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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22화 (22/161)

22화.

인상까지 쓰며 한참 생각하던 정엽이 망설임 끝에 옷소매 안쪽을 뒤집었다. 거기엔 정엽의 짐작대로 편지지에 그려진 꽃과 같은 형상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이 자수는 내의, 연무복, 외투 할 것 없이 연주가 계절마다 손수 지은 그의 의복마다 수놓던 것. 정엽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 붉은 꽃 자수는 갑옷에 덧댄 내피와 투구 안쪽에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대개 전장으로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들은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버들가지를 수놓았다. 버드나무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잘 자라는 생명력 강한 나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는 기이하게도 버들가지가 아닌 꽃송이를 수놓았다. 전쟁터를 누비는 장수의 갑옷과 투구에 수놓는 것이 고작 꽃 한 송이라는 게 우습긴 해도, 그게 아내의 유일한 즐거움이라 여겨 한 번도 이유를 물은 적 없는 정엽이었다.

“이쯤 되면 채연주가 미련한 건지, 아무 생각 없던 내가 이상한 건지.”

그럼에도 이 찜찜한 감정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걸치고 있던 옷에도 여전히 연주의 손길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남남이 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하여튼 미련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든 이 찜찜함을 털어 버리기 위해 멀리 있는 사람을 향해 비난을 퍼붓던 정엽의 한숨이 깊어졌다. 신경질적으로 편지함을 정리해 서재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 둔 정엽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

연주가 영항으로 끌려간 지도 벌써 나흘째.

정엽의 예상대로라면 연주는 지금쯤 평해왕의 자녀에게 주어진 면책 특권을 사용해 진작 영항을 빠져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연주가 영항에서 나왔다면 잔정 많은 그의 부관이나 양해가 부지런히 그 소식을 옮겨 들려줬을 터였다.

“대체 왜…….”

정엽은 바로 어제, 평해왕의 문안 상소가 어전에 닿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평해왕의 문안 상소는 영지인 남해 지역의 근황에 대한 보고 목적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분명 딸인 연주의 구명을 청했을 텐데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니. 이걸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설마 천하의 평해왕조차 부황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인가?”

물론 황제가 쓸데없이 고집을 세우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평해왕의 간청마저 통하지 않았다면, 황제는 연주가 직접 굴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근심이 하나둘 쌓여 어느새 가슴을 짓누른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찬찬히 함량궁에서 황제와 나눈 대화를 돌아보던 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는 아들이었느냐, 딸이었느냐?’

고작 질문 하나 때문일 리가. 하지만 뒤늦게라도 황제가 다시 연주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한수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들도, 딸도 아니었으니까. 연주는 그가 황제에게 아들이었다고 답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니까.

“그래서 지금껏 영항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로군.”

쓸데없이 감정적일 때가 있긴 하지만, 채연주는 기본적으로 매사 깊이 생각하고 진중하게 행동하는 게 몸에 밴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황제의 진노를 사 스스로 나락으로 걸어 들어간 것만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지금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 아내였던 사람이니까.

한 이불을 덮고 잠들던 부부였으니까.

겨울이 시작돼 날이 추워졌으니까.

하지만 정엽이 결단한 그 시각, 연주는 거대한 환란 앞에 내몰려 있었다.

* * *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 네 죄를 알렷다?”

촤악! 허공에서 뱀처럼 빙그르르 돌던 채찍이 연주의 몸을 후려쳤다.

“헉……!”

영항의 모든 죄수가 모두 모인 앞뜰, 처음 영항에 들어온 그날처럼 홀로 내던져진 연주가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일부러 이러는 게지? 우리가 군주 대우를 해 주지 않는다고 일부러 보리쌀에 돌을 섞어?”

“아직 일이 서툴러 그래요.”

“너 같은 것들은 거짓말을 숨 쉬는 것처럼 하지 않느냐! 누가 모를 줄 알고? 네가 찧은 보리쌀로 밥을 지어 먹다가 내 이가 부서질 뻔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도 네게 죄가 없느냐?”

“그건……!”

쫘악!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동물 가죽을 두껍게 꼬아 만든 채찍이 다시 연주를 할퀴고 지나갔다. 소금물에 불린 채찍이 온몸을 할퀼 때마다 눈앞에 벼락이 치고 몸 곳곳에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그러나 연주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주가 지금 영항에 있기는 하지만 권력자인 평해왕의 하나뿐인 딸 아닌가. 고귀한 상전이 능멸당하는 모습은 상전에 의해 영항으로 내쫓긴 모두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겼다.

“저것 봐.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입을 다무네!”

“더 후려치세요, 마마님! 더요!”

인정사정없는 채찍질을 감당하는 내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연주의 몸이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악의로 똘똘 뭉친 영항의 죄수들은 오히려 연주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어디서 약한 척이야!”

“어머, 고매하신 군주께서도 매질은 당하기 싫으신가 봐.”

