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8화 (18/161)

18화.

연주는 그런 곽 귀비를 지켜보며 늪 속에 몸을 숨긴 악어를 떠올렸다.

‘정엽을 일부러 연친왕이라고 지칭하며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지금이라도 친왕 책봉을 망치려는 수작인 게지.’

곽 귀비는 예전부터 정엽에 관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일단 훼방부터 놓는 것이 일이었다. 이번이라고 그 간교한 속내를 모를까.

‘과연 청루에 몸담았던 여자답구나.’

황제를 향해 읍소하는 짧은 순간에도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곽 귀비를 보며, 연주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곽 귀비를 오래 곁에 두고 보아 온 황제 역시 이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위인은 아니었다.

“어허, 어찌 용상을 눈물로 더럽히는고?”

처음에는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하던 황제가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 질렸는지 소매를 떨치며 곽 귀비를 향해 손짓했다.

“그게 어디 너의 잘못이냐? 그만하고 짐의 곁으로 돌아와 앉아라!”

훌쩍이면서도 곁눈질로 계속 상황을 살피던 곽 귀비가 냉큼 황제의 곁으로 가 앉았다. 하지만 황제는 곽 귀비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화장이 다 지워졌구나. 가서 화장이나 고치고 오너라.”

“예? 예, 폐하…….”

내가 너무 오래 울었나?

황제의 심기를 살피던 곽 귀비가 백옥 병풍 뒤로 사라졌다. 연주는 이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며 잠시 긴장의 끈을 놓았다.

그러나 황제의 진짜 수는 이제부터였다.

“좋다. 내 너의 결백을 믿어 주마.”

“황송하옵니다, 폐하.”

“그러나 반음양에 관한 낭설이 이미 궁중에 파다하여 네가 실추시킨 황실의 명예는 되돌릴 수 없을 지경이다. 하니 네가 이제라도 재혼을 하는 것이 어떠하냐?”

“……예?”

“너와 황실과 인연이 끊어진 지도 오래되었는데 네가 젊음을 썩히고 있으니 이런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냐. 짐이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따르도록 해라.”

인륜지대사인 혼인을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좌지우지하시려는가? 게다가 일부종사도 아닌 이부종사를 강요하시다니?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연주는 극도로 이기적인 황제의 태도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고작 예언 하나 때문에 적장자를 사지로 내모는 것으로는 부족했던가? 아니, 처음부터 황제가 그의 아들을 냉대하지만 않았더라도 내 인생이 이토록 기구해질 리 없었다.

‘하나같이 저의 업보인 것을!’

피도 눈물도 없는 제왕에게 대단한 애정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비가 아들의 죽음을 열망하며 천륜을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그 아들이 커서 제 자식을 언 땅에 파묻어 버리는 일은 없지 않았겠는가?

‘그래. 제아무리 부모를 해할 용손이라고 해도,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반음양이라고 해도 자식인 것을.’

정엽이 멀쩡한 아비 밑에서 자랐더라면 제 자식이 어떻게 태어났든 그토록 냉정하게 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정엽을 가혹하게 몰아세우지 않았더라면. 정엽이 자식을 버려야 할 만큼 절박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복마전 같은 황실이라 해도 나는 언젠가 다른 여인들처럼 평범한 부부의 삶을 살 수 있었으리라.

‘더는 황제에게 인생을 휘둘릴 수 없어!’

저항을 결심한 연주가 이를 악물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소녀는 그 명을 받들 수 없사옵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고달프게 만든 원흉은 결국 저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였다.

물론 처음부터 황실과 엮인 것이 뼈아픈 실책이겠으나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얻을 것이 없었다. 또 연주는 그녀가 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했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

다만 지금 바라는 것은 더는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 그리고 더는 가슴 아파할 일 없는 평온한 미래.

“이렇게 갑자기 소녀가 재혼한다면 낭설이 사실이라고 시인하는 꼴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렇담 황실에 더욱 누가 될 것인데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너의 행동거지가 불손하여 생긴 일이니 네가 안고 가면 그만이다. 더는 황실을 들먹이며 짐을 우롱하지 말라.”

“하오나 폐하, 소녀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참으로 궁금하옵니다.”

“무엇이 말이냐?”

“소녀가 반음양을 낳았다는 소문이 진실이어도 좋다면, 용손인 아들에게 상극인 여인과의 혼인을 명하여 이 사달을 내신 폐하의 저의는 무엇이옵니까?”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소녀에게 연왕 전하와의 혼인을 명하신 분은 다름 아닌 폐하이시옵니다. 한데 만일 소문이 진실로 굳어진다면 소녀에게 천벌을 내린 주체는 하늘이 아니라 폐하가 아니시옵니까?”

