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다 끝났나?”
“예, 전하. 너무 노여워 마시옵소서. 여기 이 공자들이 철이 없기는 해도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에, 또 소생은 평소 연친왕 전하를 깊이 흠모하여…….”
하지만 한번 말문이 터진 상 공자는 고작 술 한 잔에 취기가 오른 듯 주책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개중에서도 가장 정엽을 황당하게 만든 것은 헌왕을 따르는 처지에 연왕부 사병인 용무군에 들어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대목이었다.
“말만으로도 고맙군. 한데 기야, 너는 어찌하여 말이 없느냐?”
“제 벗들이 형님을 흠모하는 마음이 이리도 차고 넘치는데 제가 감히 끼어들 틈이 있어야 말이지요.”
“저런, 나는 오늘 네 덕분에 귀인을 얻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형님 전하께서 복이 많으신 게지요.”
떨떠름한 헌왕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정엽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게 어디 내 복인가. 우리 아우님의 복이지.”
예로부터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차고 넘치게 많으면 무엇 하나. 하나같이 쓸모없는 쭉정이들뿐인 것을.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연친왕 전하, 겸양도 지나치면 좋지 않사옵니다. 전하께 복이 넘치니 오늘의 이런 경사도 맞이하신 것 아니옵니까?”
눈치 없는 상 공자와 달리 사람은 덜됐어도 잔머리는 잘 굴러가는 백 공자와 진 공자가 헌왕의 눈치를 살피곤 재빨리 말을 얹었다.
“맞사옵니다. 사필귀정이라고 하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승설군주도 그 모양 그 꼴이 된 것이겠지요.”
“말이 나와 말인데. 승설군주, 아니 채 여인이 영항으로 내쳐진 이유가 폐하께 항명해서라면서요?”
“그렇다네. 듣기로 폐하께서 채 여인에게 재혼을 허락하셨는데 황명을 거부하고 망언을 일삼았다지 뭔가.”
“허어. 참으로 배은망덕한 계집이로군! 뭐, 차라리 잘됐지. 혼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디 그 계집뿐이겠는가? 혼인을 명받은 사내도 황명만 아니면 당장 도망을 치고 싶을 텐데.”
“하기야. 천하의 절색이라고는 해도 생각 없이 곁에 두었다가 같이 천벌을 받아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는가? 난 겁이 나서 못 하겠네.”
예전 같았으면 평해왕의 위세가 두려워 연주에 대해 입도 뻥긋 못 했을 공자들은 연주가 영항에 끌려간 것을 핑계로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었다.
하지만 끊어진 인연인들 한때는 자신의 아내였던 여인이 아닌가. 그런 연주에 대한 모독을 정엽이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심상치 않은 정엽의 눈빛을 읽은 부관이 은근슬쩍 정엽의 잔을 채웠다.
“저, 전하. 술잔이 비었사옵니…….”
“감히 어딜 끼어드느냐.”
불안한 눈으로 정엽과 헌왕 사이의 기 싸움을 지켜보던 부관이 나서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세도가 공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주제넘게 나서는 것이 아니었는데. 부관은 헌왕과 공자들을 손님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떠들어 댄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러나 부관이 입을 꿰매기 전에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정엽은 이미 옥을 깎아 만든 술잔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쨍강!
옥배는 정엽의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나 버리고 말았다.
“이크!”
“저, 전하?”
끝 모르고 이어지던 저급한 수다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뚝 끊겼다. 토끼 눈이 된 공자들은 정엽이 앉은 상석과 헌왕을 번갈아 보다가 난데없는 굉음에 놀라 자라목이 되었다.
쾅!
기세가 꺾인 공자들과 달리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정엽은 조각난 술잔을 손에 쥔 채 주안상을 세게 내리쳤다. 단단한 오동나무로 만든 주안상이 우지끈 주저앉고 나자, 정엽의 손아귀에서는 박살 난 술잔의 잔해와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
하지만 정엽의 매서운 잿빛 눈동자는 먹잇감을 찢어발기는 맹수의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정엽이 사냥할 먹잇감은 헌왕, 소기였다.
“술맛이 영 별로군.”
경악으로 굳어진 손님들의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한 정엽이 혼잣말하듯 낮게 읊조렸다. 정엽의 눈빛에 실린 흉포한 살기에 긴장한 공자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세도가의 자제로 태어나 배짱이라곤 조금도 없군.’
자식이 이 모양인데 아비라고 해서 다를까. 여기서 무얼 하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백 공자.”
“예? 예, 전하.”
“식도락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이 정도 음식은 변변치 않지. 그래도 본 왕을 위해 애써 거짓을 고해 주다니 고마운 일이로군.”
“아, 아니옵니다. 거짓말이라니요. 소생은 그저 연왕부 요리사의 음식 솜씨에 진심으로 감탄한 것뿐이옵니다. 소생은, 그러니까. 소생은…….”
“저런, 벌써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가? 사실 연왕부에서만 즐길 수 있는 진짜 별미는 따로 있다네. 본 왕의 마음이니 부디 사양하지 말게.”
별미라니. 이 분위기에 산해진미가 상에 놓인다 해도 무슨 정신으로 그것을 입에 집어넣겠는가. 어느덧 땀까지 뻘뻘 흘리며 정엽의 눈치를 보던 백 공자가 다른 일행들을 향해 눈짓했다.