“꼴좋다. 저런 애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노역과 매질에 시달렸으니 이쯤 되면 쓰러지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었지만, 연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상궁은 도리어 분한 얼굴로 그녀를 몰아세웠다.

“못된 것! 왜 잘못했다 빌지 않느냐! 왜!”

죄수들의 응원 속에서 마구 채찍을 휘둘러 대던 상궁은 어느 순간부턴 이성을 잃은 듯 채찍을 내던지고 연주를 발로 밟고 걷어차기 시작했다.

독기를 넘어 시퍼런 살의가 느껴지는 상궁의 폭력에, 죄수들이 모인 뜨락은 어느새 침묵에 잠겼다. 이럴 때 상궁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멈춰라!”

영항령의 호령에 정신을 차린 상궁이 존재를 들킨 바퀴벌레처럼 다급히 몸을 사렸다. 연이은 매질과 발길질에 눈앞이 흐릿할 지경이지만, 애써 몸을 일으켜 세우고 고개를 든 연주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저자의 계책이로구나.

“영항의 우두머리로서 요 며칠 계속되는 사고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보리쌀로 배를 채우면 쉽게 허기가 지는데 밥의 반이 돌이라니!”

“…….”

또 같은 이야기인가.

그간 연주는 보리쌀 한 섬을 다 찧지는 못해도, 밤낮으로 일하며 이곳 사람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죄수이긴 해도 사람 입에 들어갈 음식인데 어떻게 일부러 돌을 섞을 생각을 하겠는가.

“죄수들의 힘이 달려 영항에서 찧은 쌀이 부족해지면, 그 쌀을 먹고 사는 이 황성의 궁인들까지 배를 곯아야 한다. 너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의 죄가 더 무거워진다는 뜻이니라!”

“영항령께서 제게 찧으라 하신 보리쌀이 한 섬입니다. 장정 한 사람이 1년 동안 배를 채우고도 남을 양이지요. 그걸 다 찧지는 못해도 영항에 있는 사람들이 배를 곯을 정도로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그 보리쌀은 모두 어디로 가고 밥에 돌이 섞였단 말이냐?”

“이곳에 곡식을 축내는 쥐새끼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쥐새끼라. 오랜 매질에도 여전히 눈빛이 살아 있는 연주를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영항령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것참 재밌는 이야기군. 쥐새끼라. 여기 모인 자 중에도 쥐새끼가 있느냐?”

과연 네가 이 함정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보란 듯 연주에게 질문을 던진 영항령이 거만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황제의 하문에도 떨지 않던 연주가 고작 영항령의 말장난 앞에 무너지랴.

“쥐새끼는 꼭 밤에만 출몰하더군요. 밤이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으나 곡식을 빼돌리는 자, 곡식에 돌을 섞는 자, 그리고 망을 보는 자가 있다는 것은 압니다.”

애초에 이 일을 맡은 연주를 모함하고, 남들 눈을 피해 곡식을 빼돌리려면 이 방법밖엔 없었다. 어찌 보면 뻔한 대답이었지만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핍박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하하하! 영항에 쥐새끼가 넘쳐 나는군! 한데 너는 입만 암고양이처럼 나불댈 뿐, 쥐새끼 하나 잡아 내지 못했으니 이를 어쩐다?”

연주의 대답이 마음에 든 영항령이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이제 꼼짝없이 연주가 죽을 것이라 예상한 죄수들이 저마다 고개를 저었다.

“판결하겠다. 앞으로 너는 영항에서 먹을 보리쌀을 찧는 대신 죄수들의 빨래를 맡거라. 매일 손수 물을 길어 와 옷을 깨끗이 빨아 돌려주는 것으로 모두에게 사죄하라는 뜻이다. 알겠느냐?”

“…….”

“왜 대답이 없지?”

“……알겠습니다.”

온몸의 맥이 풀린 연주가 힘겹게 대답했다. 영향령은 육체적 피로와 고통 속에서 점차 체념을 배워 가는 듯한 연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천하를 호령하는 장수라도 허물어지게 되어 있지. 내가 너를 무너뜨리고 다시 아름답게 빚어 주마.’

하지만 연주는 영항령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빨래터로 보내는지 짐작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자, 이제 모두 돌아가 맡은 일을 시작해라!”

“예.”

영항령의 지시에 죄수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텅 빈 뜰에서 한참 숨을 고르던 연주는 저를 매질하던 상궁과 눈이 마주치곤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랫감은 숙소 뒤편의 북쪽 우물가에 쌓여 있으니 그리로 가라.”

연주는 상궁의 사나운 눈길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북쪽을 향해 걸었다.

매일 고통과 치욕이 해일처럼 넘실대는 이 상황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어, 연주의 머릿속은 먹구름 낀 하늘보다도 캄캄했다.

‘차라리 이 길이 망자들의 안식처인 북망산에 오르는 것이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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