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벽선과 정엽의 간호 덕에 연주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연주의 마지막 기억은 영항의 우물가였으므로, 그녀는 지금 눈앞의 상황이 허상이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대숲에서 봉황새가 날아다니다니. 꿈인가?’
연주는 온갖 길상무늬가 얽힌 천장을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잔혹한 폭력과 음험한 시선이 난무하던 곳은 어디 가고, 반투명한 비단 휘장에 황촉이 뿜어내는 불빛이 은은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약 냄새…….’
게다가 꿈 치고는 아주 생생하게 쓰디쓴 약 냄새도 맡아지고, 물 끓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기까지 했다.
‘나는 분명 우물가에 있었는데. 그럼 정엽은…….’
하지만 생기 없는 얼굴로 기억을 더듬던 연주는 무심코 떠오른 정엽의 존재 때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어쩌다 영항이 아닌 다른 곳에 누워 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영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윽…….”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생각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우려니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연주는 부러진 깃대처럼 도로 베개 위에 쓰러져 작게 신음했다.
“아…….”
정신이 조금 든다 싶으니 이번에는 손끝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연주는 제 손을 들어 올려 보려 애썼다. 하지만 팔목에 무거운 족쇄를 채운 것처럼 손이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당황한 연주는 있는 힘껏 손끝을 말아 보았다. 그 순간, 손가락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맹독처럼 전신에 퍼졌다. 연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아픔을 삼켰다.
“다시는 손을 못 쓰고 싶어?”
날 선 목소리에 그때서야 정엽이 같은 공간에 있음을 알게 된 연주가 한참 뒤 간신히 머리만 들어 제 손을 살폈다.
연고를 발라 두었는지 열 손가락은 흰 천으로 칭칭 감겨 있고, 팔부터 손목에는 옷소매가 멀쩡한 다른 옷이 보였다. 누군가 자신을 보살핀 게 분명했다.
‘설마, 저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애써 부정하듯 작게 고개를 젓던 연주는 정엽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느릿느릿 얼굴을 돌렸다. 시선 끝에는 의자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정엽이 있었다.
6척이 넘는 장신을 작고 낮은 의자에 구겨 넣어 앉은 게 불편해서일까. 표정 없는 정엽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싸늘해 보였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은 건 연주도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부부였던 사이고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들 스스럼없이 여인의 옷을 벗기고 갈아입히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정엽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기력이 달린 연주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정엽은 무덤덤한 얼굴로 응수했다.
“옷은 내가 갈아입히지 않았으니 걱정 마.”
“여기가 어디예요?”
“상현궁.”
상현궁이라고?
내가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처소에 누워 있다니. 당황한 연주가 정엽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나 정엽은 연주가 어떤 표정을 짓건 묵묵부답이었다.
“영항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창백한 얼굴로 낑낑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나려 애쓰던 연주가 제풀에 지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황제의 사면 없이 영항의 죄수를 빼돌리는 건 대역죄. 정엽이 어째서 이런 엄청난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를 추격하는 황제의 군사들이 선황후의 영전을 어지럽히게 둘 수는 없었다.
“왜? 이번엔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지려고?”
“…….”
“돌아갈 필요 없어. 폐하께서 네 사면과 복권을 명하셨으니까.”
“어떻게…….”
“시양이 너를 구하려고 온종일 폐하께 매달리며 사정했어. 그러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허튼 생각은 집어치워.”
연주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녀에게 거침없이 쏘아붙인 정엽이 흘러내린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끌어 올렸다. 하지만 정엽의 행동보다 연주를 더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어쩌자고 그 어린애를……!”
“네가 미련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그래서 일부러 공주를 영항으로 보냈어요?”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어. 처음부터 다!
저를 위해 고생했을 시양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도 잠시, 목적 달성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 공주를 영항에 들여보내고, 어전에서 소란을 피우게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연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공주가 갑자기 영항으로 찾아왔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왜 애꿎은 공주까지 끌어들여 어린 마음을 슬픔과 원망으로 얼룩지게 하는지…….
“나를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말은 너를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뜻인가?”
“그래요.”
“하……!”
그간 병간호를 하느라 애쓴 것에 대한 보답은 바라지도 않는다. 목숨을 구해 주었으면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도리어 원망을 하다니. 기가 막힌 정엽이 실소했다.
“나는 전처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내로 몰릴 생각 추호도 없어.”
“뭐라고요?”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세상은 여전히 너를 내 아내로 기억할 뿐이야.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건가?”
“…….”
“너는 전처럼 내가 어디로든 떠나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너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연왕비 꼬리표를 달고 살 수밖에 없어.”
