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정엽과 대화를 이어 가는 와중에도 바쁘게 연주의 몸 곳곳을 살피던 벽선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영항에 갇혀 고생을 좀 했기로서니, 사람이 어찌 이 지경까지 망가질 수 있단 말인가?
몸 곳곳에 남은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생기 넘치는 모습마저 떠올리지 못할 만큼 빼빼 마른 연주의 몰골에 놀란 벽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안 되겠습니다. 사람을 불러야겠어요.”
“태의원에 믿을 만한 자가 있는가?”
“우리 귀하신 전하, 너무 심려 마옵소서. 황궁 안에는 아직 선황후마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한 말투로 정엽을 위로한 벽선이 급히 상현궁을 나섰다. 걱정 근심이라고는 없는 듯한 벽선의 태도에 그제야 긴장이 풀린 정엽이 연주의 머리맡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정엽은 착잡한 얼굴로 연주를 돌아보다가, 침상의 이불을 끌어 내려 연주의 몸을 꽁꽁 감쌌다. 그간 어두운 밤에만 연주를 만난 탓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밝은 곳에서는 너무나도 잘 보여 신경이 쓰였다.
“대체 어쩌자고…….”
빨갛게 터져 부은 이마, 사기그릇처럼 차게 식어 움푹 파인 볼,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 아무리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보아도 도무지 가려지지 않는 상처 때문에 추를 단 것처럼 가슴이 점점 무거워졌다.
“하아…….”
오랜 세월 전쟁터를 전전하며 참담한 광경을 숱하게 보아 온 정엽이었다. 하지만 연주가 만신창이가 된 이 상황은 정엽에게 전쟁의 참상보다 더 깊은 흔적을 남겼다.
물론 지금 연주의 몰골이 전쟁터에서 봐 왔던 것만큼 끔찍한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어떻게 삶의 터전과, 인간의 존엄성이 모조리 무너진 전쟁터를 황궁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겠는가.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연주가 이 처참한 풍경의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무모했어.”
정엽이 아는 채연주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삶을 가꿀 줄 아는 여자였다.
황궁에 속한 여자들이 권태로이 손톱을 기르고 보석으로 치장할 때 연주는 칠현금과 바둑, 서화를 즐기고, 조양의 귀족들이 값비싼 옷을 걸치고 풍문에 휘둘릴 때 연주는 조정의 시류에 더 관심이 있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 지금의 연주는 꼭 주변의 모두를 괴롭히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생각을 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가.
“고작 그 괴물 때문에.”
정엽은 연주의 절망이 샘물이 아닌 바다와 같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한수에서 연주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대륙의 끝과 끝만 달려온 그에게 산과 협곡의 깊이를 넘어서는 바다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연주에게만은 그 괴물이 그녀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었다.
“…….”
설령 내 손으로 묻은 그것이 사람이었다고 해도 이미 죽고 없는 것을. 나는 그 괴물을 다시 살려 내 네게 돌려줄 수 없으니 너는 또다시 죽기 위해 벼랑 끝에 서려나?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하나.”
혼백이 구천을 떠도는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의 연주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던 정엽이 거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흰 종이에 먹물 한 방울을 떨군 것처럼 눈앞에 캄캄한 어둠이 드리웠다.
“그나마 시양에게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언제까지나 시양을 이용해 연주를 붙들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그 후엔 어찌 될까.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이렇다 할 대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싫어요.’
바로 그 순간, 황궁에서 다시 만났을 때 출궁을 종용하는 저에게 가감 없이 적의를 드러내던 연주가 떠올랐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며 사람 속을 뒤집더니, 그게 다 죽은 아이 때문인 모양이었다.
“살아야 하는데 그깟 게 다 뭐야.”
무서우면 도망을 쳐야지. 공포로부터 도망치는 건 산 자의 본능이다. 두려움 앞에 나약해진 인간에게 감히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앞에서는 강한 척하며 오기를 부렸지만 사실은 견딜 수가 없었던 거다. 시양이나 죽은 아이나 하나같이 작고 연약한 존재가 아닌가.
새삼 영항에서 시양을 떠나보내고 서럽게 울던 연주의 긴 울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엉망진창이군.”
이혼을 요구하는 순간조차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던 여자. 부부의 연조차 냉정하게 끊고 가 버리기에 내내 잘 지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황궁을 활보하는 연주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뿐이지, 속 좁게 앙갚음 따위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이걸?”
벼락처럼 갑자기 찾아온 이별을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려고 애썼던 세월이 무색했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이 상황을 웃으며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
“대체 뭘 위해서…….”
너는 이별을 택한 걸까.
우리의 이별이 네겐 어떤 의미였을까.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꼭 감긴 연주의 눈을 바라보던 정엽이 식은땀이 맺힌 연주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으음…….”
