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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34화 (34/161)

34화.

별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세련되고 멋스럽게 가꾼 향나무와 백송 나무가 조화롭게 자라고 있었다. 또 판석을 깐 길옆에는 한겨울에도 푸릇한 맥문동이 길게 심겨 있었다.

“어? 맥문동이다!”

“맥문동을 아느냐?”

“네!”

맥문동의 잎은 물가에 흔히 자라는 난초를 닮아서,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여름을 빼고는 그 정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조금 놀란 정엽이 되묻자 시양이 말간 얼굴로 대답했다.

“새언니가 알려 줬어요! 왜냐며언 맥문동은 약으로도 먹는 착한 식물이거든요!”

저와는 한참 나이 차가 나는 오라비에게 실컷 아는 척을 한 시양이 뿌듯한 얼굴로 앞서 걸었다. 하지만 정엽이 생각하기에 공주가 맥문동을 알아보는 건 태감이 글을 배우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이었다.

‘공주에게 별걸 다 가르쳤군.’

심드렁한 얼굴로 걷다 보니 어느새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알리는 화려한 수화문(垂花門)이 나타났다. 그런데 수화문 너머 뜰에 가득 심긴 나무는 평소 꽃과 나무에 관심이 없는 정엽의 눈에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이건…….”

빨간 꽃잎에 노란 꽃술, 윤이 나는 둥근 잎.

겨우내 화로를 끼고 자라 수줍게 꽃망울을 틔운 나무 앞에서 정엽이 고개를 기울였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연주는 이 꽃을 편지지며 갑옷 안에 표식으로 남겨 두길 좋아했었다.

“오라버니, 이건 해홍화(海紅花)예요.”

“해홍화?”

“네! 해홍화는 꽃이 시들지 않고 떨어지는데, 향기는 바다 끝까지 퍼질 만큼 진하대요.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사람이 많은 남해에서는 사랑꽃이라고 부른다네요? 새언니가 이 꽃을 제일 좋아한다고 해서 알아요!”

작은 손으로 나뭇가지에 핀 꽃을 가리킨 시양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길 안내를 하던 노복이 푸근하게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공주마마께서 아주 똑똑하시군요.”

하지만 정작 궁금증을 해소한 정엽은 무언가를 잘못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의 투구 안쪽이며 편지, 하물며 평소 몸에 걸치는 의복마다 왜 해홍화 자수가 있었는지 알고 나니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의미들이 쌓여 그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군주마마, 공주마마와 연왕 전하께서 오셨사옵니다.”

그사이 별당 앞에 다다른 노복은 건물 안을 향해 공주와 정엽의 방문을 알렸다.

“어서 오시옵소서.”

안쪽에서 금세 문을 열고 나온 시녀는 정엽과 공주를 공손히 안내했다.

“스승님!”

따뜻한 별당 안으로 들어선 공주는 침상 위의 연주를 발견하곤 그대로 연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엽은 시양과 달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닫힌 문 안쪽에서 석상처럼 자리를 지켰다.

“공주마마, 날도 추운데 어찌 여기까지 오셨어요.”

“스승님이 보고 싶어서요.”

공주는 실컷 어리광을 부리면서도 정엽과 약속한 대로 대답했다. 그러곤 아직도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연주의 손과 멍든 이마를 보며 울먹였다.

“스승님 이마가 빨개요. 손도 아직 많이 아파 보여요. 시양이가 호 해 줄까요?”

공주의 맑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요. 공주마마 덕분에 벌써 많이 나았는걸요.”

“그래두…….”

“엊그제 눈이 많이 와서 오는 길이 불편하셨을 텐데. 차를 내드릴 테니 연친왕 전하와 손부터 녹이세요.”

다정하게 공주를 다독인 연주는 느릿느릿 이불을 걷고 침상에서 내려오려 했다.

하지만 좀 전에 알게 된 해홍화의 의미 때문인지, 여전히 초췌한 연주의 얼굴 때문인지 마음이 불편해진 정엽은 곧장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에게 차를 얻어 마실 생각 없어.”

“……오라버니?”

“나는 공주를 세자부에 데려다 주라는 부탁을 받고 왔을 뿐이니 먼저 가지.”

말을 마친 정엽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처음 보는 오라비의 냉랭한 모습에 어쩔 줄 모르던 공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도 속상한가 보다.”

그러나 공주의 속삭임을 듣고도 연주는 별말이 없었다.

정엽이 언제 저를 걱정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냉정하게 구는 정엽의 태도가 익숙한 연주는 금세 그의 잔상을 털어 내고 공주를 안심시키듯 작은 손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보모상궁은 왜 함께 오지 않으셨어요?”

“새언니, 아니 스승님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요.”

“조금 있다가 연친왕 전하와 환궁하시는 게 아니고요?”

옷소매로 조심스레 공주의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워 주던 연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스승님이 다 나을 때까지 세자부에 있어도 좋다고 어마마마께서 허락하셨는걸요?”

