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39화 (39/161)

39화.

하지만 정엽의 속내를 모르는 연주는 순진하게 설득을 이어 나갔다.

“내 동생은 장차 조정의 동량으로 쓰일 아이예요. 그런데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죄를 뒤집어쓰면 어떻게 되겠어요? 게다가 폐하께서 내리신 옥패는 단지 사면의 의미가 아니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정엽은 일부러 더 불퉁하게 대꾸했다. 조급해진 연주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황제가 평해왕에게 금패영전을 내릴 때만 해도 그 고귀한 특권은 신하에 대한 신뢰나 총애, 장수로서의 영예를 상징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황제가 평해왕부를 무너뜨릴 기회만 엿보고 있는 지금, 금패영전은 평해왕 일가의 목숨 줄 그 자체. 따라서 금패영전을 사용한다는 건 평해왕부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이는 연주가 영항에 갇혀서도 특권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동생의 목숨과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얻은 옥패 모두를 지키고 싶어요. 내가 어찌하면 동생을 풀어 줄 거죠?”

“언제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욕을 하더니. 이젠 그런 사람에게 자비를 구하는 건가?”

“그래요.”

실소를 터뜨린 정엽이 연주의 결연한 얼굴을 감상하듯 천천히 훑었다. 예상보다 싱거운 승리였지만, 그렇다고 연주가 원하는 걸 쉽게 내주고 싶진 않았다.

“내 자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싼데?”

“동생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흐음…….”

내가 수도로 귀환한 후 채연주가 이토록 저자세로 나온 적이 있었나?

좀 전과 다른 흥미가 생긴 정엽이 고심했다. 그는 사냥감을 희롱하는 맹수처럼 나른하게 눈을 빛냈다. 반면, 연주는 불안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내 시중을 들어. 양해 대신 지극정성으로.”

“시중이라고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처음도 아니고.

이죽거리는 정엽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새삼스럽게 과거 일을 하나하나 따져 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더는 아내라 부를 수도 없는 연주에게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건…….”

“왜? 못 하겠어?”

사실 정엽도 알고 있었다. 황족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못지않은 긍지를 가진 연주에게 그의 무례한 언행이 제법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정엽은 연주가 그의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연주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좋아요.”

“…….”

“할게요.”

이제 당황하는 쪽은 정엽이었다. 연주에게 형제들의 안위가 중요하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스스럼없이 굴욕을 자처하는 연주의 모습은 놀랍도록 낯설고 또 익숙했다.

‘1황자 소정엽과의 이혼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변한 것은 너인가. 혹은 나인가.

정엽은 아주 잠깐 연주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마주 선 연주의 얼굴이 너무나 태연했기에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 보죠?”

“동생 일이라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질 태세로군.”

“내 동생 때문에 다친 사람을 간호하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또 당신이 직접 제안한 일이잖아요.”

정말 그게 다일까?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던 정엽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침상을 벗어났다.

“난 이제 씻어야겠어. 그렇게 멀거니 서 있지 말고 욕실에 가서 목욕물이나 받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상념들도 함께 녹아 사라지리라.

“안 돼요.”

하지만 정엽이 어떻게 생각하든, 연주는 곧장 양팔을 넓게 벌리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다친 사람이 목욕이 웬 말이에요. 아까 태의가 상처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했던 걸 잊었어요?”

“그럼 나더러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잠자리에 들라는 건가? 땀에 젖은 채 침소에 드는 건 질색이야.”

허구한 날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면 제대로 씻지 못하는 날이 많았을 텐데,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깔끔하게 구는 건지. 정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흘겨보던 연주가 무심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척박한 땅을 지키는 장수라기에 걱정이 앞섰는데 생각보다 멀끔하시네요?’

‘아무리 한수라고 해도 매일 전쟁이 일어나진 않아. 여인들처럼 치장할 정신은 없어도 내 몸 하나 건사할 틈은 있어.’

변방에서의 정엽은 늘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저택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흙먼지를 씻어 내고 정돈된 상태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때는 앞으로 보나 모로 보나 잘생기고 늠름하기만 한 정엽의 모습에 마음을 뺏겨 그가 땀에 절어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조차 멋지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색에 잠겨 멀거니 정엽의 얼굴을 바라보던 연주가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줄 테니 목욕은 포기해요.”

“내 시중을 들겠다면서?”

“당신이 거기에 덧붙였잖아요. ‘지극정성’으로 돌보라고요. 환자를 수발드는 사람이 환자가 병세를 회복할 수 있도록 애쓰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하아, 귀찮군.”