“정신이 들어?”
영항에서 나온 후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연주가 미약한 신음과 함께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채연주.”
하지만 정엽이 몇 번이고 연주의 이름을 불러 보아도 그녀는 잠꼬대하는 사람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반복했다.
“미안해…….”
“연주야.”
“미안…….”
“채연주.”
애꿎은 손수건만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정엽이 침실을 서성였다. 이제 와 연주를 데리고 왕부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진퇴양난이었다.
‘빨리 태의가 와야겠는데.’
혹시 태의를 데리러 간 벽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정엽이 상현궁의 침실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전하, 태의를 데려왔사옵니다.”
“예는 갖출 필요 없으니 어서 진맥하게.”
“예, 전하.”
벽선을 따라 상현궁으로 온 호 태의는 정엽의 재촉에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연주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는 한참 손목의 맥을 짚어 보더니 터진 이마와 불그죽죽하게 언 손을 차례로 살폈다.
“어떤가.”
“…….”
“듣기로는 꽤 오랫동안 곡기를 끊었다 하더군.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고 모질게 군 자들도 있었던 모양이고.”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호 태의는 꽤나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떠냐고 묻지 않는가.”
“전하, 잠시 물러나 계시겠사옵니까? 진찰에 방해가 되옵니다.”
정엽은 호 태의의 주의에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아서, 그는 소매 속에서 손끝을 말아 쥐고 불거진 손마디를 염주 굴리듯 엄지로 문댔다.
호 태의는 신중한 진찰 끝에 입을 열었다.
“곡기를 끊으신 지 오래되어 원기가 심하게 상했고, 머리를 다쳐 어혈까지 생겼습니다. 일단 소금물과 미음을 먹여 군주마마의 기력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키는 게 우선일 듯하옵니다.”
“바로 약을 쓰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인가?”
“외람되오나 그렇사옵니다. 일단 군주마마께서 기력을 회복하신 뒤에 소신이 그에 맞는 탕제를 지어 올리겠사옵니다.”
“알았네.”
심각한 상황에 비해 처방은 간단했다. 뭐라도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은 정엽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한데 군주마마의 손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이옵니까? 동상이 심각하여 지금으로선 연고를 바르고 한동안 손을 쓰지 않게 하며 지켜보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알았으니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주게. 혹여 황제 폐하께서 죄를 물으시거든 본 왕의 명에 따랐을 뿐이라 답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걸세.”
“소신은 의술을 다루는 자이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병자를 살펴야 할 의무가 있지요. 너무 걱정 마시옵소서. 소신은…….”
호 태의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때마침 미음을 준비하러 갔던 벽선이 돌아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호 태의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뒤 벽선에게 당부했다.
“나는 일단 군주께서 기력을 회복하시는 대로 드실 약을 달일 테니 장 상궁께서는 미음을 올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 그러지요.”
“그리고 이건 동상에 효과가 좋은 연고입니다. 마마의 손에 수시로 발라 드리세요.”
호 태의로부터 각종 연고가 든 통을 넘겨받은 벽선은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는 정엽을 의식하고 서둘러 대화를 마쳤다.
“수고하셨습니다, 호 태의.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예, 영 상궁. 하오면 전하, 소신은 잠시 물러나겠나이다.”
정엽을 향해 극진히 예를 갖춘 호 태의가 상현궁을 나섰다. 이제 상현궁에는 정엽과 연주, 그리고 벽선뿐이었다.
“전하, 이 미음은 전하께서 마마께 직접 드리시지요.”
“내가?”
“예, 소인은 노쇠한지라 혼자 군주마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요.”
“아, 그렇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연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소인은 상의국에 가 군주마마께서 입으실 만한 옷이 있는지 알아보고 오겠사옵니다. 수고로우시더라도 잠시만 자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벽선은 망설임 없이 정엽에게 미음 그릇을 안기고 상현궁을 나섰다. 막상 숟가락과 미음 그릇을 받아 든 정엽의 표정은 복잡했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수발이라니.”
난처한 듯 미음 그릇을 들여다보던 정엽은 결국 연주를 반쯤 일으켜 세워 제 품에 안았다. 그러곤 뜨거운 미음을 후후 불어 조금 식힌 뒤, 작은 입 안으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연주는 묽은 미음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된소리를 내며 기침을 뱉었다.
“하아, 흘리는 게 반이로군.”
가을 낙엽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몸을 끌어안고 여러 차례 미음을 떠먹이던 정엽이 심란한 얼굴로 희멀건 액체를 휘저었다.
화가 나는 건지, 아니면 안타까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전처의 수발을 드는 이 상황이 불쾌한 건지.
정엽조차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채연주를 돌봐 줄 사람이 한때 남편이었던 그뿐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