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21화 (21/161)

21화.

“네년이 일을 똑바로 못한다고 다들 불만이 많으니라. 그러니 확인을 좀 해야겠다.”

정체 모를 바가지를 끌어안고 나타난 상궁은 대뜸 연주가 지금까지 찧은 곡식의 양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 뭘 한 게냐? 한 말도 안 되지 않아! 이래서 어느 세월에 한 섬을 다 찧겠다는 게야?”

“…….”

“보리 껍질도 제대로 못 벗긴 게 반이구나. 이걸 누구 입에 넣으라는 건지. 쯔쯧! 죄인들 입에 들어갈 거라고 일을 대강하는 것이냐?”

처음 해 보는 일을 단번에 완벽하게 해내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했다. 연주는 이제 상궁이 자신을 뭐라 비난하든 대꾸할 여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상궁의 구박은 계속됐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네년은 그중에서도 하늘의 벌을 받아 제일 재수가 없는 계집이지. 그런 네가 이곳에서 살아 나가길 바라느냐?”

“…….”

“너 같은 년은 길을 걷다 돌팔매질을 당해 죽어도 호상이니라. 파리 목숨보다 못한 게 네년 신세라는 뜻이다.”

“…….”

“그러니 허튼 꿈 꾸지 말고 버러지 같은 목숨을 이렇게라도 부지할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일하거라.”

상궁의 비아냥에 울컥한 연주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상궁은 그런 연주를 벌레 보듯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른 죽여 치워 버리고 싶지만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곳이니 별수 없지. 오늘은 일을 잘하지 못했으니 네 밥은 없다. 정 뭐라도 먹고 싶으면 이거라도 처먹든지.”

상궁은 들고 온 바가지를 연주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담긴 게 무엇인지 몰라도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연주를 향해 비웃음을 던진 상궁은 바가지를 땅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하아…….”

온종일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변명 한마디 없이 잘 견디던 연주는 꺾인 붓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된 노동이나 매질보다, 비수 같은 상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가슴에 바윗돌을 얹은 듯한 갑갑함도 잠시, 바가지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로 인해 비위가 상한 연주가 뒤늦게 내용물을 살폈다.

“윽…….”

바가지 안에는 언제 쪘는지 알 수 없는 만두와, 다 불어 터진 보리알이 덕지덕지 엉긴 나물 한 덩이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궁인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모아 놓은 것인 듯했다.

‘더 악취가 나기 전에 얼른 버려야겠네.’

조금 있으면 식사를 마친 죄수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이걸 여기다 방치하면 그렇지 않아도 적대적인 죄수들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다.

“그런데 측간은 또 어디지?”

일단 노역장에서 나와 한참 측간을 찾아 헤매던 연주는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허름한 건물을 발견하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상한 음식을 쏟아 버리려는 순간, 측간 속에서 삐죽 솟아 나온 허연 물체를 발견한 연주가 동작을 멈췄다.

“……!”

악취를 무릅쓰고 기이한 물체를 살펴보던 연주는 이내 경악한 얼굴로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온종일 먹은 게 없기로서니, 몇 번을 눈을 씻고 봐도 분뇨 통 안에 뒤섞인 것은 분명 사람의 팔이었던 것이다.

측간에 사람이 죽어 있다니!

“우욱!”

빈속에 든 것이라곤 신물뿐이라, 측간에서 뛰쳐나온 연주는 흙바닥에 엎드려 목이 따갑도록 속을 게우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 앞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영항령이 쭈그려 앉아 히죽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척 부인을 만난 소감이 어떠하냐?”

“척 부인……?”

연주는 영항령의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영항령이 말하는 척 부인이 지금 측간에서 죽어 있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데 생각이 닿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제법 반반하기에 나를 섬기는 대신 노역을 면하게 해 주었더니 은혜를 모르고 도망을 치려 하더군. 그래서 저 꼴로 만들어 줬지.”

“어떻게 사람을……!”

“그런데 말이다. 지금 보니 저 배은망덕한 계집에게는 척 부인의 말로를 따르게 한 것조차 사치였던 듯싶구나. 바로 여기, 제왕을 기쁘게 할 경국지색의 미인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돌연 연주의 턱을 움켜쥔 영항령이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 돼지가 되려면 이 몸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워야 하거든. 너처럼.”

“……!”

“기다려라. 세상이 너를 잊을 즈음, 내가 이곳에 너를 위한 주지육림을 만들어 주마.”

영항령은 혼란과 충격에 빠진 연주의 눈을 들여다보며 킬킬,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연주는 솜털이 곤두서는 오싹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 *

시간이 흘러 대설(大雪)이 다가왔다. 다른 도시보다 겨울이 더디게 오는 수도 조양도 어느새 초목이 마르고 살얼음이 끼는 날이 많아졌다. 그야말로 동장군의 횡포가 코앞이라. 연왕부 역시 다른 저택과 마찬가지로 추위 대비에 여념이 없었다.

궁인들은 수령 태감인 양해의 지시에 따라 모든 건물의 창문을 활짝 열고 묵은 먼지를 쓸어 냈다. 가을 내내 사용했던 옷가지와 이부자리도 모두 바깥으로 내왔다.

