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비로소 연주가 품고 있던 슬픔의 크기를 직면한 정엽이 할 말을 잃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처절했다.
이제 보니 연주의 슬픔은 산기슭을 타고 흐르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르는 샘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파도치는 망망대해인 모양이었다.
“…….”
애써 외면했지만 사실 정엽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온종일 울기만 하는데 모를 리가 있나.
다만 정엽은 연주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감정을 충분히 쏟아 내고 나면, 언젠가 그녀가 그녀 자신을 잠식한 지독한 슬픔을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절망과 슬픔을 퍼 올리는 일도 언젠가는 지쳐 끝나기 마련이라는 걸, 정엽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이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다라면 그땐 어찌해야 하나. 지금껏 저와 연주가 서로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더는 나를 막지 말아요.”
두려움이라곤 없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연주를 본 정엽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고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대개 죽음을 각오하며 호기롭게 구는 사람들은 죽음의 방식보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 앞에서 더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지금 연주는 마치 미치광이 같았다.
죽음을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숭배하는 미치광이. 그 무엇으로도 회유할 수 없고, 잔혹한 고문에도 흔들리지 않아 고문관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죽음의 광신도.
“정말 죽기라도 할 생각이야?”
일평생 살아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온 정엽은 좀처럼 연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로 연주가 바라는 것이 죽음이라면, 겨우 그것뿐이라면…….
“대답해.”
어느새 허리춤에 달린 단도를 손에 거머쥔 정엽이 연주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살기등등한 눈빛과 달리 단도를 움켜쥔 정엽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열 살 무렵, 처음으로 홀로 말 등에 매달려 전투를 치르던 그날처럼.
“네게 먼저 간 아이가 자식이었듯, 너 또한 평해왕과 왕비의 여식인데 부모에게 불효할 생각인가?”
“부모님께서도 나를 이해해 주실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그런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나는 한 번도 널 탓한 적 없어. 너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저를 조여 오는 낯선 두려움을 떨쳐 내듯, 아무렇게나 내지르던 정엽이 쥐고 있던 단도를 버리고 연주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소리쳐 봤지만 장기간 이어진 노역과 매질에 지친 연주의 몸은 정엽의 손에 맥없이 딸려 갔다.
“악!”
하지만 어디 성한 곳이 하나 없는 연주는 우물가를 벗어나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연주의 애처로운 비명에 당황한 정엽은 뒤늦게 팔목을 움켜쥔 손에서 힘을 풀고 마른 몸을 돌려세웠다.
“어디 봐.”
“됐어요.”
연주의 거절에도 막무가내로 헐렁한 소매를 걷어 올린 정엽이 입술을 짓이겼다. 희고 가느다란 팔뚝 여기저기에 시커멓게 남은 멍, 잦은 매질로 군데군데 찢어진 비단옷 아래 남은 상처가 그간의 고통을 증명하듯 선명하게 붉었다.
“맞았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만 없으면 내 인생은 아무 문제 없다고요.”
“맞았냐고 묻잖아.”
“잘 들어요. 아무리 당신이 친왕이 되었어도 나를 이곳에서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황제이지 당신이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내 삶의 종말을 결정할 자격이 있어요.”
이런 고집불통!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연주의 태도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정엽이 그녀의 팔목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세게 쥐었다. 그러나 연주는 이를 악문 채 꿋꿋이 아픔을 삭일 뿐, 끝내 함께 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뜻대로 연주를 굴복시키지 못한 정엽이 허탈감에 흔들리는 눈으로 연주를 보았다.
“다신 찾아오지 말아요.”
차가운 말만 남기고 돌아선 연주는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처럼 위태로운 걸음으로 다시 우물가로 향했다.
탕! 탕!
이내 들려오는 것은 빨래 방망이질 소리. 물에 젖은 빨랫감에 원망을 쏟아 내듯 거센 연주의 방망이질이 정엽의 가슴을 때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 여자의 발목을 이승에 붙잡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부부로 한 이불을 덮고 살았으면서도 정작 연주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정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연주를 위한 고민이란 걸 했다.
‘혹시 시양이라면…….’
그러다 불현듯 연주와 함께 잠자리를 잡으며 즐거워하던 공주의 말간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이내 정엽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다음 날 새벽, 오늘도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우물가로 나온 연주는 곧장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기 시작했다.
빨래를 하려면 장정 셋이 들어갈 만큼 거대한 물통을 가득 채워야 했기에, 우물 아래로 두레박으로 던지고 밖으로 끌어내는 일은 그야말로 수십 번 반복됐다.
하지만 물을 긷는 일은 고된 노동의 시작에 불과했다.
