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26화 (26/161)

26화.

보다 못한 헌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님, 멈추십시오!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정엽은 무심히 대꾸할 뿐이었다.

“겁쟁이들은 적군에 사로잡히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아군의 전술을 적군에게 술술 부는 변절자가 되기 쉽다는 뜻이지.”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

“내 군대에선 저런 자의 혀를 미리 잘라 본보기로 삼는다. 전우에게 등을 맡겨야 하는 전쟁터에서 변절자에게 내 목숨을 맡길 수는 없지 않으냐?”

정엽은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까지 비뚜름히 기울여 가며 되물었다. 그의 얼굴은 분명 무표정했지만, 즐거운 듯 반짝이는 눈빛에는 악마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정엽의 기세에 밀린 헌왕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성을 잃은 상 공자는 도축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티는 짐승처럼 엉덩이를 뒤로 빼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보게, 날 좀 구해 주게. 이 미치광이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좀 전엔 본 왕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더니 그 무슨 망발인가. 너무 겁낼 것 없네. 혀를 좀 자른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아.”

정엽은 올가미를 쓴 돼지처럼 꽥꽥대는 상 공자의 추태가 우스워 빙글빙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황에 저리 웃다니. 제정신인가? 정엽을 지켜보던 헌왕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아악! 살려 줘!”

그사이 장명은 필사적으로 버둥대는 상 공자의 목을 옆구리에 끼고 팔로 꽉 조여 제압한 뒤 단도를 고쳐 잡았다. 이쯤 되면 그만두라 할 법한데도 정엽은 묵묵부답.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정엽의 의지를 읽은 헌왕이 연회석 가운데로 나와 간청했다.

“상 공자는 소제의 벗입니다. 어찌 이 아우가 보는 앞에서 피를 보려 하십니까? 소제의 얼굴을 봐서라도 부디 그것만은 참아 주십시오.”

“이 연왕부 주인은 나다. 감히 어디서 나서느냐?”

“형님, 한 번만 아우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우습구나. 벗을 데려오는 건 네 마음일지 몰라도 보내는 건 주인인 본 왕의 마음이다. 집주인을 모욕하는 객을 어찌 그냥 보낼까.”

정엽이 뜻을 꺾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헌왕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본래의 냉혹한 표정으로 돌아온 정엽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마. 하나 언제고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기필코 네놈의 혓바닥을 베어 버릴 테니 함부로 놀릴 생각 마라.”

정엽이 이야기하는 내내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던 헌왕은 곧 공자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후우…….”

소란이 가라앉고 아수라장이 된 연회석을 내려다보던 정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 공자가 떠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금 보니 연왕부 곳곳 연주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수도로 돌아온 후 모든 게 엉망이로군.”

정확히는 채연주를 다시 만난 뒤로.

이게 다 연주 탓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심사가 꼬인 정엽이 청방을 박차고 나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이랴!”

그러고는 아끼는 흑마 위에 훌쩍 올라타 그대로 영항까지 내달리려는 순간이었다.

“전하!”

번개처럼 튀어 나가려는 그의 앞에 뒤늦게 달려 나온 양해가 두 팔을 벌려 막아섰다.

“야심한 시각에 또 어딜 가시옵니까?”

“비켜라. 영항에 간다.”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음식을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이 찬합을 챙겨 가시지요.”

“내가 지금 그 여자 하나 먹이자고 찬합이나 들고 갈 기분으로 보이느냐?”

정엽은 비키라는 말에도 찬합을 받쳐 올리며 요지부동인 양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금방이라도 말의 배를 걷어찰 것처럼 위협적으로 발을 굴렀다.

하지만 며칠째 사람이 굶고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양해의 강권에 못 이겨 신경질적으로 찬합을 낚아챈 정엽이 말을 이끌고 영항으로 향했다.

* * *

밤의 장막이 온 세상을 뒤덮은 시각, 영항에 소리 없이 숨어든 정엽이 연주를 마지막으로 만난 창고 앞을 서성였다. 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창고 안에서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없는 건가…….”

혼잣말과 함께 무심코 창고 문의 손잡이를 당기자 쉽게 문이 열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연주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디를 간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문득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긴장한 정엽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영항의 건물은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았다.

‘영항령을 끌어내 행방을 물어야 하나…….’

정엽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멀리서 희미한 물소리와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해진 정엽이 곧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

한겨울 우물가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빨랫감에 파묻힌 여인 하나가 있었다. 시린 달빛 한 조각에 의지해 여인에게 다가간 정엽의 걸음이 이내 멎었다.

