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자는 미친 게 틀림없어.’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게 이런 역겨운 인간의 얼굴이라니. 훅 끼치는 싸구려 분내와 역겨운 숨소리에 탄식하던 연주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저를 탐하듯 다가오는 영항령의 면상을 손으로 있는 힘껏 밀쳤다.
“이 계집이 감히……!”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발악하듯 저를 거부하는 연주의 행동에 분노한 영항령은 시뻘건 눈을 부릅뜨고 연주를 우물둔덕으로 끌고 갔다.
“악!”
익사를 막기 위해 켜켜이 쌓아 놓은 돌담에 강제로 머리를 부딪친 연주가 비명을 질렀다.
“네년도 척 부인처럼 내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틀렸다. 영항에 갇힌 모든 계집의 생사는 전부 내 손에 달렸느니라. 네가 아무리 어린 공주를 꾀어 황상의 마음을 돌려 보려 한들, 성지가 당도하기 전에 네가 죽어 버리면 모두 물거품이 아니냐?”
비록 갇혀 사는 처지라 해도 영항을 다스리는 영항령의 처지가 보통의 죄수와 같을 리 없었다.
시양공주가 연주의 구명을 위해 어전에서 읍소하고 있다는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전해 들은 영항령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당장 이 계집을 죽여야 한다.’
마음을 돌린 황제가 자신이 평해왕의 하나뿐인 딸을 능욕한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토록 아리따운 여인을 어찌 다른 사내가 희롱할 수 있도록 온전히 돌려보내겠는가.
“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것이다.”
설령 연친왕이라 해도 내게서 너를 빼앗아 갈 순 없어. 섬뜩한 목소리로 연주의 귓가에 속삭인 영항령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이 계집을 우물에 처넣어라.”
언제부터 주변에 사람이 있었던 걸까. 영항령과 단둘뿐인 줄만 알았던 우물가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정말 죽입니까?”
“그래.”
“아쉬우시겠군요.”
영항령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사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연주를 높은 우물둔덕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연주의 고개를 우물 안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우물둔덕에 몸이 반쯤 걸린 채 머리부터 거꾸로 우물 속에 처박힌 연주의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의 눈에 깊고 새카만 우물의 전경은 이 모든 고통을 끊어 줄 독약 같기도 하다가, 별빛 흐르는 밤하늘처럼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이 몹쓸 여식을, 누이를 용서하세요.’
사내에 의해 우물 속에 거꾸로 매달린 연주가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 작게 읊조렸다.
퐁당, 퐁당.
우물 속에 울려 퍼지는 처량한 눈물방울 소리에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사내는 이내 모아 쥔 연주의 발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 순간.
“채연주!”
언뜻 절박하게 들리는 외침과 함께, 추락하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꿈을 꾸는 것처럼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제 끝인가? 의아해하기도 잠시, 달콤한 잠을 깨우듯 늘어진 몸을 마구 흔들어 대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 와중에도 저를 안은 팔이 든든하다고 느껴지는 게 기이했다.
‘누구…….’
따가운 햇볕에 인상을 찡그릴 기력조차 없어 눈을 가늘게 뜨자, 흐릿한 시야 너머 성난 얼굴이 보였다. 정엽이 그녀를 향해 무어라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왜…….’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연주는 지금 정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정엽이 왜 이렇게 서글픈 눈빛으로 화를 내는가에 대한 의아함이 맴돌 뿐이었다.
* * *
잠시 후, 곽 귀비의 처소 영방궁.
“마마, 영항에서 소식이 왔사옵니다.”
호화로운 궁전에서 화롯불을 쬐며 어린 딸들과 달콤한 간식을 나눠 먹던 곽 귀비는 궁녀의 전언에 낯빛을 바꾸고 재빨리 공주들을 내보냈다.
“지금 영항이라고 했느냐?”
“예, 영항에 심어 놓은 궁녀의 말에 따르면, 영항령이 승설군주를 우물에 빠뜨려 죽이려다 연친왕에게 들켜 실패했다 하옵니다.”
“연친왕 때문에?”
“예.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연친왕이 구출한 승설군주를 데리고 어디론가 곧장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일이 틀어졌구나!
궁녀의 말에 사색이 된 곽 귀비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시양공주는 어제부터 승설군주를 구하기 위해 황제에게 떼를 쓰고 있다고 하고, 황후가 그 꼴을 두고 볼 리 없으니 머지않아 일이 커질 게 분명했다.
대체 영항령 그자는 어쩌다가 일을 그르쳤단 말인가?
“일이 복잡하게 됐구나. 다른 소식은 없느냐?”
“어전 태감을 통해 조금 알아보았는데, 폐하께서 평해왕이 올려 보낼 선물을 퍽 기대하시는 눈치라 하옵니다.”
“그래?”
“예, 평해왕이 막내아들까지 올려 보내며 바치는 거라면 필시 범상치 않은 선물이지 않겠사옵니까. 이만하면 군주에 대한 벌도 충분하니 폐하께서도 못 이기는 척 물러나시려는 거겠지요.”
“곤란하게 됐구나. 폐하께서도 어심을 돌리시려는 마당에 평해왕의 하나뿐인 적녀가 영항에서 죽을 뻔했다고 하면 황실 안팎이 들끓을 것 아니냐?”
