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정말요?”
“네.”
“그럼 나 새언니라고 부를래! 나한테 소중한 새언니는 딱 한 사람뿐이니까!”
입궁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건 아니지만 다시 전처럼 연주를 새언니라 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시양이 조잘거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새언니라는 단어에 신비한 힘이라도 깃들어 있는 것일까. 금세 본래의 사랑스럽고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공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주가 울컥했다.
황실에는 장성하여 혼인한 황자가 여럿이라 공주가 새언니라고 부를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저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어? 새언니 울어요? 왜 울어요?”
“울긴요.”
“아닌데. 우는데. 시양이가 뭐 잘못했어요? 시양이가 새언니라고 불러서 그래?”
연주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눈치 빠른 시양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불안해하는 공주의 등을 토닥인 연주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공주마마와 함께 있으니 좋아서요. 내일은 눈이 올 것 같으니 지난번에 약속했던 대로 눈사람을 만들어 볼까요?”
“응, 시양인 눈사람 만드는 거 좋아. 근데에 아직 새언니 손이 다 안 나았는데?”
“장갑을 끼면 되니 괜찮아요.”
“그럼 우리 내일 정말 눈사람 만드는 거예요? 약속!”
공주의 성화에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연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뜻 없이 꺼내 본 말이었지만 어느덧 창밖에는 하늘의 선물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포근한 함박눈, 턱밑을 간질이는 보드라운 머리카락, 가슴을 덥혀 주는 공주의 체온. 연주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음 밑을 흐르는 냇물처럼, 가슴을 차갑게 만들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 * *
그 시각, 세자부 정방.
왕세자 채신과 마주 앉은 정엽이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찻잔을 술처럼 연거푸 비우는 정엽 때문에 신은 그의 잔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도 실력이라면 저보다 연주가 더 뛰어납니다. 이렇게 차를 좋아하시는데 누이에게 대접이라도 받고 오지 그러셨습니까.”
“아픈 사람 부려 먹는 악취미는 없어.”
그냥 들으면 불만 같아 보여도 실은 그게 다 걱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이 웃으며 다시 정엽의 빈 잔을 채웠다.
“영항에서 제 누이를 구해 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정엽의 대꾸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신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한데 연주를 구하고 영항령을 처리한 것까진 좋은데, 왜 헌왕이 된서리를 맞은 것입니까? 헌왕이 연왕부에서 돌아온 뒤로 칭병하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또 잔소리하려는 모양이군.”
“그럴 리가요.”
신의 부정에도 이미 심기가 불편해진 정엽은 생각만 해도 불쾌한 아우의 얼굴을 떠올리곤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고작 무희의 아들 하나가 무엇이관대 자신이 이토록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정엽에게 있어 헌왕은 이무기는커녕 이무기의 꼬리조차 되지 못하는 형편없는 위인이었다. 승냥이 떼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주제도 모르고 제게 발톱을 세우니 얼마나 귀찮은지.
“이미 다 알고 있지?”
“음, 너무 티가 난 것 같군요.”
“너나 네 누이나 거짓말은 못하니까.”
“제 누이가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채신이 적당히 식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앗뜨!”
“뜨거운 걸 못 먹는 건 여전하군.”
다 식어 가는 차를 마시면서도 뜨거워 어쩔 줄 모르는 신을 향해 정엽은 놀리듯 한마디 보태고는 빈 잔을 툭툭 치며 벗을 재촉했다.
“전하와 차를 마시면 차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굼뜬 거다. 그보다…….”
“왜요?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놀라셨습니까?”
정엽은 타고난 지배자였다. 누구처럼 쭉정이들이나 몰고 다니며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우러러보는지 확인하려 드는 법이 없었다.
이를테면 정엽은 젊은 시절의 황제를 닮았고, 헌왕은 지금의 황제를 닮았달까.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신이 태연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 호랑이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때로는 존재감을 드러내 헌왕의 기를 꺾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뭐가 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야.”
대놓고 황위 쟁탈전에 뜻이 없음을 피력한 정엽이 지루한 설교를 거부하듯 몸을 뒤로 기댔다. 그럼에도 신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헌왕에게 전하의 미래를 맡기시려는 겁니까?”
“…….”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 권력 투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만일 헌왕이 전하를 제치고 옥새를 차지하게 된다면 전하의 앞날은 치욕뿐이겠지요.”
