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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37화 (37/161)

37화.

얼마나 긴장했는지 13황자의 목소리가 경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깜찍한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왕자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마마께서 13황자시군요. 소문은 익히 들었사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호오! 그렇소? 본 자의 이야기가 남해까지 닿은 줄은 미처 몰랐소!”

“소신이 남해로 돌아가기 전에 언제든 세자부를 한번 찾아 주시지요. 남해에서 가져온 맛있는 간식을 대접하겠사옵니다.”

“응! 그러리다!”

왕자의 호들갑에 기분이 좋아진 13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정엽은 이 상황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몸만 큰 어린애와 아직 몸도 다 안 큰 어린애의 대화라니 얼마나 하찮고 귀여운가.

‘친근하게 다가가 사람 마음을 사는 재주가 있는 건 남매가 똑같군.’

남매 특유의 뻔뻔한 다정함에 헛웃음 짓던 정엽은 어느새 왕자에게 홀라당 마음을 빼앗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우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정엽의 예상과 달리 왕자의 속셈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좀 전에 연친왕 전하와 멋지게 대련하시던데 검술은 언제부터 배우신 겁니까?”

“사실 목검을 잡은 건 작년부터인데 올해 큰형님께서 돌아오셔서 본 자가 배움을 청했다오.”

“연친왕 전하께서 이토록 다정한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럼 이렇게 만난 김에 제게도 한 수 가르침을 주시겠사옵니까?”

왕자는 공손한 말투로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도 한껏 적개심을 품은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싸움을 걸겠다? 왕자의 속내를 읽은 정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린 아우의 환심을 사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13황자에게 친근하게 대한 것이구나 싶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불쾌하기는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평해왕부를 비롯한 남해 사람들은 모두 누이인 승설군주를 목숨처럼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데, 정엽만은 도통 그 소중함을 모르니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왕자와 대련을 해 본 지도 오래되었군.”

“저를 예전의 어린애로 보시면 큰코다치실 겁니다.”

“그래?”

어느새 왕자의 눈 속에 불꽃이 튀었다. 필시 제 누이가 겪은 고초가 모두 저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생사람 잡지 말라고 일갈해 봐야 소귀에 경 읽는 꼴. 왕자를 생각 많은 눈으로 바라보던 정엽이 다시 목검 두 자루를 찾아 쥐었다.

세자는 당분간 왕자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저 정도의 적개심이 피한다고 알아서 사그라들 리 만무했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벌어질 일이라는 뜻이었다.

“시작하지.”

정엽은 목검 하나를 왕자에게 던졌다. 가볍게 목검을 넘겨받은 왕자는 이내 정엽과 마주 서서 목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굳게 움켜쥐었다.

왕자는 웃음기 가신 얼굴로 정엽과 소리 없는 기 싸움을 벌이다, 곧 목검을 머리 위로 높게 치켜들고 온 힘을 다해 정엽에게 달려들었다.

빡-!

거세게 부딪친 목검을 사이에 두고 잠시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정엽은 온몸의 무게를 실은 왕자의 목검을 떨쳐 냈다. 왕자의 몸은 기세 좋게 달려들던 때와 달리 너무나도 쉽게 뒤로 밀려났다.

단 일합. 왕자는 벌써 얼얼하다 못해 가볍게 떨리기까지 하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사왕이라는 별칭이 허명은 아니었구나. 생각보다 엄청난 힘을 실감한 왕자가 이를 악물었다.

비록 나무로 만든 검에 불과하지만, 이 검은 그리 생각 없이 빼 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꽃다웠던 누이를 버리고 전장으로 도망쳐 버린 파렴치한에 대한 복수. 누이가 겪은 아픔을 조금이나마 갚아 줘야만 했다.

다시 굳게 목검을 움켜쥔 왕자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정엽과의 거리를 벌렸다가 빠르게 달려 가속이 붙은 목검으로 정엽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빠악-!

하지만 정엽의 어깨를 노리고 달려들었던 왕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소리는 아까보다 요란했지만 이번에도 정엽의 목검이 그를 보란 듯이 막아 낸 탓이었다.

정엽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힘을 겨룰 새도 없이 왕자를 떨쳐 냈다. 그 힘에 밀려 아예 목검까지 손에서 놓치고 만 왕자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정엽을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싱겁다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 치켜올린 정엽은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덤덤하게 왕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끝났나?”

“그럴 리가!”

잔뜩 약이 오른 왕자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독기 오른 눈으로 목검을 고쳐 잡은 뒤, 아까처럼 빠르게 달려와 나비처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가속력에 중력까지 더해진 목검은 정확히 정엽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빠아악-!