황명을 거역한 것은 죽어 마땅한 죄이나, 그렇다고 영항에서 평해왕의 딸이 죽어 나가면 황제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디 체면뿐인가. 평소 황제가 평해왕을 경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일이 더 커지면 세인들은 황제가 괜한 꼬투리를 잡아 평해왕 같은 충신을 궁지로 몰았다고 떠들어 댈 게 분명했다.
게다가 황후가 이 일을 계기로 영항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 지금까지 영항령이 곡식을 빼돌려 판 것의 대금을 받고 그의 횡포를 눈감아 준 내게 칼끝을 겨누겠지.
“황후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이날이 오기를 기다린 게로구나.”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곽 귀비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화서이교의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어.”
총명하고 재기 발랄해 매사에 적극적이던 선황후와 달리, 지금의 황후는 후궁일 때부터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 탓에 곽 귀비는 지금껏 한 번도 황후를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불보다 물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만 보니 지금의 황후는 제 언니보다 더 치밀하고, 고육책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냉정해서 권모술수에 더 능한 듯 보였다.
“쯧, 이참에 군주의 목숨이 간단히 끊어지길 바랐건만. 아쉽게 됐구나.”
“그러게나 말이옵니다.”
곽 귀비의 말에 동조한 궁녀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승설군주의 죽음을 이용해 교씨 일가와 평해왕부를 갈라놓으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 귀비마마의 처지는 어찌 되려나?’
그러나 곽 귀비가 황제의 총비로 군림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 귀비의 혜안은 나이 어린 궁녀가 잔머리를 좀 굴린다고 해서 따라잡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군주의 일을 알고 계시느냐?”
“아직이옵니다. 하지만 공주의 뒤에는 황후가 있으니 폐하께서 아시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이번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당장 어전으로 갈 테니 준비하거라.”
“네?”
의아해하는 궁녀를 향해 호기롭게 명령한 곽 귀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왜. 본 궁이 어찌하여 지금 어전으로 달려가는지 궁금한 것이냐?”
“예? 예…….”
“폐하께서 아셔야 할 건 영항령의 횡포뿐만이 아니다. 연친왕은 승설군주에 대한 복권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군주를 구했어. 황제의 적장자이자 친왕으로서 모범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황명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했으니 이 얼마나 큰일이냐?”
우리 귀비마마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시구나!
귀비의 달변에 갈대처럼 마음이 변한 궁녀가 주인을 향해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곽 귀비는 흐뭇한 얼굴로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영방궁을 나섰다.
* * *
이 여자를 살려야 한다.
연주가 그의 품에서 죽은 듯이 혼절한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낯선 공포가 엄습했다. 정엽은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제 대체 어디로…….”
황궁 한복판에서 주변을 살피던 정엽이 한숨을 삼켰다. 연주를 구한 것까지는 좋은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용손으로 낙인찍힌 저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부황. 헌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곽 귀비. 그리고 권력의 향방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황궁의 모든 눈과 귀가 정엽의 적이었다.
“사면령이 떨어지기까진 시간이 필요할 테고…….”
시양이 어전에서 연주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황제에게서 사면을 받아 내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게다가 황제는 연주를 돕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엄히 죄를 묻겠다고 선포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황후가 있는 덕교궁을 찾아간다면 뒷감당은 모두 그녀의 몫이 될 테고, 이대로 출궁해 연왕부로 간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갈 데라곤 거기 하나뿐인가.”
정엽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황제가 벌을 내릴 수 있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에게 의탁하는 것.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영전인 상현궁(上賢宮)으로 달려가는 것.
결정했다면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궁인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길을 골라 상현궁 뒷문으로 연주를 데리고 들어간 정엽이 인기척을 살폈다.
“영 상궁, 영 상궁 있는가?”
텅 빈 영전에서 애타게 조력자를 찾던 정엽은 선황후의 초상화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초로의 노인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벽선!”
“연왕 전하?”
“잘 지냈는가.”
“전하, 오셨군요!”
“자네도 나이가 많이 들었군. 어마마마의 영전에서 낮잠을 다 자다니.”
심각한 표정도 잠시, 가벼운 농으로 응수한 정엽이 연주를 선황후가 생전 쓰던 침실로 데려갔다. 잠시 허둥대던 벽선은 최근 상현궁 담 너머에서 들리던 궁녀들의 쑥덕거림을 떠올리곤 서둘러 침실을 정돈했다.
“폐하께서 아시면 큰 화가 있을 줄로 아옵니다.”
“그러니 여기로 왔지.”
“혹시 오시는 길에 전하와 마주친 궁인이 있지 않았사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정엽은 어려서부터 죽을 위기를 숱하게 겪었다. 모친인 선황후가 살아 있을 때도 황궁 안에서 암살 위협이 그치지 않아 상현궁에서는 분 내음 대신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 정엽은 아주 어려서부터 황궁의 복잡한 지리를 머릿속에 모조리 새겼다.
“궁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정녕 상현궁만은 내버려 두실지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성국부로 나가시는 것이…….”
“이곳은 어마마마의 영전일세. 설마하니 폐하께서 나를 어마마마 앞에서 죽이시겠는가?”
“하오나 전하…….”
“내가 지금 이 사람을 데리고 출궁하면 그땐 더 큰 화가 닥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