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상현궁을 나온 정엽은 느긋한 걸음으로 황궁에서 가장 외진 북서쪽 성벽을 올랐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정엽의 뇌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멍으로 얼룩진 연주의 모습이 맴돌았다.
이윽고 정상에 다다르자, 3층으로 높게 쌓아 올린 각루 앞에서 정엽을 따르는 용무군 군사 넷이 번을 서야 할 금군 대신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셨사옵니까, 전하.”
정엽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높은 성벽 위에서 발밑을 굽어보았다. 새카만 밤하늘 아래 달빛을 받은 궁전의 유리 기와가 한없이 반짝였다.
반면 정엽의 등 뒤로는 황궁을 에두른 넓고 깊은 강물이 별빛을 품고 휘돌아 나갔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군가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다면 그 죽음을 감추는 것은 달과 별이 되리라.
“데려와라.”
오랜만에 탁 트인 풍경을 둘러보며 갑갑했던 마음을 느슨히 풀기도 잠시, 정엽의 명령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사내가 각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사, 살려 줘!”
손과 발에 족쇄를 찬 그는 마치 교수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머리에 작은 자루를 뒤집어쓴 채 연신 살려 달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그의 아우성에 되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적막과 살기뿐. 두려움에 차 연신 울부짖던 사내는 피부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가 눌려 차츰 입을 다물었다.
정엽은 사내의 저항이 잦아들자 부관을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부관은 사내의 머리에 씌웠던 자루를 단숨에 벗겼다.
“윽!”
자루 안에서 몰매를 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이 드러났다. 괴상한 화장과 깨진 머리에서 흐른 피로 얼굴이 온통 얼룩진, 흉측한 몰골의 주인은 영항의 우두머리인 영항령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정엽의 냉담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흠씬 두들겨 맞은 여파가 큰 것인지, 영항령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하의 말씀이 안 들리느냐?”
보다 못한 용무군 군사 하나가 영항령의 흐트러진 머리채를 당겨 고개를 치켜세웠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갑주에 달린 미늘 부딪치는 쇳소리에 더 놀라 꽥꽥 비명을 질러 대던 영항령은 뒤늦게 정엽의 존재를 확인하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네가 왜…….”
말까지 더듬어 가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쓰던 영항령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몸을 웅크리고 약삭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각루가 있는 성벽 위라도 어쨌든 이곳은 황궁 안. 황궁에는 그에게 신세를 진 자들이 많으니 여기서 빠져나가 곽 귀비의 사람들만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 방법이 있었다.
“그 꼴로 도망을 치시겠다?”
영항령의 새까만 속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한 정엽이 조소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느라 몸의 어디가 터지고 찢어졌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영항령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승설군주를 해치라고 사주한 게 누구냐.”
시양이 연주를 구명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엽은 나름대로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연주가 황명으로 내쳐졌다곤 해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복권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연주를 괴롭히는 것으로 모자라 살해까지 하려 들었다는 건 정엽의 상식상 누군가의 사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연주를 구한 뒤 영항령을 비롯한 영항의 궁인들을 살피게 했는데, 갑자기 영항령이 황궁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온갖 악행을 벌이면서도 굳건하게 영항령의 자리를 유지해 왔던 자가 이제 와 새삼스럽게 도망이라니. 그간 뒤를 봐준 사람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게 분명했다.
황제인가, 아니면 곽 귀비인가. 어쩌면 평해왕을 시샘하는 무리들이 나서서 벌인 일인지도 몰랐다.
“하하하! 가소롭구나!”
하지만 좀 전까지 겁먹은 쥐새끼처럼 주눅 들어 있던 영항령은 한바탕 크게 웃어 댔다. 그러곤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정엽을 향해 연거푸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친왕 전하께 이 무슨 무례냐!”
영항령의 머리채를 틀어쥔 군사가 그의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다그쳤다. 그제야 천천히 웃음기를 거둔 영항령이 광기 어린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나는 영항의 재상이다. 감히 누가 이 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이냐?”
“뭐라?”
“영항에 들어온 계집들은 모두 내 소유다. 그들을 죽이든 살리든 모두 내가 결정해! 채연주를 우물에 처넣든, 인간 돼지를 만들어 측간에 처넣든 모두 내 마음……!”
퍼억-!
정엽의 곁에서 연주를 향한 거침없는 망언을 듣다 못한 부관 장명이 영항령의 턱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고는 당장 영항령의 목을 날려 버릴 기세로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검을 넣어라.”
“하오나 전하…….”