고분고분 시중을 들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깐깐하게 구는 건지. 문득 만사가 귀찮아진 정엽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최근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엽을 몸소 겪은 연주로서는 아우의 구명을 위해 정엽이 요구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가 나중에 가서 꼬투리를 잡으며 말을 바꿔 버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게다가 목욕 시중을 들려면 벌거벗은 정엽과 마주해야 할 텐데, 차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것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밖에 누구 있는가? 뜨거운 물과 비단 수건을 준비해 주게!”

연주는 짜증스러운 정엽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친숙한 얼굴의 궁인들이 줄줄이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담긴 대야와 비단 수건, 난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마, 말씀하신 것들을 모두 준비해 왔사옵니다.”

“소렴자 네가 참 세심하구나.”

궁인들이 들여온 물건을 점검하던 연주가 시키지 않아도 난로를 챙긴 소렴자를 칭찬했다.

수도 조양은 한수에 비하면 한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한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겨울 날씨를 만만하게 봤다간 된통 고생하기에 십상이었다.

“경수당 주변을 물릴까요?”

“주변을 물리다니. 어찌하여?”

“아니, 그……. 예.”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한방에 있는데 벽에 쫑긋 세운 귀 수십 개가 붙어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미련 가득한 눈길로 정엽과 연주를 번갈아 보던 소렴자가 입맛을 다시곤 궁인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사이 정엽의 몸을 닦는 동안 그가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난롯불부터 점검한 연주는 비단 수건 여러 장을 대야에 넣어 적신 뒤, 침상에 걸터앉은 정엽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혹시라도 정엽의 심기를 건드리면 모든 게 끝. 어쩌면 이 첫 시중으로 아우의 구명 여부가 결정될지도 모른다. 긴장한 연주가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얘기하세요.”

현재 파악된 상흔의 위치는 왼팔. 하지만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상흔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엽에게 당부를 마친 연주는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정엽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비단 스치는 소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소음의 전부인 것처럼 방 안을 메웠다.

‘이제 이런 시중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턱 밑을 간지럽히는 연주의 숨소리에 무안해진 정엽이 작은 정수리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똑같이 남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것뿐인데, 태감들이 시중들 때와는 또 다른 묘한 감흥이 올라왔다.

반면 연주는 무척이나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옷고름을 쥐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더니…….’

과거 어쩌다 그의 옷고름을 쥐게 될 때면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손끝을 바들바들 떨던 연주였다. 한데 지금은 재미없는 책을 읽듯 무심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는 연주를 마주하노라니 좀 전의 감흥이 파삭 깨지는 기분이었다.

‘예전의 채연주는 이제 없다는 건가?’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인 정엽은 마치 연주를 감시하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 연주는 정엽이 저를 빤히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의 옷고름을 모두 풀었다.

‘후우…….’

연주는 첫 관문을 무사히 넘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삼켰다. 이어서 물수건의 온도가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확인한 연주는 수건을 힘껏 비틀어 적당히 물기를 짜냈다. 그러곤 어깨에 가볍게 걸쳐진 정엽의 옷자락을 조금씩 들쳐 가며 그의 몸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다부지고 너른 어깨부터 시작된 손길은 목덜미를 따라 올라갔다 천천히 내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수건의 촉감에 한 번, 뻣뻣한 뒷목과 뭉친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에 또 한 번. 긴장이 풀려 나른한 기분에 휩싸인 정엽이 눈을 감았다.

‘꼭 물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나쁘지 않네.’

이대로라면 곧장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애써 정신을 붙잡고 있던 정엽이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목과 어깨를 닦아 주고 내려온 나긋한 손길이 바윗돌처럼 탄탄한 가슴을 간지럽히더니, 그 아래 근육이 뭉친 아랫배로 내려가 선명하게 파인 복근의 윤곽을 어루만지기 시작한 것이다.

‘손수건을 두고 몸에 직접 손을 댈 리 없는데.’

비단 수건이 너무 얇은 탓일까. 아니면 비단 수건이 연주의 손만큼이나 부드러운 탓일까. 연주가 맨손으로 제 몸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 정엽의 잇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연랑.’

그 순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깜깜한 두 눈 앞에 연주의 환영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와 달빛만 아는 어여쁜 자태로 맨가슴에 안겨 드는 연주의 모습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오면 내가 너의 곁에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거침없이 사랑을 나누던 그때처럼, 당장 연주의 가는 허리를 꺾어 안고 지독하게 몰아붙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정엽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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