연주가 황제의 정곡을 찌르자, 분노한 황제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적장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이미 만백성이 아는 사실이었으나, 오늘처럼 거리낌 없이 직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소녀에게 재혼을 종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그 결정에 숨겨진 어심은 또 무엇이옵니까? 용손인 아들을 향한 두려움입니까, 아니면 평해왕부를 향한 경계심입니까!”

“이혼을 청할 때도 네 아비의 권세를 믿고 불경하기 짝이 없더니 이제는 짐을 아주 우습게 아는구나!”

삿대질까지 해 가며 연주를 비난한 황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협탁 위 과일 접시를 내동댕이쳤다. 산처럼 쌓였던 과일이 무너지고, 진귀한 옥기가 와장창 박살 났다.

“네가 어려서부터 군주 대접을 받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네가 누리는 권세는 네 아비가 아니라 짐이 준 것이다. 짐의 허락도 없이 네 일가가 오늘과 같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 성싶으냐?”

오냐, 그래. 권력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어디 한번 뼛속 깊이 새겨 봐라!

“짐의 자비는 여기까지다. 여봐라! 저 계집을 당장 영항으로 내쳐라! 앞으로 누구라도 저 계집을 군주로 대하고 받들면 신분의 존귀와 상관없이 엄벌에 처하겠다!”

“예!”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전 밖에 도열해 있던 태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와 연주를 에워쌌다.

영항은 궁중에서 죄를 지은 여인들을 가두는 감옥. 영항에 갇힌 죄인은 황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 죽는 날까지 고된 노동과 매질에 시달려야 했다.

“가시지요.”

태감의 말씨는 공손했으나 황제의 명을 수행하는 동작은 무척 거칠었다. 눈 깜짝할 새에 양손을 뒤로 붙잡힌 연주가 황제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제 발로 가겠습니다.”

“…….”

“놓거라!”

연주는 보란 듯이 태감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이 지경이 되어서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연주를 괘씸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마당. 연주로서는 이제 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비굴해질 필요가 없었다. 군주의 작위를 박탈당한들 그녀가 평해왕의 하나뿐인 적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는 허리를 곧게 펴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함량궁을 나섰다. 그러나 물 흐르듯 부드럽던 걸음은 이내 와류에 휩쓸린 잎새처럼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비가 쏟아지는 합문 앞에 정엽이 서 있었던 것이다.

“…….”

“…….”

한여름처럼 빗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먼저 눈을 피한 쪽은 연주였다.

정엽은 빗속으로 사라지는 연주의 뒷모습을 당혹스러운 눈길로 좇았다.

“왔으면 들어와라!”

그러나 황제의 불호령 앞에 정엽의 근심은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 * *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끌려간 연주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창고에 던져졌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지 묵직한 금속이 덜그럭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은 채 창고에 갇힌 연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오라비가 둘러 주었던 외투를 여미고 아무렇게나 쌓인 곡식더미에 기대어 앉았다.

‘처음부터 황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우리 일가와 얽어맬 생각이었을 거야. 어차피 황제는 아직 부왕을 버릴 수 없으니 나 혼자 모든 걸 떠안으면 돼.’

난생처음으로 벌인 항명이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마음속에 짐처럼 쌓아 두었던 얘기를 쏟아 낸 덕인지 한편으로는 후련한 기분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래. 여기서 나가 봤자 원치 않는 혼인이나 하게 될 테니까.”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고. 자신에게 주입시키듯 혼잣말하던 연주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상황을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악은 아니었다.

정엽과 부부 생활을 끝내면 자연스럽게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이혼의 후폭풍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오로지 정엽만을 바라보며 산 3년이라는 시간은 인생의 항로를 지워 버리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곯아 가는 상처를 끌어안고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된 연주는 전처럼 웃을 수 없게 됐다. 목적도 희망도 없는 나날들은 마치 산 채로 박제된 동물이 된 것처럼 마음에 고통만 안길 뿐이었다.

“이제 공주의 교육은 어찌 되려나…….”

이 상황에도 공주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 우습지만 황후의 명으로 공주의 교육이라도 맡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그렇다고 해도 엉망진창인 삶일망정 살아 보려 발버둥 친 결과가 이렇게 영항에 갇히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돌고 돌아 마지막까지 이 지긋지긋한 황실에 얽매인 꼴이라니.”

그렇다면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로 황제가 원하는 대로 굴복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굳히고 나자 연주의 마음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해졌다. 연주에게는, 아니 평해왕의 자녀에게는 아직 이 위기를 빠져나갈 방도가 남아 있었지만, 연주는 비굴하게 샛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친 황제가 애지중지하는 권능을 조금이나마 모욕할 수 있다면 영광이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 될 거야.

연주의 결단은 빠르고 단호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는 그녀에게도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어깨에 근심 어린 표정으로 외투를 둘러 주던 오라비, 채신이었다.

‘오라버니,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허공을 응시하던 연주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맴돌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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