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 시각, 연주는 곧 돌아올 오라비와 동생을 기다리며 세자부에서 그들과 함께할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정원에 곱게 피어난 해홍화 가지를 꺾어 유리홍 화병에 멋들어지게 꽂아 두고, 음식의 종류와 가짓수를 정하고, 음식에 들어갈 식재료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하다 보니 온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도 몇 년 만에 동생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 힘든 내색은커녕, 콧노래를 부르며 식탁에 오르는 음식을 살피는 연주의 모습은 영항 사건 이후 오랜만에 즐거워 보였다.
“전복 요리는 윤이가 좋아하니 거기가 아니라 이쪽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네.”
“아, 사슴 고기는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시니 저쪽으로 놓거라.”
“알겠사옵니다.”
형제들의 식성을 고려해 음식 배치까지 마친 연주는 어느새 어둑해진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오라비 신은 시양공주가 환궁하고 나자 해가 짧은 겨울에도 어둠이 내리기 전에 귀가하곤 했다. 말로는 추운 날 돌아다니기 싫어서라는데, 실은 연주가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걸 경계하는 눈치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아무리 심신이 지치고 힘들어도 사람이라면 우선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인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니…….
“오늘따라 오라버니께서 좀 늦으시는구나.”
“별일이야 있겠사옵니까. 아침에 나서실 때만 해도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걸요.”
“그렇지?”
오늘은 막내 윤이 자미성에 입궁해 황제를 알현한 날. 아우와 회포를 풀어야 한다고 둘러대면 술 한잔 걸치자며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늦는 건지…….
꺼림칙한 예감에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연주가 괜스레 식탁을 돌아보며 식은 음식이 없는지 점검할 때였다.
“군주마마! 군주마마!”
다급한 노복의 목소리에 식탁을 살피던 연주가 부리나케 합문을 열었다. 주인도 없이 돌아온 노복은 연주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오라버니는 어딜 가시고 자네 혼자 돌아온 게야? 윤이는?”
“궁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막내 왕자님께서 연친왕 전하를 해하려 한 죄로 종정사에 투옥되셨어요!”
뭐라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연주가 노복을 다그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윤이 연친왕을 해하려 들다니? 자네가 잘못 알았겠지!”
“자세한 사정은 소인도 잘 모르옵고, 막내 왕자님께서 기린전에서 연친왕 전하께 검을 휘둘러 상해를 입혔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사옵니다.”
“윤이가 그럴 리가…….”
그 순하고 착한 아이가 정엽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제 동생이 사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는 것만도 믿기지 않지만, 불사왕으로 칭송받는 정엽이 그 아이의 형편없는 검술에 다쳤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마마, 사실이옵니다. 벌써 세자 저하께서 어전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께 죄를 청하고 계세요!”
“아유,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이를 어쩌지요, 마마?”
시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연주를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형제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던 연주가 뜻을 굳히고 명령했다.
“당장 마차를 준비하거라.”
“지금 입궁하시려고요? 하면 제가 당장 새 옷을 준비…….”
“궁이 아니라 연왕부로 갈 것이니 염려 말거라.”
이 와중에 어전이 아니라 연왕부로 가시겠다고? 대체 왜?
시녀는 연주가 왜 연왕부로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부리나케 외투를 챙겨 나와 연주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조심히 다녀오시옵소서.”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그리고 준비해 둔 음식은…….”
“음식이야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되지요. 세자 저하와 왕자마마 두 분만 생각하시옵소서.”
“고맙구나.”
시녀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연주는 곧장 마차에 올라 연왕부로 향했다.
일각이 여삼추라. 마부를 재촉해 얼어붙은 겨울 길을 내달려 연왕부의 붉은 대문 앞에 다다른 연주는 전후 사정도 설명하지 않고 곧장 정엽의 처소로 향했다.
“아니, 마마. 이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로…….”
날 듯이 빠른 걸음으로 경수당 합문 앞에 다다른 연주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진 소렴자를 향해 눈짓했다.
좀 전까지 경수당 안의 분위기가 궁금해 안달하던 소렴자는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승설군주께서 급히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어라? 생각보다 쉽게 떨어지는 허락에 당황한 소렴자가 정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말고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문밖에서 소렴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연주는 지금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 이렇게 쉽게 날 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지? 또 소렴자는 제 주인이 다쳤는데 어째서 불안한 기색 하나 없고…….’
한시가 급한 마당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연주는 소렴자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
“마마, 언제 전하의 마음이 바뀌실지 모르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아, 고맙네.”
그저 변덕일 뿐인가. 이 모든 상황을 그저 정엽의 변덕 정도로 정리한 연주가 경수당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걸음으로 응접실과 서재를 지나, 경수당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른 연주는 침실 안쪽을 바로 볼 수 없도록 세워진 목영벽을 돌아 정엽과 마주 섰다.
