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화수월-15화 (15/161)

15화.

정엽과 연주를 둘러싼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하지만 본래 소문은 당사자에게 가장 늦게 도착하는 법이라. 입궁을 위해 세자부를 나서던 연주가 덕교궁 상궁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 상궁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황후마마께서 군주마마를 찾으시옵니다. 오르시지요.”

허 상궁은 자세한 설명도 없이 연주에게 낯선 마차에 오르라고 종용했다.

“그러지. 한데 무슨 일로…….”

“가 보시면 아옵니다.”

허 상궁의 단호한 태도에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연주는 순순히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창문이 없는 넓은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사방이 꽉 막힌 마차 내벽을 어루만지며 고민을 거듭하던 연주는 바로 열흘 뒤가 정엽이 친왕 책봉례를 치르는 길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혹시 황후마마께서 연왕 전하의 친왕 책봉을 앞두고 잠시 궁 밖으로 나오셨는가?”

“곧 알게 되실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럴싸한 짐작에도 허 상궁은 말을 아낄 뿐, 끝내 어떠한 것도 확인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가 멈추고, 허 상궁이 먼저 내려 연주를 부축했다.

도착한 곳은 높은 담벼락이 좌우로 끝없이 뻗어 있는 어느 대저택의 후문. 연주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곳이 잠시나마 그녀가 몸담았던 연왕부는 아니란 것뿐이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영문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것도 모자라 후문 출입이라니. 연주가 자못 당황한 기색을 비치자 허 상궁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황후마마의 뜻이라면 따라야지.”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 허 상궁이 후문의 문고리를 움켜쥐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신호를 알아들은 누군가가 곧장 빗장을 거두고 허리를 숙였다.

“드시지요.”

연주를 열린 문 안으로 먼저 들여보낸 허 상궁이 마중 나온 하인에게 눈짓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하인은 연주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뒤 한 발 앞서 그들을 인도했다.

조금 걷다 보니 숲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호수와, 그 가운데에 솟은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저택 안에 호수가 다 있다니…….”

“아, 호수가 아니라 연못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연못 위 수상 전각에 계시지요.”

하인은 거대한 연못 한쪽에 놓인 다리 입구까지 두 사람을 안내하고 물러났다. 잠시 망설이던 연주는 허 상궁과 함께 연못 위 다리에 올랐다.

갈지(之)자로 구불구불 꺾인 흰 대리석 다리는 바닥과 난간에 여러 길상무늬를 조각해 놓아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아름다웠다.

다리가 좌우로 꺾일 때마다 연못을 에워싼 왼편의 푸른 소나무 숲과 오른편의 흰 자작나무 숲 전경이 교차하며, 매 순간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름다운 곳이구나.”

색다른 정취에 푹 빠진 연주가 미소 지었다.

“이 다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못 위 전각만은 못하지요.”

허 상궁의 말에 어느새 다다른 수상 전각을 올려다본 연주가 감탄했다.

산뜻하게 날아오르는 추녀가 인상적인 지붕 아래 우아한 미인이 앉아 있으니, 그야말로 천상의 풍경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황후마마, 군주께서 도착하셨사옵니다.”

허 상궁이 아뢰자 전각 한가운데 놓인 상석에 고요히 앉아 있던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편히 앉거라.”

황후의 화답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연주는 황후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 오는 동안 많이 놀라지는 않았느냐.”

“예. 한데 여기는 대체 어디인지…….”

“성국부 후원이란다.”

성국부라면 황후의 사가이자 정엽의 외가였다.

갑자기 성국부엔 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연주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하지만 황후에게 성국부가 황궁보다 안전한 장소라는 사실쯤은 연주도 잘 알았다.

이 말인즉, 지금 황후는 황궁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하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너를 왜 여기로 불렀는지 궁금하겠지.”

“말씀하시지요.”

“네게 당분간 입궁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러 왔다.”

그리 알아듣게 이야기했건만. 끝내 정엽이 황후를 설득한 것인가?

연주의 얼굴에 금세 그늘이 드리웠다. 황후는 연주의 손을 감싸 쥐며 다독이듯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거라.”

“황후마마.”

“정엽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너에게 당부하고픈 게 있어 부른 것이야.”

