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건 안 돼요, 공주마마.”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요. 시양이가 어마마마께 말씀드려서 맛있는 부용고를 가져왔어요. 그러니까 하나만 먹어 봐요. 응?”
공주가 성화를 부리기 시작하자 함께 온 보모상궁이 기다렸다는 듯 작은 찬합을 열어 공주에게 부용고 한 조각을 건넸다.
“어서 먹어요, 새언니.”
부용고를 손에 든 공주가 음식을 연주의 입에 들이밀며 재촉했다.
“얼른요오.”
부용고는 공주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였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걸 스스럼없이 내준다는 건 그만큼 공주가 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리라.
“저는…….”
마지못해 과자를 받아 들고 망설이던 연주가 고개를 숙였다. 공주가 내민 과자 하나에 내내 죽어 있던 가슴 한구석이 봄바람에 녹는 얼음처럼 뭉근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다잡은 마음이 약해질까, 또 공주와 황후가 저로 인해 고초를 겪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진 연주는 차마 공주가 내미는 과자를 먹을 수 없었다.
“감사해요. 공주마마께서 주신 과자는 일을 마친 후에 이곳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을게요.”
“안 돼! 지금 먹어야 해요! 새언니가 안 먹으면 시양이 앞으로 글씨 연습도 안 하고, 예절 연습도 안 할 거야!”
연주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늘어놓으며 떼를 쓰는 공주를 차분하게 타일렀다.
“마마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저 혼자 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이 실망할 거예요.”
“그래두…….”
“과자는 꼭 먹을게요. 그러니 이만 상궁과 함께 돌아가세요. 네?”
“새언니 이상해. 왜 자꾸 시양이한테 가라고만 해요? 새언니 시양이한테 거짓말하는 거구나!”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공주가 다시 연주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집을 부렸다. 공주가 한번 고집을 세우면 모친인 황후는 물론, 부친인 황제조차 어쩌지 못하는 것을 익히 아는 연주의 낯빛이 흐려졌다.
“아니에요.”
이제 곧 영항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일 시간이었다. 공주가 이곳에 온 것을 알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지도 몰랐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연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는 이제 공주마마의 새언니도 아니고 스승도 아니에요.”
연주는 저를 끌어안은 공주를 밀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일이 처음인 공주는 충격을 받고 울먹였다.
“새언니, 왜 그렇게 슬픈 말을 해요? 시양이가 새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저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것뿐이에요. 연친왕 전하와 저는 이제 부부가 아니에요. 그러니 더는 새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
“거짓말!”
“또 저는 이제 공주마마께 더 이상 서화와 예법을 가르치지 않으니 스승이라고도 부르지 마시고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공주에게 상처를 주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때의 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새언니, 시양이랑 약속했잖아요. 겨울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고, 봄이 오면 같이 꽃구경 가기로. 약속을 안 지키면 나쁜 사람이잖아요. 응?”
“저는 나쁜 사람이라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느라 여기 있는 거예요.”
“새언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시양이 그런 말 듣기 싫어.”
“듣기 싫어도 들으셔야 해요. 나쁜 사람은 공주마마의 새언니일 수 없고, 스승일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이만 잊으시고…….”
공주에게 있어 이제 연주는 단순히 오라비의 혼인으로 얽힌 가족이 아니었다. 모진 말에도 연주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쥔 공주가 울며 소리쳤다.
“싫어! 새언니처럼 착한 사람이 어디 있는데? 시양이는 새언니가 제일 좋단 말이야! 그러니까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죄송해요, 공주. 저는 공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더는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애써 눈물을 삼키던 연주가 공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뒤편에 선 보모상궁을 향해 눈짓했다.
“부디 무탈하세요.”
때가 되었음을 안 보모상궁은 연주에게 짧은 묵례를 건넨 뒤, 연주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공주의 손을 붙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공주 때문에 상궁은 몇 번이고 다시 빨래터로 돌아왔다가 떠나길 반복했다.
“이보게! 날 좀 도와주게!”
결국 함께 온 소성궁 태감의 등에 강제로 업힌 공주는 대성통곡하며 영항을 떠났다.
“싫어! 새언니랑 있을 거야! 안 갈 거야! 으아앙! 새언니! 새언니!”
그러나 공주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빨래터에 남아 어쩔 줄 모르던 연주는 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공주에게 모진 말을 뱉었으니 이 죄를 다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연주는 하필 그녀 인생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었던 공주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자책감에 가슴을 뜯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힘겹고 버거운 사람은 연주만이 아니었다.
공주가 우물가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로 같은 영항의 모퉁이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엽이 돌아섰다.
“이제 더는 새언니가 아니니 그리 부르지 말라…….”
