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대답을 마친 정엽은 곧장 단지를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얼마나 굉장한 힘이었던지, 제법 견고하게 만들어진 단지는 유리잔보다 쉽게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다.
“으아아아악!”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 장면을 목격한 영항령은 얼굴의 다섯 구멍을 활짝 연 채 석상처럼 굳어졌다. 그러곤 곧 황궁이 떠내려가라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영항령의 피맺힌 절규에 기분이 상쾌해진 정엽은 홀가분한 얼굴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이 상스러운 것을 당장 치워라. 이 자리에서 사금파리 하나 찾을 수 없도록 말끔히 치워야 할 것이다.”
정엽의 명을 받든 부관은 박살 난 단지와 내용물을 수거해 각루 밖으로 내던졌다. 성벽 아래로 별똥별처럼 흩어진 일체는 강물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안 돼! 안 돼애애!”
군사들에게 팔다리가 붙들린 채 발광하던 영항령은 제 분신이 하찮게 버려진 것을 보고 미친 듯이 절규했다.
그러나 한번 떠나간 것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법. 눈앞에서 일생일대의 보물을 잃은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 이내 군사들을 뿌리치고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풍덩-.
소리도 없이 물에 휩쓸린 단지와 달리, 사람이 해자에 뛰어드는 소리는 요란하고 묵직했다.
* * *
평해왕의 딸을 죽이려던 영항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곽 귀비는 얼마 후 이 일을 문제 삼기 위해 어전으로 향했다.
“폐하, 영항령 실종 사건의 배후에 연친왕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승설군주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조사를 명해 주시옵소서!”
하지만 황제는 영항에서 연주를 구한 정엽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고 애첩의 간청을 묵과했다. 덕분에 큰 소란 없이 세자부로 돌아온 연주는 곧장 한 통의 편지를 황후에게 띄웠다.
[병중인 몸으로 더는 공주마마의 스승이라는 중임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부디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공주를 가르치는 문제만 해결되면 연주는 고향인 해광성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마침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막냇동생이 수도로 올라오고 있으니 함께 돌아가면 딱 좋을 터였다.
연주는 이것으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소란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 * *
며칠 후, 황궁 북문에서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출발했다. 연친왕과 시양공주가 타고 있는 그 마차의 목적지는 세자부였다.
차창에 꼭 붙어 앉은 시양은 황궁을 나서는 순간부터 창밖을 스치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와, 눈이다!”
“눈은 황궁에도 내리지 않느냐.”
“마차에서 보는 건 달라요!”
시양은 귀한 신분이기는 해도 궁에 갇혀 지내는 터라 바깥나들이가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언제 봐도 귀여운 꼬마 숙녀는 괜히 어깨를 들썩거리고 짧은 다리를 물장구치듯 동동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엽은 덩달아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아 헛기침을 하며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감췄다.
“밖으로 나온 게 그리 좋으냐?”
“그럼요! 새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잖아요.”
영항에서 그리 당부받았어도 결국은 새언니인가. 시양이 당연한 듯 연주를 새언니라 지칭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엽의 표정이 흐려졌다.
하지만 한껏 신이 난 시양은 맞은편에 앉은 정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근데에 있잖아요, 오라버니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리던 시양은 별안간 대단한 궁금증이 생긴 것처럼 정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황궁에서 세자부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아무리 늦어도 삼각이면 도착할 게다.”
“그럼 오라버니가 있는 연왕부는 황궁에서 얼마나 걸려요?”
“연왕부 또한 삼각 정도 걸릴 게다. 한데 그건 왜 묻느냐?”
“우움, 그게…….”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한참 뜸을 들이던 시양은 차창 밖을 한번 쳐다보고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새언니가 있는 세자부랑 오라버니가 있는 연왕부가 얼마나 먼지 궁금해서요. 그런데에 황궁에서 똑같이 삼각씩 걸리는 거면 두 장소는 아주 가깝겠네요? 그쵸? 히힛.”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시양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정엽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시양은 정엽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뭐가 그리 좋은 것이냐? 오라비는 도통 모르겠구나.”
“보모상궁이 그랬어요.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는 건 이혼을 했다는 뜻이고, 이혼은 부부가 함께 살지 않고 아주아주 멀리 떨어져 사는 거라고요. 그런데 새언니랑 오라버니는 서로 근처에 살잖아요?”
