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6화 (16/161)

16화.

그 시각, 정엽의 처소인 경수당 앞뜰에는 먼 길을 건너온 집기들이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왕부 사병의 훈련을 감독하고 돌아온 정엽은 부산스레 물건을 옮기는 궁인들을 발견하곤 처소 앞에 멈춰 섰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아, 전하! 한수성에서 보내온 물건들을 정리 중이었사옵니다.”

“한수성?”

“전하께서 책봉례를 치르시면 쭉 수도에서 지내게 되실 거라는 소식을 듣고 한수성에서 전하께서 사용하시던 물건을 모두 보내왔사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왕부에 한수성에서 쓰던 물건만 한 게 없을까.

정엽이 어이없어하는 눈빛을 보내자 오가는 궁인들을 감독하던 양해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게 다 한수성 사람들이 그만큼 전하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사옵니까.”

“그보다 이것들을 다시 쓸 일이 있겠느냐.”

“모두 전하께서 쓰시던 것들이니 잘만 추리면 쓸 만한 것이 있을 것이옵니다.”

과연 그럴까?

미심쩍은 얼굴로 경수당 앞에 쌓인 물건을 훑어보던 정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물건을 챙겨 수도까지 안전하게 이송한 것만 해도 엄청난 정성이기는 했다.

“네가 직접 쓸 만한 것들을 추려 경수당에 들여놓고 나머지는 전부 창고에 보관하도록 해라.”

“예, 전하. 한데 다른 건 몰라도 상자 하나는 전하께서 직접 결정해 주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상자라니?”

“한수성에서 온 물건 중에 범상치 않은 상자가 하나 있었사온데, 열어 보니 서신만 잔뜩 들어 있었사옵니다. 한데 대다수가 겉봉조차 뜯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서신?”

제가 무심하기는 해도 남이 보낸 서신을 뜯어보지도 않고 방치할 만큼 주변에 무관심하진 않았다.

정엽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자 경수당 안으로 들어간 양해가 자단나무로 만든 붉은 함을 꺼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것이옵니다.”

상자의 정체를 확인한 정엽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문제의 상자는 혼인이 정해진 때부터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 전날까지, 연주가 해광성에서 매일 그에게 보내온 편지를 모아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

“혹 쓸데없는 서신들을 모아 두신 것인지요? 그렇다면 이 상자는 버리겠사옵니다.”

귀한 자단나무 함에 모아 두었기에 비록 뜯어보시지 않았어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줄 알았는데. 잘못 짚었나?

정엽의 눈치를 살피던 양해가 그의 미지근한 반응에 내보였던 자단나무 함을 슬그머니 제 쪽으로 당겼다.

“그건 군주가 보낸 서신을 모아 둔 것이다.”

“아, 그런 귀한 것을! 하면 이 상자는 어찌 처리할까요?”

“글쎄…….”

이미 끝난 인연이라 더는 의미가 없으니 버려야 하나, 아니면 창고에라도 보관해 두는 것이 옳은가. 그것도 아니면 다시는 열어 보는 일이 없더라도 일단 처소 어딘가에 놓아두기는 해야 하는가.

“버, 버릴까요?”

정엽의 고심이 길어지자 안절부절못하던 양해가 넌지시 운을 뗐다. 왕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창고에 방치했다간 누군가 멋모르고 뜯어볼지도 모를 일이지.

“일단 경수당 안에 들여놔라.”

“예, 전하.”

휴우, 살았다.

정엽이 결정을 내리자 상자를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은 양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잠시.

“어? 황궁에 보냈던 태감이 돌아왔나 보옵니다.”

때마침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렴자를 알아본 양해가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하지만 열흘 뒤에 있을 예식의 시간과 절차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황궁에 다녀온 소렴자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아, 양 태감님.”

“경사가 코앞인데 안색이 왜 이리 어두워! 그보다도 맡긴 일은 잘 처리하고 왔느냐?”

“아, 그건 그런데…….”

“그럼 됐다. 전하께서 기다리시니 어서 고하기나 해!”

똑 부러지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소렴자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양해가 그를 정엽 앞으로 끌고 왔다.

“연왕 전하를 뵙습니다.”

정엽을 마주한 소렴자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큰 눈을 껌뻑이며 입술을 잘근댔다.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전하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옵고 아무래도 왕비마마, 아니 승설군주께 일이 생긴 듯하옵니다…….”

내가 아니라 연주에게?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에 정엽의 눈빛이 사늘하게 변했다.

“보고 들은 것들을 소상히 말해라.”

“저, 그것이…….”

“어서.”

정엽의 고압적인 목소리에 어깨를 한껏 움츠린 태감이 머뭇머뭇 궁중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궁중에 해괴한 소문이 도는데, 그게 군주마마께서 하늘의 벌을 받아 반음양을 낳으셨다고…….”

“뭐?”