이럴 줄 알았으면 공주를 영항에 보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벌어진 일, 수습은 정엽의 몫이었다.
“네가 뭐라든 이제 내 식대로 하는 수밖에.”
* * *
시양을 돌려보낸 뒤 연주는 하루 종일 틈만 나면 눈물을 떨궜다. 그 덕분일까.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진 연주는 다음 날 해가 중천에 걸린 뒤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지금이 몇 시지……?’
이상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쪽창을 응시하던 연주가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오늘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옇게 보였다. 게다가 평소라면 견디지 못했을 먼지와 곰팡이의 쿰쿰한 냄새도 오늘은 이상하게 견딜 만했다.
‘얼른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명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연주는 영항에서 노역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밖이 밝을 때 잠에서 깨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훤한 대낮이니 일을 시작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눈이 떠지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노역을 늦게 시작한 사실을 들키면 또 어떤 지독한 체벌이 가해질지 알 수 없었다. 손찌검부터 채찍질, 발길질까지 당했으니 이번에는 이목구비가 상하거나 손발이 잘린대도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손끝, 발끝에 힘을 주어도 바닥에 달라붙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추위에 굳은 몸을 일으키려 애써 보던 연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죽는다는 게 그리 쉬울 리 없지.’
우물에서 몸을 조금 비틀거리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잠시 어제 우물가에서 목표가 코앞이라며 기뻐했던 일을 반추한 연주가 실없이 웃었다.
그래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노역만 하며 버틴 지 이레째, 어쨌든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지척에 있는데도 연주는 생각만큼 기쁘거나, 눈물이 날 만큼 슬프지 않았다. 그저 시야가 물속에 갇힌 것처럼 일렁이고, 술을 마신 사람처럼 바닥이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아마 혼은 없고 빈껍데기만 남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확하지 않을까. 무심코 생각하던 연주가 요란한 발소리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죽은 것이냐?”
날이 밝은 뒤에도 창고에서 나오지 않는 연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궁녀들과 함께 창고로 들이닥친 영항 상궁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영항에 들어올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끝까지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연주는 창고 안을 가득 메운 궁녀들의 수군거림에도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연주의 손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던 상궁이 다른 궁녀를 향해 눈짓했다.
“확인해 보거라.”
“아이, 벌써 죽었겠지요, 마마님. 안 죽었어도 이대로 며칠만 두면 금세 죽을걸요?”
“이 계집은 죽으면 아니 된다.”
“왜요?”
“왜는 뭘 왜야! 어서 확인이나 해 보라니까!”
자꾸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궁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 상궁이 초조한 얼굴로 연주의 동태를 살폈다. 투덜거리던 궁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주의 코끝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죽었느냐?”
“아니요, 아직 숨이 붙어 있사옵니다.”
연주의 숨소리를 확인한 궁녀가 귀를 후벼 파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태평한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래도 잠을 자는 것 같아요.”
“뭐라? 때가 어느 땐데 이토록 천하태평이란 말이냐? 당장 밖으로 끌어내라!”
버럭 소리를 지른 상궁은 휑하니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먼저 돌아섰다. 그러자 연주의 주위를 빙 둘러싼 궁녀들이 소리쳤다.
“야! 일어나!”
“너 하나 때문에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니? 영항령께서 찾으신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또다시 괴롭힘이 시작될 게 뻔했지만, 연주는 저들이 무슨 말을 하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년 봐라?”
연주의 행동을 일종의 반항이라고 해석한 궁녀들은 그녀의 팔을 붙들고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 제대로 걷거나 말거나 짐짝을 운반하듯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끌려가 도착한 곳은 연주가 매일 빨래를 하던 우물가. 연주를 영항령 앞에 팽개친 궁녀들은 영항령의 고갯짓 한 번에 허리를 숙이고 자취를 감췄다. 이제 우물가에는 영항령과 연주, 단 둘뿐이었다.
“우욱!”
누워 있을 때와 달리 사소한 움직임에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저 미친 영항령 앞에서 빈틈을 보인다면 굶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연주는 세상이 빙빙 도는 와중에도 양손으로 흙바닥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영항령이 연주의 머리채를 신경질적으로 움켜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네 재주가 참으로 대단하더구나. 처음엔 그저 객기로 곡기를 끊으며 반항하는 줄 알았건만. 실은 그게 네 낭군과 어린 공주의 동정을 사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한 비책이었단 말이냐?”
영문도 모른 채 영항령의 분노를 받아 내던 연주가 맥없이 조소했다. 객기니, 반항이니. 고작 그 정도 이유였다면 좀 더 쉽고 눈에 띄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느냐?”
연주는 온갖 더러운 욕망이 들끓는 영항령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수탉의 깃털처럼 울긋불긋한 영항령의 얼굴은 점점 연주의 입술과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