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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36화 (36/161)

36화.

봉황이라. 터무니없지만 저 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바다처럼 푸른 장식깃과 샛노란 정수리, 녹음을 닮은 녹색 턱과 홍염처럼 붉은 날개, 여름 햇살 같은 길고 풍성한 꽁지깃을 가진 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 독특하여, 절로 설화 속 신수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왕자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이 새가 바다 건너 처음 해광성에 들어왔을 땐 부왕과 소신도 꼼짝없이 그런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한데 선원들에게 물어보니, 이 새는 대나무 열매를 먹지도 않고 본래 사는 곳 또한 대숲이나 오동나무 숲이 아니라고 하더이다.”

“하면 이 새의 이름이 무엇이냐?”

“부왕께서 봉황은 아닐지라도 극락에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새라시며 ‘극락조’라고 이름 붙이셨사옵니다.”

“극락조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로다.”

“부왕께서 이토록 진귀한 새가 살 수 있는 곳은 천자께서 계신 자미성뿐이라며 소신을 통해 올려 보내신 것이옵니다.”

“하하! 평해왕의 뜻이 아름답구나!”

왕자의 말재간에 한껏 흥이 오른 황제가 무릎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러고는 태감을 불러 무언가 명하려다 말고 왕자에게 손짓해 가까이 오게 했다.

“짐이 네 아비에게 선물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는데 무엇이 좋을지 모르겠구나. 네 부왕이 좋아할 만한 게 있다면 짐에게 귀띔 좀 해 다오.”

“폐하께서 평소 저희 일가를 넘치게 대우해 주시는데 더 바랄 게 무에 있겠사옵니까? 부왕께선 항상 폐하의 은혜를 깊이 새기고 계시옵니다.”

“암! 그래야지!”

황제의 반응에, 해광성을 떠나기 전 저를 앉혀 놓고 신신당부하던 부왕의 말을 떠올린 왕자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제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의심이 자라고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구나.’

애써 긴장을 감추고 있지만, 말 한마디에 생사가 오갈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겪은 왕자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황제는 왕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건 흥이 식지 않아 연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천자 체면에 이토록 훌륭한 선물을 가져온 너를 빈손으로 내려보낼 수야 있느냐. 짐이 답례를 정할 때까지 수도에 남거라.”

“정녕 그리해도 되겠사옵니까?”

“오냐. 세밑이니 네 형제들과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형님과 누님을 본 지 오래되어 잠시라도 수도에 머물고 싶었사옵니다. 한데 폐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니 아예 눌러앉아 후년에나 돌아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정엽과 연주를 이혼을 허락한 후 이토록 즐거워할 일이 없었던 황제는 왕자가 어떤 말을 해도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 네 장기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던데. 네가 수도에 있으면 짐도 너와 자주 장기를 둘 수 있으니 나쁘지 않겠구나. 수도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입궁하며 짐의 맞수가 되어 다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그래. 하면 남해에서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쌓였을 테니 이만 세자부로 돌아가 푹 쉬거라.”

“예, 폐하.”

황제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춘 왕자가 등을 보이지 않고 상양궁에서 물러났다.

수도에 온 목적대로 황제의 환심을 사 나가는 길, 분위기를 살피며 왕자가 나오길 기다리던 어전 태감이 알은체했다.

“소인이 궁문까지 배웅해 드리겠사옵니다.”

“아닐세. 기왕 입궁한 김에 형님과 함께 돌아가고 싶은데 혹시 형님이 어디 계신지 아는가?”

“오늘은 기린전에서 강학이 있는 날이라 왕세자 저하께서도 그곳에 계신 줄 아옵니다. 곧 강학이 끝날 시간이니 함께 퇴궁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그리로 안내해 주게.”

“예.”

황궁에서는 보기 드문 흐뭇한 우애로구나. 태감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기린전 방향으로 앞서 나갔다. 왕자는 태감의 뒤를 따라 황궁의 화원을 지났다.

궁 안으로 온천수를 끌어들인 덕분에 옅은 안개가 낀 화원은 한겨울에도 기화요초가 자라 선계처럼 아름다웠다. 왕자는 계절을 분간하기 어려운 절경에 감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해광성에서 진귀한 것을 자주 접해 본 그에게도 자연의 섭리를 희롱하는 황실의 위엄은 색다른 충격이었다.

이윽고 왕자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기린전 근처에 다다라 어전 태감에게 정중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여기까지 안내해 주어 고맙네.”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기뻐하시면 소인도 기쁘지요. 폐하께 기쁨을 드리는 분께 성심을 다하는 것 또한 소인의 책무인 것을요.”

어전 태감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리를 굽힌 뒤 총총 멀어졌다. 홀로 남은 왕자는 곧장 기린전 경내로 들어섰다. 그런데 때를 잘못 맞춘 것인지, 기린전 앞마당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직 강학이 끝나지 않은 건가?”

좀 전에 어전 태감을 대할 때와는 달리 장난기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한 왕자가 기린전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해왕의 막내아들로 자라며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게 되었을 뿐, 본래 지루한 상황을 단 일각도 견디지 못하는 그였다.