“흠, 흠. 헌왕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시옵니까?”
“내 형님께서 준비하신 것인데 마다할 리가 있는가.”
“하하, 그렇지요? 별미, 별미라니 참으로 기대가 되옵니다!”
헌왕을 향해 적당히 사양하고 일어나자는 뜻을 넌지시 전했던 진 공자가 그의 반응에 헛기침하며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 뒤를 상 공자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따랐다.
“장명, 지금 당장 주방에 일러 귀설을 준비하라고 전해라.”
“예, 전하.”
정엽의 명을 받은 부관이 야릇한 웃음을 띤 채 자리를 떠났다. 방에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귀설’이라는 정체 모를 음식에 대해 추측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정엽의 태도에 말 한마디 없이 서로 눈치만 보던 공자들은 시간이 지나자 처음 청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 갔다.
“아까 그 술잔에 새겨진 무늬가 아주 아름답고 정교하던데 산산조각이 나다니 아쉽구먼.”
“아마 그 잔보다 전하께서 흘리신 술이 몇 배는 비쌀 걸세. 명주로 손꼽히는 오량액주(五粮液酒)가 아닌가.”
“그런 건 자네 같은 술고래에게나 중요한 것 아닌가. 음식보다 중요한 건 음식을 담는 그릇이지. 암!”
그릇이라…….
그릇 기(器)는 헌왕의 이름자. 가만히 공자들 간에 오가는 대화를 듣던 정엽이 아우를 돌아보았다. 잠시 당황하는 듯하던 헌왕은 이내 낯빛을 바꾸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데 형님, 귀설이면 백융이 즐겨 먹는다는 음식이 아니옵니까?”
“호오, 기 너도 접해 본 적이 있느냐?”
“아닙니다. 그저 떠도는 풍문을 접했을 뿐이지요. 한데 대화국의 적장자이신 형님께서 어찌 오랑캐들의 음식을 즐겨 드시옵니까?”
“오랑캐의 음식이든 뭐든 입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음식 아니냐. 너도 마음에 들 테니 맛보려무나.”
“예, 형님.”
음식을 핑계로 은근히 정엽을 깎아내린 헌왕이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때 여러 명의 태감과 궁녀들이 음식 접시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헉…….”
은접시에 담긴 길고 큼직한 고깃덩이를 마주한 손님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나?”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요리입니까?”
“맞습니다. 이 고깃덩이는 대체…….”
염장이 된 듯 짠 내음이 올라오긴 하지만, 평소 날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진 공자가 접시에 놓인 고기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인상을 썼다. 담담한 척하던 헌왕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하, 이것은 아무래도 혀 요리인 듯하옵니다.”
뒤늦게 음식의 정체를 알아차린 백 공자가 모두에게 말했다.
고작 혀 요리라? 백 공자의 말을 들은 헌왕은 굳어진 인상을 펴며 호기롭게 고깃덩이를 썰어 입에 넣었다. 분위기상 귀설을 마다하기 어려워진 공자들 역시 마지못해 음식을 맛보았다.
하지만 짜다 못해 쓰게 느껴지는 소금 맛 때문인지 그들은 덜 익은 땡감을 씹은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다.
“음식의 맛이 아주 독특합니다.”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이 음식은 백 공자의 말대로 혀 요리다. 백융에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패잔병의 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먹는 풍습이 있거든. 그래서 이름도 귀설이지.”
“……예?”
“귀신 귀, 혀 설. 귀신의 혀. 오늘 너희들에게 대접한 요리는 올여름 한북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백융 잔병들의 혀를 잘라 만든 것이다.”
“우욱!”
오랑캐들이 사람의 혀를 절여 먹는다는 풍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먹지 못할 것을 씹어 삼켰단 생각에 비위가 상한 헌왕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엽이 내놓은 요리는 사실 돼지 혀를 소금에 절인 것으로, 권세를 좀 부린다는 자들은 모두 한 번쯤 접해 봤을 음식이었다.
“백 공자와 진 공자는 어떠한가?”
“저, 전하, 이 음식은…….”
“참, 상 공자는 이 귀설의 맛을 반드시 기억해 두도록 하게. 전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묘미이니까.”
고작 말 한마디에 이리 꼴사나운 행태를 보이다니. 상석에서 헌왕과 공자들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정엽이 조소했다.
콕 집어 정엽에게 지목을 당한 상 공자의 표정은 특히 가관이어서, 평소 웃음이 많지 않은 정엽조차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 없이 연왕비를 비방한 게 늦게나마 잘못인 줄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마저 들게. 본 왕이 자네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 아닌가.”
“전하, 모르면 몰라도 알고는 못 먹습니다. 사람의 혀를 절여 먹다니요!”
“저런, 이깟 고깃덩이가 뭐라고 그리 펄펄 뛰는가? 그런 작은 그릇으로 어찌 조정의 중임을 감당하려고?”
“아무리 그래도…….”
“상 공자는 지금 본 왕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인가? 장명.”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진 공자와 백 공자가 당장이라도 청방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사이 성큼성큼 상 공자에게 다가간 부관 장명이 그의 볼과 아래턱을 꽉 움켜쥐곤 강제로 입을 벌렸다.
“으아아악!”
눈앞에서, 아니 입 앞에서 번뜩이는 단도를 보고 겁에 질린 상 공자가 돼지 멱따는 소릴 질러 댔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시체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