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 시각, 함량궁.
황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래전 제 손으로 내친 아들이지만 완전히 잊지는 못했다는 듯 열화와 같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정엽은 북풍한설에도 능묘를 지키는 석상처럼 꼿꼿하게 서서 함량궁 바닥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저리도…….’
말없이 아들을 노려보던 황제가 탄식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엽은 타계한 선황후와 자신의 장점만 골라 완벽하게 빚어진 산물이었다.
어디 생긴 것만 그러한가. 저 고집스러운 성품마저도 부모와 판박이였다. 그렇기에 황제는 더더욱 정엽의 태도가 달갑지 않았다.
저를 아버지로서 존경하지도, 그렇다고 제왕으로서 경외하지도 않는 담담한 표정과 눈빛.
정엽의 건조한 태도는 때로는 오랜 한지 생활에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해서는 안 될 짓을 모의하는 역적처럼 비치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형 앞에서 본심을 숨기려 애쓰던 젊은 날의 자신처럼.
“짐이 입궁하라고 명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나타나느냐?”
“송구하옵니다.”
황제는 늘 그렇듯 아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변명을 늘어놓길 기대했다. 그러나 정엽은 송구하다는 말 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할 말이 그것뿐이냐?”
침묵은 오랜 세월 황제에게 냉대받아 온 정엽이 스스로 터득한 생존 방법이었다. 지금 황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지, 또 어떤 말을 하든지 모두 내가 감내해야 할 몫임을 잊지 말 것.
“…….”
고얀 놈. 제 전처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납작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뭘 잘했다고.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화기에 자세를 고쳐 앉은 황제가 혀를 찼다.
세인들은 저런 시건방진 태도를 두고 적장자의 품위라 떠받드는 모양이지만, 그 품위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면 제 목을 꺾을 칼로 돌아오는 법이었다.
“됐다. 그보다…….”
이제 시작이구나.
아무리 시선을 피해도 머리통을 꿰뚫듯 집요한 시선에 정엽이 한숨을 집어삼켰다.
“네 전처의 절개가 대단하더구나.”
‘전처’와 ‘절개’가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단어이던가? 자문하던 정엽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본래 고집이 센 여인이옵니다. 이혼을 청할 때도 보시지 않았사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토록 재혼을 꺼리는 걸 보면 아직도 너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소자에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스스로 이혼을 청했을 리가요. 게다가 한때는 부부였어도 남이 된 지 오래인데 이제 와 무슨 미련이 있겠사옵니까?”
“그렇담 너는 어떠하냐?”
“……예?”
“버려진 너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이냐?”
황제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당황한 정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대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없사옵니다.”
“흐음, 그래?”
생각보다 단호한 대답에 황제가 고심하듯 수염을 쓸어내렸다. 반신반의하는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아들을 향한 경계가 남아 있었다.
‘귀비의 말과 달리 정말로 평해왕부와의 인연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하기야…….’
평해왕부와 정엽의 혼사는 순전히 선황후의 고집으로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황후도 죽고 없고, 교씨 가문은 예전과 달리 용상을 위협할 만한 엄청난 권세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평해왕으로서도 정엽을 놓친다고 해서 아쉬운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면 묻겠다. 네 전처가 한수에서 유산했다던 아이는 아들이었느냐, 딸이었느냐?”
황제는 연주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정엽에게 던졌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이 있다면 교씨 일가와 평해왕부 두 집안이 서로 짜고 제왕을 기만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적장자를 경계하는 곽 귀비의 농간으로 결론 지어지리라.
“아이는…….”
이것이 황제의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을 직감한 정엽이 고개를 들었다.
“아들이었사옵니다.”
“아들?”
“예.”
정엽의 대답은 단호했다. 하지만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고 해서 속내까지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연랑. 연랑은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면 좋겠어요, 딸이면 좋겠어요?’
‘아들이건 딸이건 바란다고 되는 일인가? 생각해 본 적 없어.’
‘으음, 그래도 저는 아들이면 좋겠어요. 아들이라면 분명 연랑을 닮아 용감하고 다정할 테니까.’
정엽은 수줍게 웃으며 부른 배를 쓰다듬던 연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정엽은 아이가 저를 닮아 좋을 게 뭐 있겠느냐 반문하고 싶었지만, 연주의 얼굴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2년이나 지난 일인데. 왜 아직도 잊히지 않는가?’
정엽은 옛일을 돌아보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늘 앞만 보며 살아왔는데 지금은 꼭 추억 속에 갇혀 사는 미련한 작자가 된 것 같았다.
‘게다가 기억에 딸려 나온 이 불편한 감정은 또 무엇이고?’
아들이건 딸이건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 심지어 제 손으로 묻어 버린 아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를 죽인 죄책감?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한 정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서로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데 네 전처는 어찌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이냐?”
어딘지 평소답지 않은 정엽의 태도를 살피던 황제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느른하게 말했다.