정엽의 촌철살인에 할 말을 잃은 연주가 고개를 돌렸다. 저라고 왜 모르겠는가. 아무리 공주의 스승 자격으로 황궁을 드나든다고 해도 뒤에서는 하나같이 저를 연왕비로 여긴다는 걸.
그러니 황제 또한 저를 영항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재혼을 강요한 것이다. 평해왕의 적녀라는 지위는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한 패인데, 계속 정엽의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 곤란하니까.
“잔인하네요.”
“뭐?”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연주의 반문에 말문이 막힌 정엽이 입을 다물었다. 연주 역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고충이 있었겠지만 그걸 모두 이해하기엔 지금껏 정엽은 연주와 너무나 다른 세계에 있었다.
피, 살육, 전쟁.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이곳 황궁 역시 정엽에게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영역이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게는 이게 최선이었어요. 편견에 찬 사람들과 당신의 시선이 두렵다고 내가 계속 그림자처럼 숨죽여 지내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채연주.”
“피하면 피할수록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왕부 밖으로 나왔던 거라고요. 그랬더니 이제는 죽은 아이까지 문제 삼으며 또 원치도 않는 혼인을 하라고 ……!”
“…….”
“나는 나로 살고 싶을 뿐이에요. 더는 그림자 인생도 싫고, 남의 손에 내 인생을 휘둘리고 싶지도 않다고요. 그게 죄가 되나요? 그러지 못한 삶은 죽는 것보다 끔찍한데 왜 자꾸만 살라고……!”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다. 자기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뜻대로 안 돼서 내린 선택이라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생존은 본능이다. 아니, 본능이어야 한다. 말 없는 산천의 초목과, 경전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미물조차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애쓰지 않는가.
정엽은 이 순간 무슨 말을 늘어놓아서든 연주에게 반박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애써 연주를 구한 시양을 볼 낯이 없었다. 시양이 원하는 답이 자기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식의 원망 섞인 말은 아닐 테니까.
“옛말에 물 한 방울의 은혜는 넘치는 샘물로 보답해야 한다고 했지.”
“…….”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널 구한 건 나야. 내가 널 살렸으니 넌 반드시 살아야 해.”
정엽은 지금껏 그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워 왔다. 그리고 연주 역시 한때는 그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범주에 들어 있던 대상 중 하나였다.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고 해도 좋다. 부부의 연을 맺으려면 전생에 500번을 마주쳐야 한다는데 목숨 한 번 구하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한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아꼈던 며느리이자,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의 누이다. 연주를 구하기 위해 애쓴 시양의 노고는 말해 무엇 하랴.
살려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러니까 채연주는 결코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됐다.
“아, 그래요. 은혜는 잊지 말아야죠.”
빈정거리는 투긴 해도 어쨌든 바라는 대답을 얻은 정엽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하지만 연주의 귀에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정엽의 말은 협박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내가 너를 구해 주며 너는 내게 빚을 졌으니, 이제는 내게 해가 되지 않도록 숨죽여 살라는 뜻 아니겠는가.
참으로 몰인정한 태도지만 천하의 소정엽이라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다시 만난 순간부터 입궁을 그만두라고 윽박지르던 정엽이었지 않은가.
게다가 영항을 드나들며 이미 망신이란 망신은 모두 당한 처지. 더는 예전처럼 고개를 들고 밖을 돌아다닐 상황도 아니긴 했다.
그래, 그토록 원한다면 들어주면 될 일이다. 다시 세자부에 처박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면 그만인 것을.
“더는 당신에게 폐 끼칠 일 없게 할게요. 다시는 신세 질 일 없을 테니 염려 말아요.”
몸이 아프니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인가? 내심 고맙다는 말을 기대했던 정엽은 오히려 선을 긋는 듯한 연주의 태도에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
이번 일을 통해 시양이 연주에게 어떤 존재인지 절절히 알게 된 만큼 계속 공주의 스승을 해도 좋다고 말하려 했는데. 호의를 보일 겨를도 없이 이리 사람을 밀어내다니.
“……그래.”
어쨌거나 다시는 죽겠다고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곡기를 끊는 기행을 벌이지 않겠지. 신세 질 일 없을 거라는 연주의 말을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인 정엽이 한발 물러섰다.
“내일 아침 일찍 세자가 이리로 올 테니 함께 돌아가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정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나갈 준비를 마쳐 놓았던 건지, 그의 넓은 어깨에 걸린 새카만 외투가 저승사자의 옷자락처럼 을씨년스럽게 펄럭였다.
‘설마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니겠지?’
문득 불길함을 감지한 연주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정엽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때 벽선이 돌아와 상현궁을 나서는 정엽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붙들었다.
“전하,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딜 가시옵니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벽선, 군주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