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20화 (20/161)

20화.

궁녀들에게 양팔을 결박당한 연주는 창고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끌려갔다. 높은 담장이 끝없이 이어진 좁은 길은 앞으로 연주가 겪을 일이 험난할 것이라는 예고 같았다.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비가 그쳐 더욱 쌀쌀해진 겨울 하늘에는 잠시나마 이정표로 삼을 구름 한 조각조차 없었다. 미로 같은 골목이 좌우로 굽이굽이 꺾어지기를 반복하자, 금세 방향 감각을 잃은 연주가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길을 잃은 지 오래인 걸음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향할 뿐이었다.

‘이곳이 영항인가…….’

살아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곳. 도망친다 한들 출구를 찾을 수 없어 귀신에 홀린 것처럼 죄인이 제 발로 기어 돌아온다는 기괴한 곳.

내가 그런 곳에 들어왔구나.

연주는 속절없이 이끌리는 대로 걸으며 탄식했다. 그 옛날 여 태후는 마음속에 얼마나 큰 원한을 쌓아 두고 살았기에 이런 끔찍한 곳을 만들었을까.

“이년이 왜 이렇게 굼떠?”

“나를…….”

“얼씨구! 잡소리 할 정신도 있네? 닥치고 걷기나 해!”

궁녀의 호령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강제로 머리가 깎이고 목에 칼을 찬 채 온종일 쌀을 찧는 여인들의 환영이 맴돌았다.

결국에는 나도 여 태후의 명으로 영항에 갇힌 여인들처럼 눈과 귀를 잃고 손발이 잘리는 걸까. 그렇게 일평생 더러운 곳에 갇혀 죽게 되는 걸까.

“이보게, 나를 그냥 죽일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여인들처럼, 다른 여인들처럼…….”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인간 돼지’라는 말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사람의 죽음이 꼭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깨끗할 수는 있지 않은가. 기왕 죽어야만 한다면 연주는 눈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결하길 원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여기서도 바깥에서처럼 굴면 네년은 진정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상궁은 이 말을 끝으로 연주를 깨진 돌바닥에 강제로 꿇어앉혔다. 창졸간에 무릎을 찧은 연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무릎이 깨졌는지 신음이 절로 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런, 평해왕의 적녀께서 이토록 참을성이 없어서야.”

사방을 에워싼 악의 가득한 시선과 비웃음에 정신이 번쩍 든 연주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비아냥에 누구냐고 되물으려던 연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의 처마 아래 놓인 낡은 의자에, 미친 사람처럼 울긋불긋 해괴한 몰골을 한 노인이 연주를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부서진 등받이에 염라대왕처럼 느긋이 기대어 앉은 노인은 주름진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하고, 양 볼과 입술에는 새빨간 연지를 발랐으며, 싸구려 먹으로 새파란 팔자춘산 눈썹을 그린 채였다.

저자는 사내인가 여인인가? 그보다 저자의 정체는 대체…….

“설마 자네가 영항을 통솔하는 영항령인가?”

노인은 연주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걸걸한 목소리로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주변의 궁인들을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해 댈 뿐이었다.

“하하, 재밌는 계집이로구나. 아주 재밌어! 폐하께서는 어쩌다 이런 것을 내게 보내셨누!”

웃을 때 드러나는 불룩한 목울대를 보아하니 아마도 노인은 사내이되 사내가 아닌 태감이리라. 작은 의문을 해소한 연주는 금세 영항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어쩌다 저런 자가 영항령이 되었을까.’

잠시 의아해하던 연주는 아무리 이곳의 통솔권을 쥔 우두머리라 해도 이처럼 대놓고 미친 짓을 하는 작자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저, 저 불손한 눈빛!”

연주의 경계 어린 시선을 알아차린 영항령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짜악-!

“감히 영항령 앞에서 눈을 부라리다니. 죽고 싶으냐?”

영항령의 인상 한 번에 매섭게 연주의 뺨을 내려친 상궁이 사나운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고작 뺨 한 대에 맞은 자리가 부어오르고, 터진 입술에서 새뜻한 진홍색 피가 흘러내렸다. 연주는 본능적으로 뺨을 감싸 쥐고 험악한 표정을 한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어쭈, 이게?”

상궁은 그런 연주를 향해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그만.”

하지만 어느샌가 상궁의 등 뒤로 걸어 나온 영항령이 연주의 앞에 주저앉아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매끄러운 살결을 좀 봐라. 핏방울이 옥구슬 구르듯 떨어지지 않느냐?”

상궁을 향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은 영항령은 이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연주의 턱을 움켜쥐고 제 얼굴을 바짝 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네 목숨을 거두는 대신, 매일 보리쌀 한 섬을 찧는 노역을 명하셨다.”

“…….”

“내일부터 이곳 영항에 있는 자들은 네가 찧은 보리쌀로만 배를 채우라는 명도 덧붙이셨으니, 배고픈 계집들에게 이 고운 얼굴을 물어뜯기고 싶지 않으면 밤낮으로 일하도록 해라.”