산처럼 쌓인 빨랫감을 큰 빨래 통에 몰아넣은 연주는 충분히 적신 일부를 작은 통으로 옮긴 뒤, 망설임 없이 물속에 손을 넣었다. 시린 바람에 꽁꽁 얼어 버린 손은 이제 손가락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감각이 무뎠다.
“하아…….”
연주는 이제 습관처럼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부터 죽는 것까지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철퍽! 철퍽! 탕! 탕! 탁!
살얼음이 낀 젖은 옷을 방망이질로 풀며 빨래를 계속하던 연주가 어느 순간 방망이를 놓쳤다. 새빨갛게 동상을 입어 좀처럼 오그라지지 않는 손 때문이었다.
연주는 퉁퉁 부은 손을 감싸 쥐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근래 들어 밤마다 손마디가 욱신거리는 통증이 자주 찾아왔다.
하지만 손이 얼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연주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방망이를 움켜쥐었다. 그래도 요 며칠 사이 날이 급격하게 추워지면서 노역장에서처럼 감시하거나, 괜한 트집을 잡아 괴롭히고 조롱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다행이었다.
‘그래. 일하자, 일.’
빨랫감에 화풀이라도 하듯 연신 방망이질을 하던 연주의 손놀림이 점점 느려졌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동작을 무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정신이 샛길로 빠져 어젯밤 정엽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가 그런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나는 한 번도 널 탓한 적 없어. 너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이혼 전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든 무신경하기만 했던 사내가 왜 자꾸 주변을 맴돌며 귀찮게 구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하든 끝내 그녀를 비난하는 말로 끝맺는 재주만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탓한 적이 없기는.”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이 아니라면 그간의 행동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나를 향해 쏟아 내던 질린 한숨, 바늘 같은 시선, 사람을 먼지 보듯 하는 무신경한 태도는 분명 말로 하는 비난 못지않은 상처를 안겼다.
“그런 사람이 나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고…….”
애꿎은 빨랫감을 뒤적이며 답을 찾으려 애쓰던 연주가 실없이 웃었다.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거야.”
정엽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 연주가 실컷 두드린 빨래를 다시 물에 헹구기 시작했다. 이제 물기를 짜고 빨랫줄에 옷들을 넌 다음,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밤새워 반복하면 할당된 일은 끝이었다.
하지만.
“윽……!”
젖은 빨래가 가득 담긴 빨래 통을 들어 올리려 힘을 쓰던 연주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정신을 다잡으려 눈을 질끈 감고 길게 심호흡을 해 봤지만 어지럼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때가 됐나…….”
이제 기력이 거의 바닥났다는 걸 인지한 연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바라 마지않던 자연스러운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게 느껴졌다.
“며칠을 굶은 것 치고 오래 버티긴 했지.”
삶의 종말을 예감한 연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영항에 어울리지 않게 봄빛처럼 영롱했다.
“새언니!”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 연주가 소리 나는 쪽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시양공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 아바마마가 정말 새언니를 이리로 보냈어요?”
공주는 병아리처럼 달려와 연주의 목을 끌어안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주를 품에 안은 연주가 다 해진 옷소매로 공주의 통통한 볼에 흐르는 눈물을 찍어 냈다.
“공주마마, 왜 우세요.”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매일매일 소성궁에서 기다렸는데 새언니는 오지도 않고!”
공주의 칭얼거림에 마른 손으로 작은 등을 토닥이던 연주가 멀찍이서 자신을 바라보는 보모상궁을 발견하고 눈인사를 건넸다. 보모상궁은 생각보다 참담한 연주의 행색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군주께서 어찌 이런 고초를…….”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공주마마께서 이런 곳에 드나드시면 안 될 텐데요.”
“폐하께서도 공주마마만은 어찌하지 못하신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별 탈 없을 것입니다.”
주변을 경계하며 보모상궁과 대화를 이어 나가던 연주가 따뜻한 대답에 긴장이 풀려 울컥했다. 작은 몸이 전해 주는 온기가 너무나 반갑고 소중해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했다.
“그만 우세요, 공주마마.”
“히잉, 자꾸 눈물이 나는 걸 어떻게 해요!”
연주는 공주를 다독이며 공주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공주가 조금 진정하자, 연주는 차가운 제 손이 공주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소매 속에 손을 감춘 뒤 공주의 고사리손을 감싸 쥐었다.
“저는 잘 지내요. 그러니 이제 돌아가세요.”
“아니야. 새언니랑 같이 갈래요.”
“여기는 공주께서 계실 곳이 못 돼요. 그러니까…….”
“싫어! 새언니가 같이 안 가면 시양이도 여기서 살 거야!”
세차게 도리질을 하던 공주가 다시 연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여기 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