를 안는 악취미가 없었다.

생사에 대한 중압감은 여인들의 교태로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황제의 적장자인 그에게 출신이 불분명하고 과거를 알 수 없는 여자들은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도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이런 잡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어느새 뜨끈하게 뭉친 단전을 인지한 정엽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난감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위기감이지만, 저를 버리고 떠난 여자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순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설마 모르겠지.’

정엽은 연주가 물수건을 교환하느라 돌아선 사이, 침상 한쪽에 놓여 있던 이불 귀퉁이를 단전 아래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수건을 적셔 돌아온 연주는 이번에는 무슨 생각인지 아예 정엽을 끌어안을 것처럼 두 팔을 벌려 다가왔다.

물씬 풍기는 연주의 향긋한 체취에 온 정신이 아찔했다. 정엽은 뻣뻣해진 상체를 뒤로 젖히며 가까스로 연주의 손길을 피했다.

“됐어.”

“됐다고요? 아직 등이 남았는데…….”

어리둥절한 연주 앞에서 더욱 무안해진 정엽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갑자기 붉어진 정엽의 얼굴을 보고 놀란 연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까랑 다르게 얼굴이 붉네요. 그러고 보니 태의가 파상풍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설마 열이 나는 건가요?”

정엽의 노력이 무색하게, 기어코 그의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으며 체온을 가늠하던 연주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연주의 보드라운 손이 몸에 직접 닿자 인내심이 급격히 바닥난 정엽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왜 그래요? 설마 정말 열이 나는 건가요? 태의를 다시 부를까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순진한 얼굴로 종알거리는 연주를 한참 내려다보던 정엽이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한번 연주를 의식하기 시작하니 그녀의 맑은 눈과 붉고 도톰한 입술, 투명한 목덜미와 그 아래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물수건으로 닦는 건 감질나서 성에 차지 않아. 역시 탕에 몸을 담가야겠어.”

“탕에 들어가는 건 안 된다니까요.”

“시중들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장난이든 아니든 이 상황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정엽은 오늘따라 얄미워 보이는 연주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고 침실을 나섰다. 때아닌 꿀밤에 이마를 문지르며 정엽을 쏘아보던 연주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서려 했다.

“어딜 따라오려는 거야. 여기 남아서 침소나 정리해.”

이건 비정상이야. 저 퉁명스러운 표정조차 귀여워 보이다니. 연주를 짜증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던 정엽이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그래도 목욕 시중까지 들라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욕실로 사라지는 정엽의 뒷모습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연주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서다 흠칫 놀랐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합문 근처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소렴자 때문이었다.

“이 대야와 물수건을 좀 치워 주게. 그리고 두꺼운 방석을 하나 가져와 주고.”

“네, 마마.”

방 안의 동정을 살피다가 연주에게 딱 걸린 소렴자는 궁인들을 불러 대야와 물수건을 치우게 했다. 그런 뒤 당장 방석을 가져오라며 수선을 떨었다.

“아, 여기 이 난로도 치우는 것이 좋겠다.”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궁인들은 연주의 명에 따라 능숙하게 난로를 치우고 창문을 연 뒤 침실 곳곳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 침상은 내가 정리할 테니 그냥 두게.”

“예? 예…….”

이제 더는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도 아닌데 어찌 이러실까. 궁인들의 의아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모든 정리가 끝나 홀로 남은 뒤에야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아까부터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런 일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 무뎌져 가는 과정이겠지.’

정엽과 이혼을 선언하고 갓 세자부로 돌아갔을 때와 비교하면 이쯤은 시련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럼 정리해 볼까.”

이내 연주는 침상 위에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은 얌전히 침상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불은 또 언제 끌어냈는지. 이불의 모서리를 정확히 침상 내 귀퉁이에 맞춰 펼친 연주가 이불 위 주름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거…….”

정리하면 할수록 어쩐지 침상에 펼쳐진 이불이 눈에 익었다.

‘이 이불이 어디서 난 거더라?’

곰곰이 이불의 출처를 되짚어 보던 연주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금 연주가 정리하고 있는 이 이불은 정엽과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용하던 붉은 원앙 이불이었던 것이다.

“이게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침상에 놓인 베개마저 이불과 맞추어 만든 원앙 베개임을 확인한 연주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여실히 묻어났다.

이 원앙금침은 연주가 정엽과 혼인할 당시 그녀의 어머니인 평해왕비가 직접 비단을 고르고 자수를 놓아 마련해 준 것이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연주는 겨울마다 정엽이 지내는 경수당에 이 원앙금침을 깔아 두고 틈만 나면 출정해 왕부를 비우는 정엽을 기다리곤 했다.