“너…….”

여인은 정엽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주였다. 그러나 연주는 정엽이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듯 가느다란 팔을 흐느적거리며 힘겹게 빨래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금방이라도 목이 꺾일 것처럼 위태로운 연주의 행색에 울컥한 정엽이 그녀의 손에 들린 방망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럼에도 어느새 이런 식의 횡포가 익숙해진 연주는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지?”

“이리 내요.”

연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뿐인가. 목깃과 소매가 다 해져 흡사 넝마를 걸친 듯한 행색에서는 예전의 영광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

기가 막혀 망연자실한 얼굴로 연주를 바라보던 정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히 보니 지금 연주가 입고 있는 옷은 함량궁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영항에서 나오려고 미친 척이라도 하는 건가?”

영항의 죄수들은 모두 붉은 흙으로 물들인 자의(赭衣)를 입었다. 그런데 연주 혼자 비단옷을 걸치고 있다는 건 죄수들 사이에서 그녀가 공동의 조롱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정엽은 지금 이 상황이 몹시 짜증스러웠다. 이 여자만 마주치면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날까. 몇 번을 자문해도 답이 없었다.

“이거나 먹어.”

뺏은 방망이 대신 찬합을 내준 정엽이 꼿꼿이 서서 연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찬합을 이상하고 낯선 물건처럼 바라보던 연주는 만사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 말고요.”

“며칠째 아무것도 안 먹었다면서.”

“필요 없어요.”

지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연주는 고집스럽게 음식을 거부했다.

“온종일 노역을 한다면서!”

애써 억누른 화가 도로 치솟은 정엽이 버럭 소리쳤다.

“나는 죄인이에요. 죄를 지어 영항으로 쫓겨난 사람이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는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뿐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언성을 높이는 정엽과 달리 연주는 마치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초연하기만 했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음을 직감한 정엽이 이를 악물고 애꿎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겨우 그런 핑계로 우리는 죽은 아이를 한 번 버렸고, 황제 폐하를 속이며 두 번 버렸어요. 나는 더 이상 내 아이를 버릴 수 없어요.”

“벌써 2년이 지났어. 이제는 세상에 벌어진 적 없는 일이 됐다고. 왜 그렇게까지 그 괴물을 놓지 못하는 건데?”

연주는 아이를 거침없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정엽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이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안타까움도 없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어쩌면 이리도 한결같은가.

여전히 아이의 죽음 때문에 고통 속에 사는 저를 한심한 듯 바라보는 눈빛, 가시 돋친 말들. 다시는 정엽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가슴에 맺혀 있던 해묵은 응어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게요. 왜일까요?”

“…….”

“이제 세상에 태어난 적도 없는 아이가 됐으니 누군가는 그 아이를 기억해야죠.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안 그래요?”

힐난에 가까운 연주의 말에 이마를 짚은 정엽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런 괴물이 태어난 건 내 잘못도 아니고 네 잘못도 아니야. 그건 그냥 사고였지. 시간이 지나면 잊힐 사고. 그런데 고작 그만한 일로 굶어 죽겠다고 소란을 피우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사고라고?

본래가 냉정하고 잔혹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뜻대로 친왕이 된 지금까지도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하다니. 분노한 연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당신한텐 사고였는지 몰라도 아이가 죽은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어 본 적이 없어요.”

“채연주.”

“남들 눈을 피해 침실에 틀어박혀 있노라면 모든 게 내 잘못 같았어요. 아이가 그렇게 태어난 게 모두 내 탓 같았다고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

“음식을 너무 짜게 먹지 않았으면, 잠을 너무 많이 자지 않았으면, 약이 아무리 써도 피하지 않고 제때 먹었으면, 일곱 달 만에 나온 우리 아이, 조금만 더 오래 배 속에 품어 주었으면……!”

감정이 복받쳐 부들부들 떠는 연주의 눈에서 기어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를 품은 일곱 달 동안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행동을 되새기다 보면 벼랑 끝에 몸을 던지고 싶었어요. 매일 지옥 같아 단 하루도 괴롭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요.”

“…….”

“당신 눈엔 그 애가 흉측하고 버러지만도 못했는지 몰라도, 내게는 그 아이가 무엇보다 소중했어요.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부황의 관심보다, 이 대화국의 강산보다 더요!”

“…….”

“이제 정말 모든 걸 잃었으니 더는 이 삶에 미련 없어요. 차라리 저승에 가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아이 마음껏 안아 줄래요. 그러니 날 내버려 둬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