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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17화 (17/161)

17화.

깜깜한 빗길을 한참 달린 마차는 황궁의 서북쪽 담장에 멈춰 섰다.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자미성 서북쪽 담장 끄트머리에는 죄인이나 죽은 궁인의 시신, 오물 등을 황궁 밖으로 내보내는 작은 문이 나 있었다.

‘하필 시구문으로 불러들이는 걸 보니…….’

황제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구나.

연주는 어둠에 싸여 더욱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구문을 올려다보며 손끝을 모아 쥐었다. 어전 태감은 연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진중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불결한 것들은 눈에도, 마음에도 담지 마십시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것인가. 머리를 비우듯 고개를 흔들면서도 연주의 얼굴에는 점점 그늘이 짙어졌다.

이윽고 태감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태액지 북쪽에 있는 함량궁(含凉宮).

함량궁은 ‘서늘함을 품은 궁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황실 일가가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 바람이 서늘해지는 가을부터는 오가는 이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소인이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함량궁에 오르는 돌계단 앞까지 연주를 안내한 태감이 허리를 숙였다. 으리으리한 함량궁의 전경을 바라보던 연주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곧 굳게 닫혀 있던 합문이 열리고, 높다란 상석에 정좌한 황제와 곽 귀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와 귀비마마를 뵙습니다.”

상석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연주가 황제의 하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황제는 평신을 명하는 대신, 연주의 머리꼭지를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그러곤 죄인을 취조하는 판관처럼 엄준히 물었다.

“짐이 너를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뜻인가. 기민하게 머리를 굴린 연주가 고개를 수그린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모르옵니다.”

“모른다?”

되묻는 황제의 말끝에 노여움이 묻어났다.

“하면 묻겠다. 2년 전에 유산했다던 아이는 아들이었느냐. 딸이었느냐?”

반음양은 사내도 계집도 아니라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

한수에서 반음양을 낳았다면 절대로 대답하지 못할 날카로운 질문에 연주는 잠시 숨을 멈췄다. 황후의 예상대로 황제는 자신을 통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다 지난 일을 어찌 물으시옵니까.”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하거라! 아들이었느냐, 딸이었느냐?”

연주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촉하는 황제의 옥음이 높아졌다. 곁에서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곽 귀비가 황제의 팔을 잡아끌며 만류했다.

“폐하, 너무 다그치지 마옵소서. 군주도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불려 와 놀라 그런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

“승설군주, 온 궁에 군주가 반음양을 낳았단 얘기가 파다합니다. 당장 폐하께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빌도록 하세요. 어서요.”

용서를 빈다? 어째서?

먼저 떠난 아이는 지금도 연주에게 가장 귀한 존재였다. 반음양이면 어떻고 사내아이면 어떤가. 사내아이가 아니라 계집아이면 또 어떤가.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애석한 일이지만, 사람은 단지 외양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남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체머리를 떠는 모습일지라도 어미인 내게는 상상 이상으로 어여쁘기만 하지 않던가.

아가야. 동그랗게 울리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지 않던가.

시간을 돌려 지독한 고통으로 얼룩진 해산날 밤으로 되돌아가라고 해도, 제발 그렇게 하게 해 달라며 사정하고 싶을 만큼 내게는 매 순간 그립고 사랑스러운 아이이지 않던가.

연주는 당장 나와 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호시탐탐 평해왕부를 무너뜨릴 기회만 노리는 황제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대체 누가 그런 해괴한 낭설을 퍼뜨렸는지는 모를 일이나, 궁중에 떠도는 소문은 결코 사실이 아니옵니다.”

“사실이 아니다?”

“예.”

결연함까지 느껴지는 연주의 태도에 황제는 잠시 고심했다.

평해왕의 딸 승설군주가 어떤 여자인가.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연주는 황제의 미움을 산 황자와 혼인했다 하여 저를 경원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주눅 든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조롱과 멸시에도 표정이 고요하고, 남편인 연왕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해 여론을 무마시킬 줄 알 만큼 지혜로웠다.

그러면서도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아 황실 일가가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관철시킬 만큼 배짱도 있었다.

‘이대로는 저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없다.’

황제는 이쯤에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하면 네가 유산한 뒤 연왕이 한수 저택에 있던 궁인들을 모두 내보낸 이유가 무엇이냐?”

“황손을 잉태한 저와 황손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죄를 물은 것뿐이옵니다.”

“연왕이 너를 그리 아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하구나.”

“무엇이 말이옵니까?”

“연왕이 네게 그토록 정이 깊었다면 네가 이혼을 청했을 때 가만히 있었을 리 없지 않으냐?”