“……황후마마께서요?”

“응!”

연주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자, 시양은 품에서 황후가 써 준 서찰을 꺼냈다. 하지만 매일 궁을 드나드는 오라비에게조차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한 터라, 황후의 편지를 받으면서도 연주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잘 지내고 있느냐? 영항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크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시양이 하도 네 걱정을 하기에 잠시 세자부로 보낸다. 당분간 너와 함께 지내면 시양의 걱정도 조금은 줄겠지.

더불어, 시양과 너의 인연이 깊은 만큼 공주의 스승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정할 일이 아니라 네가 시양을 설득시킬 일인 것 같구나. 몸이 회복되거든 언제든 입궁하도록 해라.]

황후의 편지를 확인한 연주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의 스승을 그만두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황후의 뜻이 완강했다.

‘이 어린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이별을 말할 수 없어서 스승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인데…….’

마음은 주고받을수록 커지기 마련이라, 연주가 시양을 아끼는 만큼 시양 역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기에 연주는 더는 이 우스운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다.

이번 황제의 사혼(賜婚, 황제가 내리는 혼인)이 아니더라도 연주는 언젠가 수도를 떠날 몸. 그게 당장은 아니라 해도 언젠가 반드시 공주와 헤어져야만 했다.

황후는 어째서 자신을 계속 수도에, 정엽이 돌아온 이곳에 묶어 두려 하는 것일까. 황후의 속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황후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공주를 세자부로 보냈다는 것.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간담…….’

연주는 생각 많은 얼굴로 편지를 갈무리했다. 그때 작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연주의 손을 꼭 잡았다.

“공주?”

“스승님.”

연주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시양은 할 말이 많은 것인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깨물기를 반복하며 눈치를 살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거지요? 괜찮으니 말씀해 보세요.”

“정말요?”

“그럼요.”

연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참을 망설이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나는요, 새언니를 더는 새언니라고 부를 수 없어서 슬퍼요. 그래서어, 스승님이 계속 시양이 스승님이면 좋겠어요.”

연주는 풀 죽은 얼굴로 속내를 털어놓는 공주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공주는 아까부터 의식적으로 연주를 스승님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었다.

‘연친왕 전하와 저는 이제 부부가 아니에요. 그러니 더는 새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

설마 영항에서의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시양에게 있어 연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새언니였고, 정엽과 이혼한 뒤에는 스승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새언니라고도, 스승이라고도 부르지 말라고 다그쳤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었을까.

평생을 가족으로 여기던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건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태어나 한 번도 거절이란 걸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죄송해요, 공주마마.”

공주의 마음을 헤아린 연주의 낯빛이 흐려졌다. 영항에서 헤어질 땐 다시는 시양을 보지 못하리라 여겼다. 또 그때는 시양을 서둘러 영항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더 모질게 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공주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공주를 영항으로 데려온 정엽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가.

“시양이는 그냥, 스승님을 자주 만나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응?”

“마마…….”

공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참 고민하던 연주가 고개를 숙였다. 공주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든 못 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이별은 온다.

“연친왕 전하께서는 공주마마께서 더 좋은 스승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길 바라실 거예요.”

“아니에요. 아까 마차에서 오라버니가 그랬는걸요? 오라버니도 스승님이 내 스승인 게 좋다고요.”

“……전하께서 허락하셨다고요?”

“응!”

시양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자신이 떠나길 바라던 정엽이 이제 와 계속 공주의 스승을 맡아도 좋다고 했다니. 그럼 상현궁에서 제게 한 말은 다 뭐란 말인가.

‘변덕 같은 걸 부릴 사람이 아닌데. 무슨 생각으로 공주에게 그런 말을…….’

연주는 혼란스러웠지만 그걸 시양 앞에서 드러낼 수 없어 소맷자락을 정돈하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미 연주가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음을 직감한 시양은 금세 기가 죽어 눈치를 살폈다.

“설마……. 시양이 스승이 하기 싫은 거예요?”

“그게 아니라……. 생각을 좀 해 볼게요.”

“왜요?”

“조만간 제 동생이 수도에 올라오면 같이 해광성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뵐 생각이었거든요. 공주마마께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를 매일 뵐 수 있지만 저는 부모님을 뵙지 못한 지 오래돼서요.”

“으음…….”

연주의 고민이 길어지자 마음이 급해져 이것저것 묻던 공주가 예상 밖의 난관에 입술을 삐죽였다. 연주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운하세요?”

“우웅, 조금…….”

공주는 이제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데.

“마마, 이리 오세요.”

다른 아이들처럼 억지를 쓸 법도 하련만, 어린 나이에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공주의 모습이 어여뻤다. 어찌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의 짐을 더할까.

‘세자부에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게 해 주자.’

그렇게 마음을 굳힌 연주가 시양을 품에 안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제 동생이 오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하니 그때까지 고민해 볼게요. 그러니까 이곳에 계신 동안은 공주께서 저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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