“하필 사천감 관원이 본래 두 분께서 상극이었다며 말을 보태는 바람에 다들 그 소문을 철석같이 믿는 분위기였사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도 두 분의 이혼을 너무 쉽게 허락하셨으니…….”

“이혼이라.”

소렴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정엽의 귀에 ‘이혼’이라는 단어가 꽂혔다. 설마 황제는 처음부터 다 알고 이혼을 허락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부황은 아들을 사랑하진 않아도 황실의 체면은 중시하는 분이지 않은가.

만약 그때 반음양이 태어난 걸 알았다면 우리를 황성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북녘에서 소리 소문 없이 연주를 죽이고, 산파와 궁인들을 몰살시켜 영원히 비밀에 부치셨겠지.

그렇다면 과거를 헤집고 분란을 키우는 자들은 아마도…….

“어디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는 알아냈느냐?”

점차 살벌해지는 정엽의 기세에 눌린 태감이 고개를 더욱 숙이며 답했다.

“잘은 알 수 없사오나 연훈궁 궁녀가 폐하의 앞에서 이 이야기를 옮기다 혀가 잘렸다고 하옵니다.”

“연훈궁이라면?”

“예, 서빈마마의 처소입지요.”

서빈은 6황자의 어머니로, 곽 귀비와 왕래가 잦은 덕에 근근이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예? 그런 거라뇨?”

양해의 물음에도 정엽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정엽의 태도에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정엽의 얼굴이 어떤가 하면, 오히려 깨달음을 얻은 느낌에 가까웠다.

‘그간 곽 귀비가 연주에게 또 수작을 걸었었나 보군.’

과거 곽 귀비에게 심하게 덴 적 있는 연주는 그래서 더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을 테고. 곽 귀비의 농간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전하, 어쨌든 경사를 앞두고 궁중에 이런 해괴한 이야기가 도는 건 곤란하지 않겠사옵니까.”

“…….”

“군주께서도 상심이 크신지 오늘은 입궁하지 않으셨다고 하옵니다. 군주마마를 찾아가 이야기라도 나눠 보심이 어떠시옵니까?”

“이미 남남이 된 사인데 무슨 얘길 하겠느냐. 또, 소문이 사실이라면 군주와 마주칠 때마다 내게 해악이 미친다는 뜻인데 나더러 단명이라도 하란 소리냐?”

“예? 아니,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

정엽의 말에 당황한 소렴자가 허둥지둥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정엽의 모습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정녕 누군가의 생시(生時) 따위가 하늘의 벌이 되어 그런 괴이한 것을 낳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기왕에 벌을 내릴 거라면 좀 더 그럴싸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목숨 하나 거둬 가는 게 사람처럼 간사한 동물에게 무슨 벌이 된다고?

아주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주는 과연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늘 자신만만한 정엽조차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장담할 수 없었다.

* * *

성국부에서 황후와 독대하고 돌아온 연주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런 연주의 곁을 지킨 것은 남편이었던 정엽도, 오라비 신도 아닌 차가운 빗줄기였다.

어스름부터 겨울비는 곧 시작될 혹한을 알리듯 요란하게 내렸다. 연주는 처마 끝에서 쉼 없이 부서지는 빗방울과, 그 밑에 어둠처럼 깊어지는 웅덩이를 들여다보며 기도하듯 자문했다.

‘저 비를 뚫고 달려와 나를 안아 줄 사람은 없을까.’

하지만 수백 번 읊조린 바람은 허망하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깊은 밤 세자부의 문을 두드린 건 연주를 위로해 줄 누군가가 아니라 황제의 사자였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군주를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나를요.”

“예, 지금 당장…….”

생기 없는 얼굴로 대꾸하던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고갯짓에 마주 선 어전 태감의 가슴에 수놓인 단룡 자수가 흔들렸다.

“마차는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소인을 따르시지요.”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

연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심호흡을 한 뒤 태감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별당을 벗어나 회랑 위에 올라선 순간,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연주야.”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나왔는지 오라비 신은 침의 위에 고작 외투 하나를 걸친 차림이었다.

“비바람이 찬데 어찌 외투도 없이 나서느냐.”

남들 앞에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로 나서는 걸 가장 싫어하면서도, 밤중에 황궁으로 불려 가는 누이가 걱정되었던지 신은 제 외투를 끌러 연주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제야 자신이 외투를 챙길 정신도 없이 길을 나섰다는 사실을 깨달은 연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날이 춥다. 조심해서…….”

“잘 다녀올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하지만 누이가 웃는다고 다 괜찮은 것이라 착각할 만큼 신은 감정에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연주에게 둘러 준 외투의 매듭을 손수 고쳐 매어 준 신이 마차에 오르는 연주를 배웅하며 궁으로 돌아가려는 태감을 불러 세웠다.

“먼 길은 아니지만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어쩌면 오라버니도 알고 있는 걸까.

마차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연주는 오라비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윽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연주는 작은 차창을 통해 여전히 세자부 대문 앞에 서 있는 오라비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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