역한 입 냄새를 풍기며 말을 마친 영항령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환한 미소 대신 그의 얼굴 주름 사이사이에 낀 싸구려 분가루가 연주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역시 흥미로워.”

영항령은 충격으로 흔들리는 연주의 눈동자를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양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이내 하찮은 것을 버리듯 그녀를 팽개치고 손끝에 묻은 핏방울을 핥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군주 지위는 박탈하셨지만, 평해왕의 적녀인 것만은 여전하니 일할 때도 비단옷이 편하겠지. 오늘 내로 보리쌀 한 섬을 찧으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테니 옷을 갈아입지 말고 바로 일을 시작해라.”

영항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연주는 영항 북쪽에 있는 노역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연주를 기다리고 있는 건 거대한 절구와 절굿공이, 그리고 산처럼 쌓인 곡식더미였다.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지금껏 한 번도 절구질해 본 적 없는 연주는 앞서 일하고 있던 주변의 다른 죄수들을 곁눈질하며 눈치껏 절구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위처럼 무거운 절굿공이는 들어 올리는 데만도 진땀이 빠졌다. 낑낑거리며 절구에 담긴 보리 더미를 찧는 연주를 향해 비웃음 섞인 눈길을 보내던 죄수들은 영항의 상궁이 나타나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너, 이걸 지금 절구질이라고 하는 게냐? 대체 눈이 어디 달렸어! 보리를 찧어야 할 것 아니냐, 보리를!”

곡식을 고루 찧기는커녕, 절구 한쪽에 곡식 언덕을 만들어 놓은 연주를 보며 혀를 차던 상궁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채찍을 들어 휘둘렀다.

휘익- 착! 휘익- 착!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른 채찍은 연주의 등을 매섭게 내리쳤다. 비단을 두른 처지라 흙으로 염색한 얇은 옷 한 벌을 걸친 다른 죄수들보다야 충격이 덜했지만, 맞은 자리에는 빨갛게 상처가 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너 같은 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영항에 갇힌 주제에 아직도 군주 행세를 하려느냐? 이렇게 맥없이 보리를 찧어서 어느 세월에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겠어!”

“…….”

“대답 안 하느냐!”

입술을 깨물고 입 밖으로 나오려는 신음을 집어삼키는 연주를 향해 상궁이 눈을 부라렸다. 연주는 대답 대신 힘겹게 절굿공이를 끌어안고 열심히 보리를 찧었다.

“하이고, 팔모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했느냐?”

상궁은 이제 연주에 관해서라면 모든 게 못마땅한지 절구를 찧을 때마다 위협적으로 채찍을 휘둘러 댔다. 노동요처럼 울려 퍼지던 채찍 소리는 채찍 손잡이가 부러지고 나서야 멈췄다.

“일은 더럽게 못 하면서 고집은 쇠심줄이 따로 없구나. 질긴 것! 입 꾹 다물고 고상하게 굴면 누가 구하러 올 줄 알고?”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연주를 향해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붓던 상궁은 제 팔을 주무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풉. 비단옷에 절구질이라니. 우스워 죽겠네.”

“왜들 이래? 그 대단하신 평해왕의 따님이라잖아.”

“평해왕의 딸이면 뭐 해? 절구질 하나 똑바로 못하는데. 매일 산해진미를 입에 처넣고 살았을 텐데 그 기운은 다 어디다 쓰고…….”

“그러게. 일하는 꼴이 소 되새김질보다 굼뜨네. 소는 일 못하면 잡아먹기라도 하지, 저건 어디다 쓴담? 저래서야 우리 내일 밥을 먹을 수는 있는 거야?”

어쩜 저년 때문에 내일 배를 곯을지도 몰라. 연주를 곁눈질하며 구시렁대던 죄인들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죄를 지어 영항으로 내쳐진 처지는 모두 같지만, 영항 역시 엄연히 황궁의 일부분이라 이 안에서도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서열을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음식을 배급하다 보면 궁 생활이 짧고 나이 어린 죄수들은 자칫 곡식이 모자라 밥을 얻어먹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하, 큰일이네…….”

죄수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주눅 든 연주가 작게 탄식했다. 처음부터 황제는 이 모든 상황을 미리 계산하고 저를 영항으로 보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연주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리를 찧는 것뿐이었다.

쿵, 쿵, 쿵, 쿵.

온종일 찧고 또 찧고. 한자리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니 때마다 울리는 종소리 외에는 시간을 가늠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댕, 댕, 댕.

어느 순간 건물 안에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항의 식사는 하루에 두 번. 연주의 짐작이 맞는다면 지금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잠시만 쉬자…….”

작업장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죄수들을 보며 한숨 돌린 연주가 절구 옆에 주저앉았다. 그때, 연주의 발끝에 낯선 발 두 개가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보니 좀 전에 연주를 영항으로 끌고 왔던 상궁이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섬뜩한 살기가 느껴지는 눈초리에 오싹함을 느낀 연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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