“이부자리는 깨끗하게 세탁해야 하니 여기 이 태감들에게 주십시오.”

“알았네. 오다 보니 장작을 패던데 군사들을 불러 좀 도와줄까?”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겨울에는 장작을 아무리 많이 준비해 두어도 모자라거든요.”

“아무렴. 추운 겨울에 땔감은 다다익선이지.”

연왕부의 사병인 용무군(勇武軍)도 오늘만큼은 대숲 안 병영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흔쾌히 일손을 도왔다.

하지만 정엽만큼은 이 소란 속에서도 홀로 유유자적했다. 군사들이 궁인들의 일손을 거들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기에 하루 훈련을 쉬고 쫓겨나듯 서재로 온 덕분이었다.

“흐음…….”

그 탓일까. 아니면 아직 한가로운 일상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책 한 권을 끼고 앉아 있던 정엽의 한숨이 길었다.

쓰윽, 싸악. 쓰윽, 쓰윽.

그러나 한숨 늘어지는 서재와 달리, 창밖에선 경쾌한 빗질 소리가 들려왔다. 정엽이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는 나이 어린 태감이 담장 아래 쌓인 낙엽과 나뭇가지를 쓸어 내느라 바빴다.

‘아직 일을 거들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낯선 얼굴. 온몸을 휘감는 생경한 감각.

수도에 돌아온 지도 몇 달이 지났지만 좀처럼 평온함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엽은 읽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탁 덮었다. 그 순간.

“엄마야!”

왕이 책장 덮는 소리에 놀란 듯, 서재 밖에서 먼지 앉은 장식장을 얌전히 털던 궁녀가 소리를 질렀다.

우당탕! 쿵!

곧이어 장식장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크고 작은 물건들이 요란하게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어떻게 해. 난 몰라…….”

“무슨 일이냐?”

“송구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인이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렸습니다!”

뜻밖의 소란에 정엽이 휘장을 걷고 나오자 바닥에 주저앉은 궁녀가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보아하니 자기 키보다 높은 장식장을 청소하다가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이건…….”

“당장 원래 자리에 다시 정리해 두겠사옵니다. 전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됐다. 나가 봐라.”

다른 물건들은 차치하고, 활짝 열린 자단목 상자와 바닥을 어지럽게 나뒹구는 서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엽이 궁녀를 내보냈다.

나가라는 말에도 한참을 우물거리며 망설이던 궁녀는 정엽이 재차 나가라고 손짓하자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갔다.

“많기도 하군.”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에 익은 자단목 상자에 묵묵히 서찰을 갈무리하던 정엽이 읊조렸다.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 서찰의 발신인은 모두 연주였다.

아직 뜯어보지 않은 서찰은 여러 개. 그러나 확인한 흔적이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서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더라.

문득 옛일을 회상하던 정엽이 자연스럽게 봉투에서 서찰을 꺼내 펼쳤다.

[오늘은 파도가 잠잠해서 제 마음 또한 평온해요.

듣기로 전하께서 계신 한수는 사철 눈이 녹지 않는 곳이라기에 침실 앞 뜨락에 오래 묵은 백매화 한 그루를 들였어요.

매화가 희게 흐드러지면 눈이 오지 않는 이곳 해광성에서도 전하께서 보고 계신 것과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조만간 조양으로 귀환하신다고 들었어요. 부디 여정 내내 무탈하시길 빌어요.]

우아하고 단정한 필체로 쓰인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정엽이 조소했다. 이 편지는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와닿는 바가 없었다.

“곱게 자라 그늘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건지…….”

매일 전장에서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적과 추위에 맞서 싸우는 사람에게 파도가 잠잠해서 기분이 좋다는 둥, 꽃이 만발한 풍경이 혹한의 풍경과 비슷할 것 같아 꽃나무를 들였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쓸데없이 감성적이지 않은가.

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지만 채연주의 시시콜콜한 일상과 취향은 척후병이 보내오는 첩보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혼약이 결정된 순간 아내에 관한 유의미한 정보라곤 그녀가 평해왕의 하나뿐인 적녀라는 게 전부였다.

“평해왕의 딸. 평해왕.”

물론 평해왕은 지금도 정엽에게 존재감이 큰 인물 중 하나였다. 정엽이 대화국의 북방을 책임진다면, 평해왕은 남방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이 세운 공과 정치적 목적을 띤 혼약을 어찌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겠는가.

그래. 어차피 정치적 이해 때문에 맺어진 인연, 상대의 취향이나 생활 습관 같은 걸 자세히 알아봐야 시간이 지날수록 장점보단 단점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저 스쳐 간 인연이겠지.”

정엽은 오랫동안 뜯어보지 않은 서찰을 바라보며 어쩐지 심란해졌지만, ‘스쳐 간 인연’이라는 말로 모든 걸 덮어 버리기로 했다.

“…….”

하지만 펼쳤던 편지를 갈무리하려는 찰나, 편지지 한 곳에 고이 내려앉은 붉은 꽃송이가 정엽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붉은 꽃잎과 샛노란 꽃술, 윤이 반질반질 나는 짙은 녹색 잎사귀가 인상적인 이 꽃은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어쩐지 눈에 익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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