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정말 내가 바라던 게 뭔지 안다면 이런 일은 벌이지 말았어야죠.”
“이런 일?”
난데없이 ‘이런 일’이라니.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어렴풋이 연주의 속뜻을 파악한 정엽이 입을 다물었다.
“나를 피하겠다고 어전에 문안조차 들지 않았다더군요.”
“…….”
“폐하의 노여움을 사 황후마마를 심려케 하고, 밤중에 술을 마시고 출타해 왕부를 뒤집어 놓은 게 모두 나를 위한 일이었다고요?”
“아니. 그건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말씀은 잘하시네요.”
도무지 주변 사람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태도였다. 울컥 짜증이 치민 연주가 마음을 다스리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곧 친왕에 책봉될 거라 들었어요.”
“…….”
“평생 소원하던 일을 눈앞에 둔 거잖아요. 그러니 공적만 믿고 자만하지 말고 제대로 기회를 잡으세요. 적에게 공격당할 여지도 만들지 말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해? 내 소원이 친왕 책봉이라고.”
“그럼 아닌가요? 지금껏 황제 폐하께 인정받기 위해 모든 걸 바쳐 왔잖아요. 친왕 작위는 황태자 책봉을 위한 좋은 디딤돌이고요.”
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조용히 연주가 하는 얘기를 듣고만 있던 정엽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되묻는 연주나, 그를 위해 친왕 책봉을 주도하는 황후의 행동이나. 정엽으로서는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신 곁에는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황후마마와 성국부뿐만 아니라, 우리 평해왕부에도 당신의 앞날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고요.”
“그래서?”
“당신이 제멋대로 굴면 당신 주변 사람들이 다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제발 무모한 행동은 말아요.”
“……대단한 책사 나셨군.”
콧방귀를 뀐 정엽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연주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으므로 정엽은 굳이 꼬투리 잡지 않았다.
의외로 평소보다 고분고분한 정엽의 태도에 마음이 놓인 연주가 고민 끝에 속엣말을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간 당신이 내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했어요. 친왕에 책봉되면 수도에 상주하며 궁에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데 내가 있어 거슬렸던 거겠지요.”
“…….”
“그래도……. 나는 지금 당장 입궁을 그만둘 수 없어요.”
“왜?”
“황제 폐하께선 여전히 내 아버지를 의심하고 계시니까요. 당신도 내 오라버니가 10년 넘게 수도에 발이 묶여 있는 이유를 알잖아요.”
연주의 부친인 평해왕은 현재 왕작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황실 혈통이 아니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미 대화국에 역사적으로 많은 이성왕(異性王)이 있었고, 그들 대다수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는 점이었다.
제왕의 의심이 시작되면 영예로운 충신조차 역도로 둔갑되는 것은 순식간.
모든 제왕은 옥좌에 앉는 순간부터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고, 독자적인 영지와 사병을 거느린 번왕은 제왕의 눈에 언젠가는 뿌리 뽑아야 할 화근으로 비치기 마련이었다.
“평해왕 일가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황실에 반기를 든 적이 없어. 충신을 역도로 만들려면 그만한 명분이 필요해.”
“그럼 폐하께서 지난 수백 년간 황실에 봉공한 교씨 일가와 당신을 경계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야…….”
“지금 폐하께서는 교씨 일가와 평해왕부가 언제든지 반기를 들 수 있다고 믿고 계신 걸 거예요. 아직 폐하의 생각을 뒷받침해 줄 증거와 명분이 없을 뿐이죠.”
정엽이 아는 한 그의 부친은 역대 어느 제왕들보다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어쩌면 이는 황제가 교씨 일가의 힘을 빌려 형을 퇴위시키고 옥좌를 차지한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황제 자신이 그랬듯, 누군가 세력을 동원해 또 다른 황제를 옹립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주의 스승으로 입궁하라는 명은 오라버니를 통해 전해진 것이었어요. 그래서 더욱 거절하기 어려웠고요. 그러니까, 당분간만 참고 기다려 줘요.”
“참고 기다려 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적당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궁을 떠날게요.”
“……그러지.”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숨기고 동의를 표시한 정엽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를 등지고 섰다.
생사를 가르는 치열함이 전장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도가 지나치게 연주를 몰아붙였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잠시, 언젠가 그녀가 또 떠나리란 사실을 받아들이자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결국, 또 떠날 것을.
그러나 이별을 결정하는 쪽은 항상 연주였기에 정엽은 이 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더는 서로 오해할 필요도, 어느 한쪽을 몰아세울 필요도 없어졌으니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 * *
연주의 설득을 듣고 돌아간 정엽은 다음 날 곧바로 어전을 찾아 황제에게 그간의 무례를 사죄했다.