“그래서……?”
“가까이 살면 이혼이 아니야! 그러니까 새언니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새언니가 다시 오면 전처럼 연왕비 하는 거죠? 네?”
논리 정연하지 않지만 지극히 어린애다운 발상이었다. 정엽은 한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보모상궁이 이혼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 사는 거라고 표현한 모양인데, 막상 아니라고 반박하자니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보모상궁이 그런 얘기도 해 주느냐?”
“그럼요. 이제 시양이도 다 컸다고요. 누나예요, 누나!”
유독 ‘누나’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시양을 보며 정엽이 희미하게 웃었다. 또래 황자 공주들 사이에서는 총명하다고 소문난 시양이지만, 이럴 때 보면 그저 순진하기만 한 어린아이였다.
분명 연주에게도 이런 질문을 숱하게 했을 텐데. 그녀는 대체 어떤 대답을 해 주었을까? 잠시 고심하던 정엽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양아.”
“네, 오라버니.”
“앞으로는 군주에게 새언니라고 부르면 아니 된다. 영항에서 군주가 네게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우웅, 그렇지만…….”
정엽의 말에 기가 죽은 시양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오라비마저 새언니에게 새언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다니. 새언니는 앞으로 다신 연왕비가 못 되는 걸까?
“오늘은 군주에게 스승이 되어 달라 청하러 가는 길이니 새언니보단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게다. 그래야 네 스승을 계속해 줄 테니까.”
“응, 기억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모친인 황후에게 한동안 세자부에서 지내도 좋으니, 새언니로부터 다시 스승이 되겠다는 대답을 듣고 돌아오라고 당부받은 시양이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새언니가 스승이고, 스승이 새언니였던 시양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두고 호칭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냥 처음부터 오라버니가 이혼이란 걸 안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작은 머리까지 끄덕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던 시양은 한숨을 쉬며 정엽을 불렀다.
“그런데 오라버니.”
“응?”
“새언니랑은 왜 이혼한 거예요?”
“……글쎄다.”
사실 정엽은 연주가 요구하고 황제가 결정했기 때문에 따랐을 뿐, 최근까지만 해도 왜 갑작스럽게 이혼해야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의 결정은 정치적인 계산이라 쳐도, 연주가 이혼을 요구한 건 여인들의 변덕이라는 핑계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연주가 영항에 갇힌 뒤에야 진짜 속내를 알았을 땐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힘이 빠졌다.
‘처음부터 멀쩡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을뿐더러 제대로 숨조차 틔워 보지 못하고 죽은 아이를, 그럼 어떻게 해야 했단 말인가?’
일곱 달 남짓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었던 어미의 심정은 다를지 몰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어린아이 가는 길이 외롭다고 산 사람 목숨을 끊어 함께 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따라서 정엽의 생각에, 연주와의 이혼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르지 않으니 연주는 또다시 이혼을 원할 게 뻔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것뿐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좋았다. 그런데 어린 누이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인지…….
“새언니는 아주아주 착한 사람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예쁘기도 하고요. 어마마마도 그렇다고 하셨는걸요?”
“…….”
“시양이는 새언니가 그냥 새언니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러면 시양이가 스승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자주 볼 수 있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시양은 작은 입을 꼭 앙다물었다. 정엽을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 속에서 어린 누이의 진심을 읽은 정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간신히 가라앉힌 마음을 괜스레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
이윽고 한참을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멀리 보이는 세자부의 전경을 감상하듯 느긋하게 바라보던 정엽이 시양에게 손짓했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
“어디? 어디요?”
“저 앞에.”
“우와! 엄청 크다!”
조금 우울해 보이던 시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차 안에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마차는 금세 세자부의 붉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먼저 마차에서 하차한 정엽은 시양을 가볍게 안아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마차 안에서 흐트러진 시양의 머리 장식을 가볍게 매만져 주며 신신당부했다.
“만일 군주가 스승이 되길 주저하거든 오라비도 허락한 일이라고 말하거라.”
“응!”
“군주와 나눈 이야기는 황후마마께 전해야 하니 잘 기억해 두었다가 오라비에게도 알려 주고.”
“알았어요!”
“착하구나.”
시양의 약속을 받아 낸 정엽은 세자부 노복의 안내를 따라 연주가 있을 별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