“…….”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거 압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셔야 해요. 지금 헌왕은 유력한 태자 후보이고, 전하께서는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오래된 설화 속 영웅처럼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채신의 연이은 설득에도 정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헌왕은 자신의 적수가 못 된다고 여기는 정엽으로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아우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헌왕보다는 수도에 꼼짝없이 붙잡혀 황제와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 더 신경 쓰였다.
“다음번에는 화가 나면 그냥 꼴 보기 싫은 놈 머리 위에 벼락을 내려 버리십시오. 아니면 비라도 한바탕 퍼부으시든가요. 용손 아니십니까.”
점점 험악해지는 정엽의 표정을 지긋이 바라보던 채신이 농담을 던졌다. 정엽에게 이처럼 허무맹랑한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채신뿐이리라.
“지금 농담이 나와?”
정엽에게서 끝내 실없는 웃음을 끌어낸 신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지금껏 연주가 왜 전하와의 이혼을 선택했는지 몰랐습니다. 한데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주의 마음에 남은 상처가 깊기야 하겠지만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나아가십시오.”
과연 그 깊은 절망을 신이 달래 줄 수 있을까. 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엽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더는 네 누이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것보다는.”
“보다는?”
“조만간 윤이가 올라올 겁니다. 그 아이와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점점 더 어려운 것만 요구하는군.”
채신과 채연주의 막냇동생 채윤은 누이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제 형보다 한 수 위인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피한다고 피해지기나 할까. 피한다고 도망을 다니면 아예 연왕부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도 남을 놈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피해 보십시오.”
“애써 보지.”
마지못해 대답한 정엽이 어느새 텅 빈 찻주전자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또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 * *
그로부터 보름 후, 평해왕의 막내아들 채윤이 수도에 도착했다. 누이 승설군주의 일로 한바탕 난리가 날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왕자는 수도에 입성하자마자 상양궁으로 직행해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 참으로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형제들과 떨어지기 싫어 눈물을 보이던 아이가 이리 장성하다니. 짐도 늙었구나.”
“폐하께서는 만세를 누리실 것이옵니다.”
“허허, 제법 말솜씨도 늘었군.”
우연히 황제의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왕자가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는 덕인지, 황제는 오늘따라 왕자를 제 막내아들 대하듯 했다.
“새해에는 소신도 열아홉이 되옵니다. 하오니 소신의 부끄러운 과거는 모두 잊어 주시옵소서.”
“하하. 벌써 그리되었느냐? 하면 평해왕 내외도 그만큼 늙었겠군. 왕부의 사정은 어떠하냐?”
“폐하께서 돌봐 주신 덕분에 모두 무탈하옵니다. 아, 참. 부왕께서 폐하께 전하라는 서찰이 있었사온데…….”
능청스레 대화를 이어 가던 왕자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상석 아래 어전 태감에게 전했다.
귀한 아들까지 올려 보내며 바치는 서신이라. 황제는 전에 없이 인자한 얼굴로 태감에게 서신을 건네받아 펼쳐 들었다.
[신의 미욱한 딸 때문에 폐하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근래 남해는 해적과 외적의 침입이 사라지고 해상 무역이 성행하여 먼 나라에서까지 진귀한 물건과 동물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여러 보물 중 가장 진귀한 것을 남해의 평안 징표로 헌납하오니 부디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여러 보물 중 가장 진귀한 것이라? 호기심이 발동한 황제가 서신을 갈무리하며 왕자를 채근했다.
“대체 평해왕이 무얼 올려 보낸 것이냐?”
“폐하께 진상할 선물을 안으로 들이거라.”
왕자는 대답 대신 진상품을 들이라며 합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여섯 사람이 겨우 들 정도로 거대한 물체가 붉은 비단에 싸인 채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선물이기에 이토록 커다란 것이냐?”
“이것은 지금껏 아무도 곁에 두지 못한 보물이니 폐하께서 손수 비단을 거두시어 확인해 보심이 어떠실는지요?”
“하하! 왕자의 꾀주머니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러다 짐이 실망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단언컨대 그러실 리 없사옵니다.”
왕자의 호언장담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더욱 기대감이 높아진 황제가 소매를 떨치며 상석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왕자가 건네는 붉은 비단 끝자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흘러내린 비단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높이가 8척에 달하는 황금 새장과, 새장보다 더 오색찬란한 깃털을 가진 거대한 새였다.
“이, 이건……!”
선물의 정체를 확인한 황제와 어전 태감들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는 제 미모를 뽐내듯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영롱한 울음소리로 홰를 치고 있었다.
“지금 짐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설마 봉황인 것이냐?”
황제의 하문에 기대에 찬 태감들의 시선이 왕자에게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