한데 이번에도 손쉽게 공격을 가로막는 정엽 앞에서 왕자의 목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나 버리고 말았다. 겨루는 양쪽의 힘이 모두 대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하필 제 목검이 부러진 것을 곧 사랑하는 누이의 패배로 받아들인 왕자는 금세 이성이 마비되어 연무장 한쪽에 준비된 무기를 향해 달려갔다.

많은 무기 중 왕자가 택한 것은 나무로 만든 목검이 아니라 강철을 두드려 만든 진검이었다.

스릉-!

검집에 숨겨져 있던 벼린 검날이 황혼 속에서 새파란 검기를 내뿜었다.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다지며 더는 두려울 게 없어진 왕자는 다시 힘껏 정엽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떻게 하지?”

카각- 카각!

넓은 공터에는 어느새 쇠붙이와 나무 닳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난생처음 보는 살기 충만한 광경에 겁먹은 13황자는 발을 동동 구르다 재빨리 기린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금 밖에서 연친왕 형님이랑 남해에서 온 왕자가 싸움이 붙었어요!”

“뭐? 싸움?”

“남해에서 온 왕자라면…….”

기린전에 함께 있는 채신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던 황족과 귀족 자제들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린전을 뛰쳐나갔다.

‘윤이 이 녀석이 결국!’

감히 황족과 맞서 싸우는 간 큰 위인이 제 아우임을 확신한 채신은 허겁지겁 연무장으로 달려 나가 언성을 높였다.

“윤아! 당장 검을 거두어라!”

“싫습니다!”

왕자는 평소 하늘같이 모시던 형님의 호통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진검을 들고도 여전히 정엽을 꺾지 못한 왕자의 마음속에는 살의가 꽃핀 지 오래였다.

이제 정엽의 목검을 부러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반드시 그의 머리를 잘라 누이에게 바치리라! 각오를 다진 왕자는 다시 진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거 곤란하겠는걸.’

연무장 주변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든 인파를 흘끗 확인한 정엽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왕자가 진검을 빼 든 순간부터 제 목검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지는 것만은 예상 밖의 변수였다.

‘목검이 부러질 때까지만이라도 실컷 분풀이하게 둘 생각이었건만.’

정엽은 슬슬 이 싸움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손에 무기가 있든 없든 그는 얼마든지 왕자를 제압할 능력과 자신이 있었다. 다만 황제의 적장자를 향해 진검을 빼 들 만큼 분노가 깊은 왕자에게 다시 처절한 패배를 안기는 건 들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았다.

‘이 성가신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정엽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왕자는 지치지도 않은 듯 다시 검 자루를 고쳐 잡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찰나에 거리를 좁힌 왕자를 목격한 정엽은 몸을 뒤로 물리면서도 왕자의 칼끝이 정확히 제 팔뚝을 스치도록 치밀하게 움직였다.

“전하!”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엽의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놀란 채신이 검을 쥔 아우의 손을 정확하게 걷어차며 윤을 빠르게 제압했다. 허공을 날아 돌바닥에 떨어진 진검은 카랑카랑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큰일이다. 감히 황족에게 칼을 겨눠 상해를 입히다니!

다급해진 채신은 아우가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태어나 처음으로 형에게 얻어맞은 왕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석상처럼 굳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게 다 아우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왕자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채신은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왕자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매의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6황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자가 아우를 위해 나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사죄로 끝날 일이 아니오. 감히 황자들이 수학하는 기린전에서 형님 전하를 시해하려 하다니!”

“6황자의 말이 옳다. 세자, 이번 일은 대역죄로 다스려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시해라니. 6황자의 발언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6황자가 누구인가. 정엽과 왕세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헌왕을 떠받드는 황자가 아닌가.

6황자는 이 일을 이용해 헌왕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 속셈이리라. 처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예상하고 아우의 뺨까지 쳤던 채신은 6황자의 말에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아우의 죄는 소신이 대신 지겠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소신의 아우만은 살펴 주시옵소서, 전하.”

부상을 입고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서 있던 정엽은 물끄러미 친우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사태를 마무리 지어야 할 때였다. 정엽은 왕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죄를 인정하느냐?”

“…….”

“네 죄를 인정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왕자는 정엽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누이를 생각하면 절대로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

왕자는 거듭된 물음에도 침묵을 택했다. 정엽이 말을 이었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니 별수 없구나. 지금 당장 왕자를 종정사에 가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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