딱! 딱!

그때, 기린전 뒤편에서 무언가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질거리는 몸을 이기지 못한 왕자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소나무가 호위병처럼 빙 늘어선 공터에는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풍채를 가진 장신의 사내와 땅딸막한 어린 소년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오랜 수련과 무수한 전투로 다져졌을 법한 다부진 몸의 사내는 소년이 휘두르는 목검을 받아 주며 가볍게 대련하는 중이었다.

“흐음, 한쪽은 보나 마나 황자일 거고. 다른 한쪽은…….”

턱까지 괸 채 진지한 표정으로 사내와 소년을 살피던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풍채에 빛바랜 낡은 무복이라. 황자를 가르칠 정도면 공적은 있는 무관이겠는데. 가문이 별로인가?’

귀한 황자의 고집에 못 이겨 무예 스승이 적당히 비위를 맞춰 놀아 주고 있는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추측을 마친 왕자는 저보다 몇 배는 큰 스승을 이겨 보겠다고 애쓰는 소년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딱, 딱, 목검이 부딪는 소리가 날카로워질수록, 윤은 이것이 적당한 놀이 분위기가 아님을 감지했다.

“검 자루를 더 세게 쥐거라. 자꾸 아귀에 힘이 풀리면 그 검이 너를 해칠 것이다.”

서로의 체격 차이를 볼 때 황자는 제 목검을 쥐고 사내가 가볍게 대어 주는 합의 반동을 버티는 것만 해도 용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단정하고도 엄한 목소리로 어린 황자를 재우쳤다.

‘꽤나 엄격한 스승이로군.’

하지만 아무리 좋은 스승이라도 제자가 가르침을 따라오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다. 황자는 이제 완전히 아귀힘이 풀린 듯, 허공에 잠자리채를 휘두르는 것처럼 절도 없이 목검을 휘둘러 댔다.

“저래서야 귀한 황자께서 버티시겠어?”

왕자는 이러다 황자가 대련이고 뭐고 집어치우겠다며 연무장을 뛰쳐나가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상대가 아무리 어리고 지쳐 있어도 매 순간 어깃장을 놓듯 방향 잃은 검에도 목검을 휘두르며 강제로 합을 맞춰 나갔다.

“아얏!”

결국 제가 휘두르는 목검의 무게와 목검이 부딪치는 반발을 이기지 못한 황자가 나가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내는 황자에게 손 한번 내밀지 않고 다그쳤다.

“일어나거라.”

사내의 어조는 단조롭고 목소리도 낮아서, 화가 나거나 흥분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얼음처럼 차갑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마치 적을 겨누는 장수의 검처럼.

“근데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헤집어 보던 왕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내의 목소리와 딱 맞아떨어지는 불쾌한 얼굴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사내가 왕자의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젠장!”

연왕 소정엽! 사내의 정체를 확인한 왕자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의 청년을 발견한 정엽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적의에 가득 찼지만 정작 토끼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할 것 같은 순한 눈매가 익숙했다.

‘설마……?’

이윽고 청년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세운 정엽이 그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탄식했다. 청년의 눈은 분명 정엽이 아는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왕자가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

왕세자 채신과 승설군주 채연주의 남동생, 채윤.

몇 년이 지나도 정엽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채윤은 시집가는 누이의 치마폭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아이였다. 그 꼬맹이가 몇 년 사이에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컸다니.

키가 훌쩍 큰 왕자를 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정엽이 흙먼지를 털고 일어난 황자에게 목검을 건넸다.

“오늘 대련은 이걸로 끝이다.”

“네, 형님.”

대답만 씩씩하게 한 황자는 목검 두 자루를 끌어안고 정엽과 왕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쭈뼛거리며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바윗돌에 슬며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군.”

왕자는 정엽이 저를 알아보는 것이 달갑지 않아 잠시 성난 표정으로 먼 하늘가를 보았다. 하지만 친왕씩이나 된 위인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왕자는 제 형처럼 서글서글한 얼굴로 정엽을 향해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가는 길에 형님과 함께 돌아갈까 해서요.”

“아하!”

“그런데 저분은 누구……?”

왕자가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소년을 가리키고는 정엽에게 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황자는 무안한 듯 귓불을 붉히며 입을 꼭 다물었다. 정엽은 그런 아우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인사 나누거라.”

황자는 앉아 있던 바윗돌에서 폴짝 뛰어내려 와 정엽의 등 뒤에 몸을 숨긴 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음, 나는 13황자…….”

“사내 녀석이 이렇게 부끄럼이 많아서야 어디에 쓰겠느냐. 앞으로 나와 제대로 인사하거라.”

“아직 어리신데 그럴 수도 있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 정훈, 어서.”

정엽의 완고한 태도에 밀린 황자는 머뭇머뭇 정엽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무언가 큰 결심을 세운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갑자기 뻣뻣하게 뒷짐을 지곤 제법 어른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13황자 소정훈이고, 새해가 되면 열 살이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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