“넣어.”
서슬 푸른 정엽의 명령에 결국 검을 물린 장명이 검집을 채우고 고개를 숙였다. 장명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명은 정엽이 조금이라도 영항령에 대한 처분을 망설인다면 언제든 다시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게 오랫동안 제 식솔들을 돌봐 준 연왕비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두 네놈 혼자 독단적으로 행한 일이다?”
“그렇다. 왜? 나는 너처럼 그 계집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것이냐?”
당당한 영항령의 대답을 들은 정엽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함부로’라니.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정엽은 아내였던 연주에게 살가운 남편은 아닐지라도, 그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다.
“듣자니 그 계집이 한때는 네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던데. 귀하디귀한 적장자에 용손이니 그런 여자가 흔한 줄 알았나 보지?”
“…….”
“돌아보니 아깝더냐? 정작 그 계집이 이혼을 요구할 때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 남편 행세라니 너도 참 딱하구나!”
“…….”
“영웅도 미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더니. 천하의 불사왕도 별것 아니로군! 하하하!”
무슨 수를 써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영항령이 악에 받쳐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사람은 두려움이 클수록 말이 많아지는 법.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진 정엽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온전한 사내도 아닌 주제에 말이 많구나.”
“……뭐?”
“너는 스스로 영항의 재상이요, 영항의 모든 죄수가 네 것이라고 떠든다만, 단 한 순간이라도 그들을 제대로 거느린 적이 있기는 한 것이냐?”
아니, 애초에 여인을 거느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할까.
정엽의 질문에 영항령을 이곳까지 데려온 용무군 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그 괴상한 화장조차 영항에 갇힌 여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몸부림 아니더냐. 그렇게라도 여인의 눈길을 사로잡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너는 채연주에게 어울리는 사내였다는 뜻이냐? 너와 채연주가 그토록 어울리는 짝이었다면 황제는 어째서 너희를 갈라놓았지?”
약이 올라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영항령이 한껏 빈정거렸다. 이 순간만큼은 좀처럼 흔들림 없던 정엽조차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너보다 채연주를 더 쓸모 있는 계집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내게 순종하고, 나를 받들고, 나를 위해 울고 웃으며 쾌락을 느끼도록!”
“…….”
“생각해 봐라.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말이야!”
죽음을 앞둔 자가 떠드는 말에서 의미를 찾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저 연주와 자신을 욕보이고자 하는 생각뿐이지 않은가.
다만 정엽이 끝내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 미친 작자가 그간 연주를 지독하게 학대했고 거리낌 없이 그 상황을 즐겼다는 점이었다.
저 입에서 쏟아지는 더러운 말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음흉한 상상이 모두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치가 떨리다 못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정엽은 영항령의 행태에 열화 같은 분노를 느꼈다. 그럼에도 감히 이 감정이 아내에 대한 미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 여자는 떠났고 나는 잡지 않았는데.
아니, 그 여자는 나를 버렸고, 나는 버려졌는데.
“그래. 하면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그 대단한 재주로 잘 살아 보거라.”
말을 마친 정엽은 그의 뒤에 서 있는 군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신호를 받은 군사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백자 단지를 꺼내 정엽에게 바쳤다.
흠 없이 새하얀 단지에는 이 안의 내용물이 지금껏 세상에 공개된 적 없음을 증명하는 붉은 종이가 길게 붙어 있었고, 종이 위에는 검은 먹으로 영항령의 진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유가 덕완이라. 꽤 좋은 이름을 가졌구나.”
“다, 당장 그 단지를 이리 내지 못해!”
한 박자 늦게 정엽의 손에 들린 단지가 무엇인지 깨달은 영항령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정엽이 움켜쥔 단지는 자미성 서문 밖에 있는 헛간에서 가져온 것으로, 태감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양물 단지였던 것이다.
“너희 환관들은 거세한 물건을 이처럼 따로 보관하였다가 죽을 때 반드시 이것과 함께 묻힌다지.”
“…….”
“그래야만 다음 생에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 후손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야.”
악에 받쳐 빈정거릴 땐 언제고 영항령은 정엽에게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 양물 단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군주가 내게 말하더구나. 이 생이 너무도 끔찍해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고.”
“…….”
“한데 이제 보니 군주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원흉이 바로 너로구나.”
“그,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영항을 호령하던 영항령이 고작 이 작은 단지 하나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매끄럽게 조소하던 정엽이 잔혹하게 속삭였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것이다. 내 아내가 느꼈을 절망보다 더 끔찍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