정엽과 관련된 일도 아니라면 대체 황후가 이런 말을 할 까닭이 무엇인가? 긴장한 연주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후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새 궁중에 해괴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 하여 네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뿐이니라.”

“해괴한 소문이라니요?”

“…….”

지금껏 망설이는 기색이라곤 없던 황후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2년 전, 네가 하늘의 벌을 받아 반음양을 낳았다고 하더구나. 네가 정엽과 상극이라서 말이다.”

“……예?”

“너희가 혼인하기 전 궁합을 맞춰 보았던 사천감 관원이 헛소리를 늘어놓은 모양이다.”

성대하게 혼인까지 치렀던 남녀가 상극이었다니.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연주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게다가 정엽과는 이미 오래전에 이혼하지 않았는가.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이제 와 이런 소문이 퍼졌다는 점이 무척 괴이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알아보니 곽 귀비의 심복이 사천감 관원과 접촉했다더구나. 열흘 후면 정엽이 친왕에 봉해지니 어떻게든 그 아이 앞길에 재를 뿌리고 싶어 애먼 너를 끌어들인 게지.”

“지금 곽 귀비라 하셨사옵니까?”

예나 지금이나 남을 음해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로구나!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던 연주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하지만 제가 한수에서 반음양을 낳았다는 사실은 전하께서 철저히 감추셨사옵니다. 오죽하면…….”

“안다. 알아.”

연주가 지난날을 떠올리며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사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다독였다.

“다만 때로는 피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번에는 내 뜻을 따라 다오.”

“마마, 곽 귀비가 작정하고 나선 이상 이 일이 그냥 덮이겠사옵니까?”

무언가 이상하다.

황후는 그간 그녀와 교씨 가문을 향한 궁중의 숱한 음모와 계략에 늘 단호하고 분명하게 처신해 왔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일에 대해서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설마…….’

황후가 궁을 나와 이토록 은밀하게 피신을 당부할 만한 일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졌단 말인가?

“혹 마마께서도 어찌하지 못하실 만큼 일이 커진 것이옵니까?”

“…….”

“연왕부에 있던 궁인을 매수했답니까? 아니면 산파인가요?”

“연주야.”

진실은 거짓을 이길 수 없는 법.

내가 아무리 떳떳하다고 해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이를 그 추운 곳에 묻어 두고 도망치듯 떠난 것이 잘못이었다.

“…….”

어느새 파르르 떨리고 있는 연주의 손을 안쓰러운 얼굴로 감싸 쥔 황후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니,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마.”

하지만 황후의 말은 연주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사람은 태어나는 날과 시간을 뜻대로 정할 수 없고, 정엽과의 혼인은 황명으로 진행된 것이었으니 그와의 궁합이 어떻든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음양을 낳았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내가 낳은 아이를 세상에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만도 서러운데, 이제는 조롱거리 취급까지 받아야 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죠?”

“궁중에는 음모가 많아. 완벽한 거짓도, 진실도 없단다.”

황후의 말이 묘했으나, 지금 연주는 거기에 담긴 진위를 판별할 만큼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다.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시는지요?”

“글쎄다. 너보다도 황궁 소식에 어두운 게 그 아이니 아마 모르지 않겠느냐.”

연주가 힘겹게 입을 열자 내내 말을 아끼던 황후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주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거라. 너희들이 이 소문을 들었든 듣지 못했든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다.”

황후는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까.

필사적으로 침묵을 종용하는 황후를 멍하니 지켜보던 연주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불현듯 아이를 낳은 날, 방 안에 쩌렁쩌렁 울리던 아기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없는 아이.

그러나 내 배 속에서 자그마치 일곱 달을 살아 숨 쉬던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대체 무엇을 해 주었던가?

차갑게 식은 육신일지언정 품에 안고 입 맞춰 주길 했나, 아니면 먼 길을 떠나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배웅을 해 주길 했나. 하물며 제 아비에 의해 땅속에 파묻히는 것조차 말리지 못했다.

아, 이건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니라…….

“아이가 제게 벌을 내리나 봅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조양 땅에 무슨 마음으로 돌아왔는가. 어떻게든 지상에 발 딛고 살기 위해 그리 아등바등 애를 썼는데…….

‘업보로구나.’

연주는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잦아들자 어둠이 밀려들고, 허공에 뜬 발끝이 벌겋게 아가리를 벌린 지옥 속으로 끊임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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