“연친왕 전…….”
손님이 왔으니 응당 주변이 정리되어 있을 거라 짐작했던 연주는 반쯤 벗은 몸으로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있는 정엽을 발견하곤 황급히 뒤돌아섰다. 정엽은 때마침 태의에게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치료 중이시면 그렇다고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보다시피 다 끝났소만.”
“……?”
정엽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천천히 몸을 돌린 연주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사이 태의는 정엽의 왼팔을 깨끗한 천으로 동여맨 뒤, 치료를 위해 풀었던 옷고름을 고쳐 매어 주고 있었다.
상처는 정엽이 자주 쓰는 오른팔이 아닌 왼팔에 있었고, 상처 위에 감겨 있는 천에 피가 배어나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처 또한 그리 크거나 깊지 않아 보였다.
‘휴, 다행이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빠르게 정엽의 상태를 확인한 연주가 안도했다. 정엽이 상해를 입은 건 분명하나 정도가 심하지 않으니 아우를 구명할 길이 전혀 없어 보이진 않았다.
우선 정엽을 설득해야 황제를 설득하는 일도 수월해지리라.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연주의 머릿속은 백지에 가까웠다.
대체 무슨 말로 저 사람을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을뿐더러, 행여 말을 잘못 골랐다가 정엽의 심기를 거슬러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부담감에 마음이 갑갑해진 연주는 입술을 짓이기며 말을 아꼈다.
“처치는 모두 마쳤사옵니다.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관리하시고, 매일 연고를 바르셔야 하옵니다. 연고를 바르신 뒤에는 반드시 깨끗한 천으로 다시 상처를 감아 주십시오.”
“알았네.”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지만 검에 베여 생긴 것이니만큼 파상풍이 올 수도 있으니 며칠은 잘 살펴보셔야 하옵니다.”
“그러지. 수고했네.”
그래도 같은 공간에 있으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난 연주가 태의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지금 연주가 할 수 있는 건 그뿐, 태의가 물러나고 둘만 남은 방 안에는 금세 적막이 감돌았다.
“…….”
이제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말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정엽의 시선을 의식한 연주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상처가 깊지 않다니 다행입니다.”
“진심인가?”
“……무슨 뜻이죠?”
“네 아우가 내게 검을 휘두를 때, 정말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눈이더군.”
설마 지금 내 동생이 사람을 죽이려 작정하고 덤비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정엽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왜 그를 찾아왔는지조차 잊은 연주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윤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에요.”
“그럴 아이가 아니다? 그럼 네가 내게 원망을 품고 이번 일을 사주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지도 않았겠죠.”
“종종 미련하긴 해도 너는 똑똑한 여자니까. 의심을 피할 방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겠지.”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오해를 풀 수 있는 거지?
연주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정엽은 연주의 말을 듣기도 전에 삐딱한 태도로 그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어차피 평해왕 일가는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받아 평생에 단 한 번, 무슨 죄를 지어도 처벌을 면할 특권이 있잖아.”
“…….”
“너는 차라리 죽기를 택했지만 네 동생은 너처럼 미련하진 않으니 알아서 잘 빠져나올 거야. 그게 네가 바라는 거 아닌가?”
연주의 아버지 채건은 남해의 민가를 약탈하는 해적과 외적을 궤멸시킨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평해왕의 봉작과 함께 금패영전(金牌令箭)을 받았다.
이 금패영전은 죄질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타인의 죄까지 총 세 번 사면받을 수 있는 특권을 상징했는데, 평해왕은 황제에게 청하여 이 특권을 슬하의 세 자녀가 나눠 가지도록 했다.
그 덕에 연주를 포함한 평해왕의 자녀들은 황제로부터 여짐친림(如朕親臨)이라고 새겨진 옥패를 하나씩 하사받아 지니게 됐는데, 정엽은 바로 이 점을 지목한 것이었다.
“그래요. 내가 미련한 거라고 해 두죠. 하지만 내 동생이 이런 일로 옥패를 사용하게 둘 수는 없어요.”
“이런 일?”
고의든 아니든 사람이 다쳤다. 그것도 제 동생에 의해 한때는 남편이었던 사람이.
이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 나서 왕자를 종정사에 가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 망아지 같은 처남은 벌써 목이 떨어지고도 남았을 텐데.
고마움이라곤 모르는 연주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난 정엽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이런 일이라는 게 대체 어떤 의미지?”
정엽은 다친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제 아우만 걱정하는 연주가 괘씸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자기 형제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이 세간이 말하는 우애라면, 채연주는 얼마나 굴욕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