두 달 전, 공을 세우고 돌아온 장수를 문밖에 세워 두고 얼굴 한번 내밀지 않던 황제는 웬일인지 금세 마음을 풀고 그에게 정식으로 친왕 책봉 교서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곽 귀비는 곧바로 어전인 상양궁(上陽宮)으로 달려갔다.
“폐하,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옵니다.”
“그래?”
“연왕을 친왕에 봉하시고 나니 마음이 든든하신 모양이지요?”
“그럴 리가 있느냐. 짐이 기분 좋을 때라곤 너와 함께할 때뿐인 것을.”
상주문을 산처럼 쌓아 놓고도 한가로이 평상에 누운 황제가 가슴팍을 파고드는 귀비의 애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참이시지요?”
“그럼, 천자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느냐.”
흥이 오른 황제는 은근슬쩍 늘씬한 허리를 지나 풍만한 엉덩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슬쩍 몸을 비틀어 황제의 품에서 빠져나온 곽 귀비가 흐트러지지도 않은 머리 장식을 바로잡으며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저런, 우리 어여쁜 귀비에게 무슨 근심이 있기에 한숨 소리가 이토록 긴고?”
“황실에 경사가 넘치는데 신첩에게 무슨 근심이 있겠사옵니까?”
“연왕이 헌왕보다 먼저 친왕이 되는 게 불만인 게지?”
내가 네 속을 모를까.
벌써 다섯 걸음은 멀어진 애첩의 손목을 잡아챈 황제가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 앉혔다. 귀비는 한탄하듯 말문을 떼었다.
“연왕은 적장자이고 세운 공이 많으니 친왕이 되는 게 당연하지요. 다만 신첩은 연왕이 폐하보다 황후와 평해왕부의 말을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아 걱정일 뿐이옵니다.”
“평해왕부라니? 황후야 연왕의 적모이자 친이모이니 가깝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평해왕부는 이미 인연이 끊어진 지 오래일 텐데…….”
“어머나, 모르셨사옵니까? 근래 연왕이 승설군주와 수시로 왕래한다고 하옵니다.”
황제가 평해왕부 이야기에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곽 귀비가 은근슬쩍 두 사람 이야기를 흘렸다.
“이런, 이런……!”
황제는 선 황후의 바람대로 연왕을 평해왕의 적녀인 승설군주와 맺어 준 뒤, 연왕과 평해왕 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경계하여 두 사람의 이혼을 허락한 바 있었다.
비록 황후가 반년 전 승설군주를 공주의 스승으로 입궁시키긴 했지만, 그즈음에는 왕세자 외에 평해왕을 옥죌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그냥 내버려 둔 터였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신첩이 직접 폐하께 말씀 올리기에는 민망한 일이니 다른 사람을 불러 들어 보심이…….”
“민망하다?”
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대노한 황제가 곽 귀비를 다그쳤다.
“여기는 어전이다. 황명이니 어서 말하라!”
“저, 그것이……. 연왕과 승설군주가 인적 드문 후원에서 밀회를 즐기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 궁인이 있사옵니다.”
“…….”
“최근에는 군주가 연왕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연왕이 세자부를 드나들기도 하며 왕래한다더군요.”
지금 연왕이 짐 몰래 역당 모의를 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이야기를 들은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의 마음에 실컷 군불을 지핀 귀비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연왕은 이제 스물여섯, 군주는 스물둘.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가 아니옵니까.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이대로 두면 황실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옵니다.”
“아무렴.”
“하오니 폐하, 연왕에게 새 왕비를 찾아 주는 일은 절차가 복잡하니 우선 군주부터 새 사람을 찾아 혼인하게 하심은 어떠시옵니까?”
“흐음,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
잠시 고민하던 황제가 곽 귀비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의 아내를 고르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특히 연왕의 아내를 고르는 일이라면 더욱 신중함이 옳았다.
“평해왕도 하나뿐인 딸이 홀로 나이 들어 가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럼, 그럼. 귀비가 오늘따라 옳은 말만 하는구나.”
“과찬이시옵니다. 신첩은 그저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언지 남들보다 조금 잘 알 뿐이지요.”
황제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던 귀비가 새뜻하게 웃었다.
이제 연왕은 친왕도, 황태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승설군주 역시 더는 황후와 연왕의 주변에 얼쩡거리지 못하리라.
오늘따라 알아서 척척 제 뜻대로 움직이는 황제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귀비는 황제를 위해 거리낌 없이 앞섶을 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궁중에 묘한 소문 하나가 퍼지기 시작했다.
승설군주가 2년 전 사산한 아이가 반음양이었고, 이는 용손과 상극인 군주에게 내려진 하늘의 벌이었다는 것이다.