걸려들었구나!

황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궁지에 몰린 연주를 굽어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황제와 시선을 맞춘 연주는 실없이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어찌 웃는 것이냐?”

“…….”

“아무래도 짐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로군. 실은 네가 반음양을 낳아 연왕과 사이가 틀어진 것이지?”

“…….”

“어찌하여 말이 없느냐? 너는 반음양을 낳아 친정인 해광성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네 오라비와 함께 수도에 발이 묶인 게다. 그렇지 않으냐? 응?”

눈이 벌게진 황제는 발까지 굴러 가며 자신의 추측에 확답을 얻고자 애썼다. 연주는 그런 황제의 집착이 무척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연왕 소정엽은 이미 오래전에 인연이 다한 사이. 그런데도 황제는 이상하리만치 과거의 일, 그것도 그녀와 연왕의 관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연주는 이내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정신은 자꾸만 아이가 죽던 날 밤으로 돌아가 버린 듯했다.

이 와중에도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은 정엽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곽 귀비의 계책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뿐.

“오해이시옵니다, 페하. 부왕께서는 소녀에게 언제든 해광성으로 돌아오라 재촉하고 계신 지 오래이옵니다.”

“군주! 이 이상 황제 폐하를 기만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연주가 순순히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자 조바심이 난 곽 귀비가 나섰다. 하지만 이미 연주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없으리란 것을 예감한 황제는 곽 귀비의 말을 끊고 연주를 바라보았다.

“계속해라.”

“부왕께선 궁중에 퍼진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지도 않으실뿐더러, 설령 소녀가 반음양을 낳았다고 한들 언제든 다시 품어 주실 분이옵니다.”

“쯧, 예나 지금이나 너는 참으로 고집이 세구나. 한수에서 너를 보필했던 아실이라는 상궁이 이미 옛일을 모두 실토하였다. 그러니 이제라도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네 죄는 면해 주마.”

증인이 있다면 죄인을 벌하기를 망설일 이유가 무엇인가?

연주는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내려는 황제의 태도에서 황후가 성국부에서 약속한 대로 어떠한 조치를 마쳤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더는 몸을 사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소녀가 반음양을 낳았다고 실토한 자가 있고 폐하께서도 그렇게 믿으신다면, 어찌하여 소녀를 이곳으로 불러 재차 물으시는 것이옵니까?”

“국운과 황실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

국운과 황실의 명예라. 듣기에는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연주는 이제 황제의 목표가 반음양을 낳은 사실을 추궁하는 데 있지 않음을 확신했다.

예상대로 황제는 그녀와 얽힌 소문을 이용해 부친 평해왕의 위세를 꺾어 놓을 궁리뿐이었던 것이다.

“소녀는 몇 번이고 소문이 거짓이라 말씀 올렸사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소녀가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어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겠사옵니다.”

“뭣이라?”

“소녀는 죽음으로 결백을 입증하겠사오니, 폐하께옵선 낭설을 퍼뜨려 황실을 기만하고 평해왕부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역죄인을 찾아 부디 엄벌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황제에게 지지 않고 맞선 연주가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대고 조아렸다.

그렇게 일각쯤 버티었을까. 불안한 눈빛으로 황제와 연주를 번갈아 보던 곽 귀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평해왕부가 아니라 연왕인 것을!’

곽 귀비는 은근슬쩍 황제의 팔을 잡아끌며 부드럽게 말했다.

“군주가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반음양을 낳았다는 소문은 정말로 거짓인 모양이옵니다. 폐하, 연친왕의 책봉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쯤 하시지요.”

“귀비, 지금 네 말이 심히 우습구나. 연친왕?”

“책봉례는 형식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폐하의 뜻이지 않사옵니까. 신첩, 혹여 연친왕이 이번 일로 폐하께 원한을 품게 될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형식적인 절차라 해도 책봉례조차 올리지 못한 녀석을 어찌 친왕이라 부를 수 있겠느냐? 게다가 이만한 일로 원한이라니.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이라더냐?”

탕-!

진노한 황제가 협탁을 내리치며 버럭 소리쳤다. 곽 귀비는 겁에 질린 생쥐처럼 냉큼 상석에서 내려가 황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폐하, 신첩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저 폐하께서 부자지간의 정을 돌아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그만……! 신첩이 실언했사옵니다.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긴소매를 들어 가련한 표정으로 눈물을 찍어 내던 곽 귀비가 끝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매수했던 사천감 관원이 갑자기 말을 바꾸며 고향으로 내려가 버린 지금, 그녀에게 남은 무기는 오직 황제의 마음을 흔들 눈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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