“그 아이, 소자를 닮은 아이였사옵니다. 지독하게 미워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라니 떠올리기도 싫고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겠지요.”
“너희가 그토록 서로를 미워하는 줄은 몰랐구나.”
예상외로 신랄한 답변에 황제가 만족한 듯 낮게 웃었다. 서로에게 이토록 악감정을 갖고 있다면 제 딸을 천하의 보옥으로 여기는 평해왕이 정엽과 한배를 탈 리 만무했다.
“짐이 괜한 소리를 했구나.”
“아니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인 정엽이 눈을 감았다.
어째선지 자꾸 죽은 아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주의 바람대로 저를 닮았던 아이. 그대로 장성했다면 연주의 말대로 용감하고 다정했을지도 모르는 아이.
그래서 그 아이를 그토록 기다렸던 걸까. 늘 곁에 없는 남편 대신 남편을 닮은 아이라도 곁에 두고 싶어서.
‘미련하긴.’
그리 미련하니 척박한 땅에서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난 거겠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뭐든 닥치는 대로 주고 나니 허망해서.
아이를 잃은 뒤 폐인이 되어 버렸던 연주를 뒤늦게 조금 헤아리게 된 정엽이 이를 악물었다.
아이는 죽고 없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네 전처 때문에 황실의 체면이 말도 아니다. 짐이 그 여죄를 물어 너의 친왕 책봉을 취소시키면 어찌하겠느냐?”
“부황께 이미 받은 것이 많은데 무엇을 더 바라겠사옵니까. 부황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네 분수를 아니 다행이다.”
드디어 아들을 향한 의심을 거둔 황제가 후련한 낯빛으로 아들을 굽어보았다. 대답은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행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앞으로 한수성에는 별도로 장수를 파견해 관리하도록 시킬 것이니 그리 알아라.”
“예.”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구나. 한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들었는데 아쉬움은 없느냐?”
“한수성은 백융의 잔당과 국경을 맞댄 대화국의 최전선이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왕보다 그 땅을 지킬 장수 한 사람이 더 중요한 곳이지요.”
멀리 떨어져 있는 왕보다 장수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정엽의 말에 뼈가 있다고 느낀 황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 이 말은 수도 조양에서 명령이나 내리는 황제보다, 백성들에게 불사왕이라 칭송받는 자신의 가치가 더 높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천하를 발아래 둔 황제가 이만한 일로 전공을 세운 장수를 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황제는 곁에 선 태감을 향해 눈짓했다. 은쟁반을 든 태감은 정엽의 앞에 친왕을 상징하는 옥대를 내밀었다.
“좋다. 하면 돌아가 친왕 책봉 준비에 전념하도록 해라.”
“예.”
마치 싫은 일을 떠넘기는 것처럼 책봉 당일에 손수 둘러 주어야 할 옥대를 덜렁 전한 황제가 먼저 자리를 떴다.
황제가 떠난 후에도 덩그러니 남아 휘황찬란한 옥대를 바라보던 정엽이 잠시 후 빠른 걸음으로 합문을 나섰다.
“전하.”
함량궁에서 벗어난 뒤에야 겨우 정엽에게 말을 붙인 양해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전하, 왕비마마께서는 앞으로 어찌 되시는 것이옵니까?”
“한동안 고초를 겪겠지.”
“소인이 몰래 사정을 좀 알아볼까요? 영항은 고초가 심한 곳이옵니다. 그런 곳에선 하다못해 음식이라도 잘 드셔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예? 아무리 그래도…….”
줄곧 연주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양해와 달리 정엽의 태도는 냉랭했다. 이번 한 번은 어찌 넘어갔지만 언제 또다시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교씨 일가와 평해왕부를 덮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폐하께서 군주를 돕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하겠다고 하셨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해만 될 게다.”
“하지만 전하, 다른 곳도 아니고 영항이란 말입니다. 영항!”
“누가 돕지 않아도 그곳을 빠져나올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라.”
“아휴……. 예, 전하.”
연이은 핀잔에도 양해는 자꾸만 영항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엽이 이마를 짚었다. 옆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 대니 없던 걱정마저 솟아날 것만 같았다.
“한숨 좀 그만 쉬어라.”
우선은 모두가 살아야 한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훗날도 도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 *
다음 날, 영항.
날이 밝자 영영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창고의 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새우잠에 들었던 연주가 창고 안으로 들이닥친 따가운 햇볕과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밤새 아주 잘 잔 모양이군.”
잠시 후 눈부심이 가라앉자 살기등등한 눈초리로 저를 노려보는 중년 여자와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연주의 시야에 들어왔다. 차림새로 보아 영항의 상궁과 궁녀들인 듯했다.
그렇다고 한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까지 적대감을 뿜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따갑다 못해 살벌하게 느껴지는 눈빛에 당황하기도 잠시, 매서운 목소리가 연주를 덮쳤다.
“끌어내라.”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