“무심한 건지, 아니면 이제 너 같은 건 다 잊었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지…….”

다른 물건은 몰라도 이 원앙금침은 혼인에 얽힌 모든 추억이 아로새겨진 물건. 이제는 이혼한 지도 꽉 찬 두 해가 되어 가는 만큼, 이 원앙금침은 버려지고도 남았어야 했다.

“뭐, 그냥 무심한 거겠지.”

가만히 기억을 헤집어 보던 연주는 선황후의 병환이 깊어져 자신이 상현궁에 입궁한 것도, 정엽이 병이 났다는 곽 귀비의 말에 속아 한수로 달려간 것도 모두 겨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왜 안 챙겼을까. 다른 건 다 챙겼으면서.”

그렇게 해서라도 잊고 싶었던 걸까?

혼인 생활은 엉망으로 끝이 났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이불을 남겨 두고 떠난 나도 무심하긴 매한가지라고 생각하던 연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렇게 무심하면서 나한테만 까탈스럽지.”

분풀이하듯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긴 연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혼한 부인이 남기고 간 이불을 아무렇지 않게 덮고 자는 건 조금 너무한 것 아닌가?

“아휴, 말해 봤자 입만 아프지. 어? 그런데 저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정돈된 침상을 다시 한번 살피던 연주가 황망함에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는 연주가 신혼 시절 경수당 침상 머리맡에 일부러 가져다 놓았던 작은 경대가 그녀의 눈길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왜…….”

경대 서랍 안에는 연주가 사용하던 화각빗과, 빗을 적실 계화유가 담긴 작은 병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참 미련했지. 눈을 감으나 뜨나 정엽 앞에서는 그저 고운 모습만 보여 주고파서 새벽녘에 몰래 일어나 머리를 새로 빗고, 눈썹을 그리고…….

“그때는 왜 그랬나 모르겠네.”

자조하듯 읊조린 연주가 쓰게 웃으며 경대를 덮었다. 하지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정엽은 이렇게 내가 쓰던 물건들을 그대로 두고도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과 추억들이 아무렇지 않은 거야?’

아니, 아니다. 그만하자. 이토록 무심하니 나를 말 한마디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거겠지.

소정엽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지난번과 같은 결론을 내린 연주가 침상에서 내려와 습관처럼 침실 한쪽에 놓인 향로 뚜껑을 열어 그 안을 확인했다.

“역시 텅 비었네.”

잠시 망설이던 연주는 항상 패용하고 다니는 금사향갑 속 훈향을 향로에 털어 넣었다. 그런 뒤 종이를 꼬아 만든 심지로 황촉 불을 옮겨 와 불을 댕겼다.

이윽고 대나무 모양으로 섬세하게 투조된 향로에서 심신을 안정시키는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연주는 예전에 그랬듯 목영벽 안쪽에 서서 정엽을 맞았다.

“팔 좀 봐요. 새로 연고를 발라야죠. 붕대도 다시 감고요.”

“필요 없어.”

침의 차림으로 돌아온 정엽은 처음부터 다친 적이 없는 사람처럼 편하게 침상에 누웠다. 하지만 정엽이 뭐라든 환자는 환자라 연주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설마 상처에 물이 닿은 건 아니죠?”

“알아서 잘 처신했으니 걱정 마.”

이대로 두면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 연주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그것만은 여전하다는 걸 아는 정엽이 대수롭지 않게 이불을 끌어 덮었다.

“걱정하지 말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무슨 애도 아니고. 퉁명스러운 정엽의 태도에 긴 한숨을 내쉰 연주가 침상의 휘장을 내렸다. 그러고는 소렴자가 가져다 놓은 방석을 침상 끄트머리 바닥에 깔고 궁인들이 번을 설 때처럼 방석 위에 웅크려 앉았다.

“가지가지 하는군.”

반투명한 휘장 너머로 연주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정엽이 도로 몸을 일으켜 신경질적으로 휘장을 걷었다.

“청승맞게 뭐 하는 짓이야?”

“시중을 들라면서요.”

“내가 산송장으로 보여? 쓸데없는 짓 말고 네 처소로 가서 잠이나 자.”

“여기 내 처소가 어디 있어요? 설마 매일 세자부와 연왕부를 오가라는 뜻은 아니죠?”

그렇게 대답하는 연주의 얼굴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말갛기만 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연주 때문에 말문이 막힌 정엽은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연왕부가 천궁처럼 만 칸의 대저택은 아니더라도 빈방은 많아. 어디로든 가서 자.”

“내가 오늘 자고 싶은 곳은 이 방이에요.”

“뭐?”

예상치 못한 대답 앞에 정엽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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